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윤옥 신도비명(尹玉神道碑銘) - 李誠中 撰

야촌(1) 2021. 5. 10. 14:37

윤옥 신도비명(尹玉神道碑銘) - 이성중(李誠中)

[생졸년] 윤옥『尹玉, 1511년(중종 6) ~`1584년(선조 17)』



공의 휘(諱)는 옥(玉)이고, 자(字)는 자온(子溫)이며, 호(號)는 동리(東里)로 무송(茂松)사람이니, 시조는 고려(高麗)의 보승 별장(保勝別將) 윤양비(尹良庇)이다. 별장이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윤의(尹誼)를 낳고, 장령이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 윤등(尹登)을 낳았고, 간의가 감찰 지평(監察持平) 윤제(尹瑅)를 낳았고, 지평이 안성 군사(安城軍事) 윤충보(尹忠輔)를 낳았는데 군사는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여주(驪州)로 물러나와 사니 사람들이 그 절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군사가 광양 부원군(光陽府院君) 이무방(李茂芳)의 딸을 취(娶)하여 우정언(右正言) 윤미견(尹彌堅)을 낳고, 정언이 좌의정(左議政)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의 딸을 취하여 영월 군수(寧越郡守) 윤징(尹徵)을 낳고, 군수가 죽산 박씨(竹山朴氏) 박수신(朴粹信)의 딸을 취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 윤사익(尹思翼)을 낳았는데 박씨는 신라(新羅)의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예로 현덕(賢德)이 있었다.

 

판서가 관찰사 동래 정씨(東萊鄭氏) 정이한(鄭而漢)의 손자인 정세걸(鄭世傑)의 딸을 취하여 공을 낳으니 정덕(正德) 신미년(辛未年, 1511년 중종 6년) 7월 4일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어 4세에는 능히 글을 읽을 수 있었고 커서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531년 중종 2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경자년(庚子年, 1540년 중종 35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뽑혀서 들어갔고 임인년(壬寅年, 1542년 중종 37년)에 천거로 인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제배되었으며 대교(待敎), 봉교(奉敎), 예조(禮曹)ㆍ병조(兵曹)ㆍ형조(刑曹)의 좌랑(佐郞),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을 지냈다.

 

을사년(乙巳年, 1545년 인종 원년)에는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고 복을 벗자 또 수찬에 제수되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호조(戶曹)ㆍ예조ㆍ병조의 정랑(正郞), 헌납(獻納), 장령(掌令), 교리(校理), 응교(應敎), 전한(典翰)을 지냈다.

 

신해년(辛亥年, 1551년 명종 6년)에는 직제학(直提學)에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배되고 여러 차례 올라 좌승지가 되었으며 계축년(癸丑年, 1553년 명종 8년)에 봉양을 위하여 고을을 청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배되고 몇 해 사이에 호조 참의(戶曹參議)ㆍ양주 목사(楊州牧使)ㆍ부평 부사(富平府使)를 거쳤다.

 

신유년(辛酉年, 1561년 명종 16년)에는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고 공조 참판(工曹參判)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냈으며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에는 판서공이 졸(卒)하였고 복을 벗자 또 공조 참판에 제배되었다.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에는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수원 부사(水原府使)ㆍ인천 부사(仁川府使)ㆍ해주 목사(海州牧使)를 거쳐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ㆍ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냈다.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 2월 28일 을해(乙亥)에 자택에서 졸(卒)하니, 향년 74세였다. 임금은 공이 덕빈(德嬪)의 아버지라 하여 특별히 우의정에 증직하였다. 그해 4월 21일 경오(庚午)에 관(官)에서 상구(喪具)를 마련하여 여주(驪州) 대송리(大松里)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원(原)에 장사지내고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를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부모를 지성으로 섬겨 살림을 따로 낸 뒤에나 공무(公務)가 항상 바쁜 중에도 정성(定省)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상(喪)을 당해서는 예(禮)를 다하여 3년간 여묘살이 하였으며 매양 전알(展謁)할 때에는 나무를 둘러보며 슬피 호곡하여 서러움이 좌우를 움직였다.

 

벼슬에 당해서는 청근(淸謹)으로 일관하여 고인(古人)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지경이었다. 세속에서 좋아하는 바는 마음에 거들떠보지도 않고 책을 탐하고 학문을 즐겨 낮이나 밤이나 손에서는 책이 떠나지 않았으며 남에게서 얻은 바를 미루어 부지런히 후진(後進)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니 책을 들고 물으려고 찾아온 사람이 뒤를 이었다.

 

몸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능히 궁약(窮約)으로 자신을 유지하여 검박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공이 몰(歿)한 뒤에 사람들이 그 곳간을 열어보니 남은 재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의복도 쓸 만한 것이 없었는데 그런 뒤에 사람들이 더욱 공의 청렴을 믿게 되었다.

 

병으로 누웠을 때 순순(諄諄)히 마치 잠꼬대처럼 말을 하였으나 오직 국사(國事)를 걱정하는 일과 제사를 받들고 자질(子姪)들을 경계하는 일 이외에는 한 마디도 집안일에는 미치지 않았다. 부인 아버지의 휘(諱)는 봉종(奉宗)이니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이고, 그 선대는 휘 신달(莘達)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이다.

