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정릉(靖陵) - 조선 제11대왕 중종(中宗) 묘역

야촌(1) 2021. 5. 29. 13:25

■ 중종(中宗, 1488~1544)

 

조선 제11대 왕(재위 1506∼1544). 연산군 시대의 폐정을 개혁하였으며,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士類)를 중용, 왕도정치를 시도하였으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개혁방법이 훈구파의 반발을 초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신진사류를 숙청하였다. 이후 신사무옥(辛巳誣獄), 삼포왜란 등으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였다.

 

◈재위 1506년 ~ 1544년

◈왕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1487-1557),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1491-1515)),

  ☀문정왕후(文定王后 尹氏 : 1501-1565))

  ◈아버지 : 성종(成宗),

  ◈어머니 정현왕후(貞顯王后) 

 

자는 낙천(樂天), 휘(諱)는 역(?)이다. 성종의 2남이며 연산군(燕山君)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尹氏), 비는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 제1계비(繼妃)는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제2계비는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는데, 1506년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에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연산군 시대의 폐정(弊政)을 개혁하였으며, 1515년(중종 10) 이래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중용하여 그들이 표방하는 왕도정치를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개혁방법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또 조급하게 서둘렀기 때문에 훈구파(勳舊派), 즉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종 자신도 조광조 등의 왕에 대한 지나친 도학적(道學的) 요구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차에, 1519년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의 모함에 따라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숙청하였다. 

 

그 뒤 훈구파의 전횡(專橫)이 자행되었으며, 또 1521년에는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나 안처겸(安處謙) 일당이 처형되었다. 1524년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파직, 1525년 유세창(柳世昌)의 모역사건, 1527년 작서(灼鼠)의 변에 따른 경빈박씨(敬嬪朴氏)의 폐위 등 크고 작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1531년 김안로의 재등장으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였는데, 문정왕후를 배경으로 한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 형제가 등장하여 1537년(중종 32) 김안로를 숙청하였으나, 이번에는 윤원형 일당의 횡포가 시작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라의 남북에서 외환이 그치지 않아, 1510년(중종 5)의 삼포왜란(三浦倭亂), 1522년 동래(東萊) 염장(鹽場)의 왜변(倭變), 1524년 야인(野人)의 침입, 1525년 왜구(倭寇)의 침입 등이 잇달았다. 

 

치세 초기에는 미신타파를 위하여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고, 과거제도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향약(鄕約)을 권장하여 백성들의 상조(相助) 정신을 고취시켰다.

 

또, 그 시기에 《소학(小學)》.《이륜행실(二倫行實)》.《경국대전(經國大典)》.《대전속록(大典續錄)》.《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삼강행실(三綱行實)》.《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문속집집람(吏文續集輯覽)》.《대동연주시격(大東聯珠詩格)》 등 다방면에 걸친 문헌이 편찬 ·간행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이후 이와 같은 문화발전을 위한 정책은 거의 정지되었다. 다만, 치세 말기에 군적(軍籍)의 개편과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에 대한 양전(量田)을 실시하였으며, 진(鎭)을 설치하고 성곽을 보수하는 한편, 평안도 여연(閭延) ·무창(茂昌) 등지의 야인을 추방하는 등 국방정책을 추진하였다.

 

한편,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활자를 개조하고, 지방의 사실(史實)을 기록하기 위하여 외사관(外史官)을 임명하였으며, 1540년(중종 35) 역대 실록(實錄)을 인쇄하여 이를 사고(史庫)에 보관하게 하였다. 

 

중종의 치세에서 처음에는 어진정치를 펴는데 상당히 의욕적이었으나, 기묘사화 이후 간신(奸臣)들이 판을 치는 통에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여 볼만한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능은 경기 고양(高陽)에 예장 한뒤 능호를 정릉(靖陵)으로 하였다가 18년 뒤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풍수가 나쁘다며, 1562년(명종 17)에 우격다짐으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산성동 131번지로 이장하였다.  <백과사전 참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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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靖陵)의 중종(中宗) 묘역

 

위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31(사적 제199호)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의 무덤으로, 1970년 5월 26일 선릉(宣陵: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과 함께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었다.

 

1545년(인종 1) 서삼릉(西三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 능역에 있는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 오른쪽 언덕에 왕릉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 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조선 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정릉은 지세가 낮아 여름철 홍수 때면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2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이 봉분을 두르고 있고, 그 바깥쪽으로 12칸의 난간석과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설치되었다. 석호(石虎)·석양(石羊) 각 2쌍, 상석,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무인석·석마 각 1쌍 등의 석물이 있다. 능원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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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중종의 묘비 / ⓒ마음을 비우면 보이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