■ 보학/선현들의 묘.

점필재 김종직 묘와 신도비각

야촌(1) 2021. 5. 28. 23:16

작성일 : 2010. 10. 09(일)

 

■ 김종직(金宗直)

 

[생년] 1431년(세종 13), 경남 밀양

[졸년] 1492년(성종 23)

[본관] 선산(善山)

[호] 점필재(佔畢齋)

[시호]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숙자(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후 여러 벼슬을 거쳐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弘文館應敎知製敎)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과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이 무렵부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이원(李黿) 등 훌륭한 여러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리고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1489년에는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 사망하여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의 서산(西山)에 묻혔다.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權五福) 이원(李黿)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는 등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의 건의로 영의정 추증이 논의되었고, 1708년(숙종 34)에는 김종직의 시호를 회복하기를 예조에서 상소하자 윤허했다. 이어 1709년(숙종 35)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종필의 서간

 

 

▲점필재 김종직 신도비각 / ⓒ월봉

 

▲이 비는 홍귀달(洪貴達)이 찬하고, 오여발(吳汝撥)이 글씨를 쓰고, 김세렴(金世濂)이 전액늘 써서 1635년(인조 13)에 세웠다.  

 

▲점필재 김종직 묘역

 

▲점필재 김종직 묘 / 좌측비는 묘표이고 우측 비는 묘갈비이다.

 

소재지 : 경남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

 

▲점필재 김종직 묘비

 

▲점필재 김종직 묘표

 

▲묘역 좌측 석물들....

 

▲묘역 좌측 망주석

 

▲묘역 좌측 망주석

 

▲묘역 우측 석물들....

 

▲묘의 후경

 

 

 

▲점필재 김종직의 묘갈비 / 김종직의 묘갈명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權尙夏)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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