 

부인은 성행(性行)이 정정(貞靜)하고 공검 자효(恭儉慈孝)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었고 안방 살림에 차착이 없었는데 공보다 12년을 먼저 몰(歿)하였고 공의 직품에 따라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증봉(贈封)되었다.

 

1남 3녀를 낳아 아들은 진사(進士) 윤백순(尹百順)이니 수사(水使) 이흠례(李欽禮)의 딸을 취(娶)하여 2녀를 낳아 모두 어리다. 장녀는 유학(幼學) 구사열(具思說)에게 출가하여 일찍 홀로 되었고, 다음은 덕빈(德嬪)이니 순회 세자(順懷世子, 명종의 아들)의 배우가 되었으며, 다음은 이안성(李安性)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아 모두 어리다.

 

아! 공과 같은 재주와 어짊으로써 중년 이후에는 거의 외직에 있었고 시대와 서로 걸맞지 않아 지위는 그 덕에 걸맞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하늘이 점지함은 후하게 하고 누림은 편파적으로 하였을까? 장차 많이 쌓고 박하게 풀어 후인으로 하여금 그 결실을 거두게 하려함이나 아닐까? 나는 진사공을 두고 징험해 보련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계고(稽古)의 역량과 식무(識務)의 학문은, 참으로 통유(通儒)요

옛날 유직(遺直)이라 할 만 하였지.

 

때는 행할 만하다고 여겨 왕정(王庭)에 채찍을 휘둘렀건만,

도가 폐하는 마당이라서 시골에서 서성거렸다네.

 

현달한들 내 영광 아니며 궁색한들 내 병통 아닐지니,

진퇴와 소장에 한결같이 천명(天命)에 따랐다네.

 

서책은 늘 손에 있었고 막걸리 혼자서 퍼 마시면서,

마음을 사물밖에 부치고 훌쩍 돌아가 버렸다네.

 

집안 이을 아들 있고 짐승 맬 빗돌 있으매,

공인들 무엇을 못 잊을 것이며 나 또한 무엇을 슬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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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尹公神道碑銘。


公諱玉。字子溫。茂松人。號東里。始祖。高麗保勝別將良庇。別將生司憲掌令誼。掌令生左諫議大夫登。諫議生監察持平瑅。持平生安城郡事忠輔。郡事入我朝。退居驪州。人高具義。娶光陽府院君李茂芳之女。生右正言彌堅。正言娶左議政文敬公許稠之女。生寧遠郡守澂。郡守娶竹山朴氏粹信之女。卽新羅始祖赫居世之裔也。有賢德。生工曹判書思翼。判書娶觀察使東萊鄭氏而漢之孫世傑之女。生公。正德辛未七月四日也。公生而聰智。四歲。能讀書。稍長。受業於慕齋金安國之門。辛卯。中司馬。庚子。釋褐。選入承文院。壬寅。以薦拜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歷待敎奉敎禮兵刑曹佐郞司諫院正言成均館典籍,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乙巳。丁內艱。服闋。又拜修撰。歷司憲府持平,戶禮兵曹正郞,獻納掌令,校理應敎,典翰。辛亥。以直提學。拜承政院同副承旨。累遷爲左承旨。癸丑。爲養乞郡。拜南陽府使。歷戶曹參議,楊州牧使,富平府使。辛酉。特陞嘉善。爲同知敦寧。歷工曹參判,同知義禁。癸亥。判書公卒。服闋。又拜工曹參判。丙寅。朝京師。還爲水原仁川府使,海州牧使。歷漢城府左尹,同知中樞,五衛都摠府副摠管。甲申二月二十八日乙亥。卒于第。享年七十四。上以德嬪考。特贈右議政。得其年四月二十四日庚午。官庀喪具。葬于驪州大松里子坐午向之原。夫人坡平尹氏祔焉。公事父母至孝。雖異宮之後。仕務常劇。而定省不怠。居喪盡制。廬墓三年。每當展謁。輒繞樹悲號。哀動左右。當官淸謹。不愧古人。世俗所好。泊然無所用其心。耽書嗜學。日夜手不釋卷。又推所得於人。惓惓以訓後進爲己責。執經而稽疑者踵于門。身居宰列。而能窮約自持。儉素與寒士竝。及沒。人見其庫無餘財。衣無長物。然後益信之。寢疾。諄諄如夢中語。惟以國事爲念。奉祭祀戒子壻之外。無一言及于家。夫人考諱奉宗。尙衣院直長。其先曰莘達。佐高麗太祖。爲三韓功臣,門下侍中,平章事。夫人性行貞靜。恭儉慈孝。治家有度。主饋無忒。先公十二年 而殂。從公職贈貞敬夫人。生一男三女。男曰進士百順。娶水使李欽禮之女。生二女。皆幼。女長適幼學具思說。早寡。次德嬪。配順懷世子。次適李安性。生一男一女。皆幼。嗚呼。以公之才之賢。中年以後。補外居多。與時齟齬。位不滿其德。何天之畀之厚而享之偏耶。將多積而薄發。以食其報耶。余以進士公卜之。銘曰。

稽古之力。識務之學。允矣通儒。古之遺直。時乎可行。振策王庭。道之將廢。婆婆林坰。達匪吾榮。窮豈吾病。進退消長。一聽於命。靑編在手。濁醪獨揮。寄情事外。修然而歸。克家有子。牲繫有碑。公爲不亡。余又何悲。<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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