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김익희. 김익겸. 김반 묘(金益熙.金益兼.金槃 墓) - 광산김씨 대전묘역

야촌(1) 2021. 5. 24. 22:18

작성일 : 2012. 10. 20(토)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 지정문화재자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정민역(貞民驛)이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이 일대를 나라에서 사패지(賜牌地)로 하사받아 광산김씨(光山金氏) 가문의 묘역이 되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선생의 터전인 이곳 대전 전민동 묘역에 김만중 선생의 조부 김반(金槃)선생의 묘와 부친 김익겸(金益兼)선생의 묘를 비롯해 직계후손들의 묘가 광산김씨 문중에서 400여년간 관리되고 있다.

 

그리고 재실에는 서포 김만중 선생의 초상화를 조각한 입상이 모셔져 있고, 그 옆에 서포선생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김반 둘째아들 대제학 김익희(金益熙)의 묘는 유성구 가정동 산8-9에 있다.

 

소재지 :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 산 18-1(유성대로 1665번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1548~1631)의 아들 대제학 김반(金槃)의 둘째 아들 김익희(金益熙)의 묘이다.

 

1610년(광해군 2)∼1656년(효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洲)., 조부는 사계 김장생(金長生), 

아버지는 김반(金槃)이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655년 대사성‧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대제학이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상단은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의 아버지 김익겸(金益謙,1614~1637)의 묘이고 아래는 조부 김반(金槃, 1580~1640)의 묘이다. /

    이곳은 역장 묘이다.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며, 신독재 김집의 아우인 김반(金槃)선생은 1580년(선조 13)∼1640년(인조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일(士逸). 호는 허주(虛州).아버지는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고, 어머니는 창녕조씨로 부사 조대건(曺大乾)의 딸이며, 신독재 김집(金集)의 아우이다.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세거지는 충청남도 연산(連山)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의 거재유생(居齋儒生)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낙향하여 10여년 동안 초야에 은거하며 학문을 탐구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빙고별제(氷庫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호종(扈從)하였다가 공주행재(公主行在)에서 실시한 정시문과에 급제, 호종의 공으로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그뒤 여러벼슬을 거쳐 대사성. 예조참판‧ 병조참판‧ 대사헌‧ 한성부우윤‧ 대사간‧ 이조참판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죽은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 묘역에는 부인의 묘 2기와 장자 익렬(益烈). 세째아들 익겸(益兼). 손자 만준(萬埈)의 묘와 두 정려문(旌閭門)이 있어 그 일가의 충신. 열려 유적으로 정화되어 있다.

 

 

▲김만중의 부친 김익겸(金益謙, 1614~1637)의 묘. 

 

김익겸(金益謙)은 1614년(광해군 6)∼1636년(인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남(汝南). 조부는 김장생(金長生)이고, 아버지는 참판(參判) 김반(金槃)이며, 어머니는 서씨이다. 김익희(金益熙)의 아우이다.1635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36년 후금의 태종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춘신사(春信使)로 파견된 나덕헌(羅德憲)‧ 이곽(李廓)등이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함께 귀국하자,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청나라의 경축행사에 참가한 사신과 용골대의 주살(誅殺)을 주장하였다. 이 말을 들은 청나라의 사신이 급히 서둘러 돌아갔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가서 섬을 사수하며 항전을 계속하였다.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지고 고전을 하는 중에 강화유도대장(江華留都大將)인 김상용(金尙容)이 남문에 화약궤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자분(自焚)하려고 하였다. 이에 영의정을 지냈던 윤방(尹昉)이 이 사실을 알고 달려와서 애써 만류하였으나, 김상용‧ 권순장(權順長)과 함께 끝내 자분하고 말았다.

 

이때 강화에서 순절한 사람은 모두 30명이 넘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며,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김만중의 부친 김익겸의 묘비. 

 

▲김만중의 조부 김반(金槃, 1580~1640)의 묘.

 

▲김만중의 조부 김반의 묘비. / ⓒ시시랑 꽃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