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기 묘(金萬基 墓)
조선 제19대왕 숙종(肅宗)의 장인
[생년] 1633년(인조 11)
[졸년] 1687년(숙종 13)
[본관] 광산(光山)
[저작] 서석집(瑞石集)
[관직] 총융사(摠戎使). 병조판서. 대제학(大提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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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효종(孝宗) 4년(1653) 계사(癸巳) 별시(別試) 을과(乙科) 3위(04/15)
[진사] 효종(孝宗) 3년(1652)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8위(13/100)
[생원] 효종(孝宗) 3년(1652)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64위(94/100)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 또는 정관재(靜觀齋). 형조참판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김반(金槃)이고, 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을 따라 남문에 올라가 분신자결한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 생원 김익겸(金益兼, 1614-1637)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참판 윤지(尹墀)의 딸이다.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이자 작은아버지인 김익희(金益熙)에게서 수학했으며, 『구운몽(九雲夢)』을 지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의 형이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52년(효종 3)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이어 주서·설서, 예조와 병조의 낭관, 지평·문학을 거쳐, 수찬·정언·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57년 교리로서 글을 올려 『오례의(五禮儀)』의 복상제(服喪制) 등 잘못된 부분의 개정을 청하였다.
1659년 5월 효종이 죽고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논란이 일자,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해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공격하였다.
1671년 딸을 세자빈으로 들여보내고, 1673년영릉(寧陵)을 옮길 때에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이 되었다.
1674년 7월 병조판서로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에 대해 소를 올려 3년상을 주장하였다.
그 해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승진되고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총융사(摠戎使)를 겸관해 병권을 장악했고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대제학이 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때 훈련대장으로서 끝까지 굽히지 않고 남인과 맞섰다. 그리고 강만철(姜萬鐵) 등이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과 종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자 이를 다스려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아들 김진규(金鎭圭), 손자 김양택(金陽澤)의 3대가 문형(文衡)을 맡았다. 노론의 과격파로서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삭직되었다가 뒤에 복직되었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서석집(瑞石集)』 18권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만기선생 묘역 전경 / ⓒ태백산jumok / 소재지: 군포시 대야미동 산 1-12
숙종의 장인 광성부원군 김만기 묘/ ⓒ태백산jumok
김만기 선생의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131호)에는 김만기 선생의 묘와 함께 김만기의 아들 김진구(金鎭龜, 1651-1704) 손자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의 묘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김만기 선생의 묘소는 이 묘역의 가장 윗부분에 자리하고 있는데, 서원부부인 한씨(西原府夫人 韓氏)와의 합장분을 중심으로 어필비, 묘표, 문인석, 망주석, 상석, 향로석 등의 옛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 맨 아래 산언저리에 서 있다.
어필비는 176cm의 방부원수형(圓首方趺圓首形)으로 복련(覆蓮), 당초문(唐草紋),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비신의 전면에 ‘어필(御筆)’이라고 전서로 쓴 후 ‘國舅保 社功臣光城府院君諡文忠金公萬基之墓’란 숙종이 쓴 면서를 새겼다. 뒤의 음기는 아들 김진구(金鎭龜)가 지었고 건립연대는 1699년(숙종 25)이다. 음기에는 묘표를 세운 돌을 숙종이 하사한 점, 한 때 보사훈(保社勳)이 삭탈되었는데 그것을 지우지 못한 사정 그리고 보사훈이 다시 회복되고 숙종이 어필로 묘표의 큰 글씨를 써준 사실 등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시호교지에 의하면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시기는 숙종 45년(1719년)이다. 어필비 건립연대보다 20년 뒤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충’의 글씨는 숙종의 어필이 아닌 것이다.
광성부원군 김만기 좌측 어필 묘표./ ⓒ태백산jumok
조선왕조실록 영조 42년(1766년) 11월 12일 기사에 의하면,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1716년~1790년)이 말하기를, “선조(先朝 : 숙종)에서 광성 국구(光城國舅)의 표석(表石)을 친히 쓰셨는데, 그때에 미처 시호(諡號)를 내리지 아니하여 ‘시(諡)’자 밑에 두 글자를 비워두고 쓰지 아니하였습니다.
시호를 내린 뒤에 즉시 써서 새기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밑에서 쓰는 것은 감히 할 바가 아니므로, 아직 새기지 못하였습니다.”라 하자, 영조(英祖)가 "내가 마땅히 이어서 쓸 것인데, 진실로 귀하다. 시호의 글자가 무엇인가?" 하매, 우의정 김양택(金陽澤,1712년~1777년/김만기 손자)이 말하기를, "문충(文忠)입니다."라 하였다.
따라서 광성부원군 어필비의 ‘문충(文忠)’ 글씨만은 영조의 글씨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자세히 어필비를 보면 ‘문충(文忠)’의 글씨가 약간 작은 감이 있다. 이처럼 광성부원군 어필비에 숙종과 영조 두 분의 어필이 함께 있는 특이한 케이스다. <군포역사문화기행 발행인: 이진복 2019/05/31 [09:18>
광성부원군 김만기 우측 묘표. / ⓒ태백산jumok
김만기 선생 시호교지[1719년]/ ⓒ태백산jum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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