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 10.11
■ 안동 영호루(安東 映湖樓)
안동의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남원의 광한루와 함께 한강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리어져 왔다. 창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질 않아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천여 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雄府安東)과 함께 하고 있는바 현재의 영호루는 1970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세워진 한식 누각이다.북쪽 면에는 공민왕의 친필현판을, 남쪽 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인 ‘영호루’를 걸었다.
내부에는 갑술년(1934) 대홍수 때, 유실되었다가 회수한 현액들과 새로 복원한 현액들을 게판(揭板) 하였다.
현재 게판 되어 있는 시판(詩販), 제영(題詠), 중수기(重修記) 등 46점과 현판 2점이 있다.
영호루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이 이 곳 복주(福州 : 오늘날 안동의 고려시대 지명)로 백관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다고 한다.
왕은 피난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밑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였으며, 사장에서 활쏘기경기도 하였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어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영호루를 잊지 못하여 친필로 쓴 映湖樓(영호루) 금자현판(金子懸板)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중기 명종(明宗) 2년(1547년) 큰 홍수로 누각이 유실(流失)되었으나, 현판만은 김해(金海)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어 6년 후인 1552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 안한준(安漢俊)이 중창 하였으며, 영조(英祖) 51년(1775년)에 다시 홍수로 유실되어 부사 신맹빈(申孟彬)에 의하여 중건 되었다.
정조(正租) 15년(1792년)의 홍수 때, 또 유실되어 4년 뒤에 부사 이집두(李集斗,1744~1820)가 중건 하였으며, 1820년(순조 20) 부사 김학순(金學淳,1767~1845)이 중수하고 자신이 쓴 낙동상류 영남명루(洛東上流 嶺南名樓)라는 현판을 걸어 현재까지 남아있다.
1934년 갑술년(甲戌年) 홍수 때도 피할 수가 없었으며 누각은 유실되고 「금자현판」만은 수개월 후 선산군(善山郡) 구미리(龜尾里) 부근의 강물 속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이후 빈터로 있던 것을 1969년 12월 안동시. 군민의 「영호루 중건추진위원회」를 조직 하여, 안동시가지 남편 강 언덕인 정하동(亭下洞)에 1,085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1970년 11월에 역사적인 영호루의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영호루(映湖樓) 전경
↑공민왕 친필의 영호루(映湖樓) 편액(扁額)
↑박정희 대통령 친필 편액(扁額)
↑영호루 측면 모습
↑영호루 내부
↑1820년(순조20) 안동부사 김학순(金學淳,1767~1845)이 영호루를 중수하고 자신이 쓴 낙동상류 영좌명루(洛東上流
嶺左名樓) 현판을 걸었다.
↑영좌명루(嶺左名樓)
↑누대에 걸린 40여개의 편액 시(詩) 중 포은 정몽주의 시(詩)이다.
1337년(충숙왕 복위 6)~1392년(공양왕 4), 본관은 영일(迎日). 출생지는 영천(永川).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고려후기 문하찬성사, 예문관제학, 인물추변도감제조관 등을 역임한 관리.학자, 문신이다.
안동 영호루회자일본작(安東 映湖樓回自日本作)
일본서 돌아와 안동 영호루에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열편동남군현다(閱遍東南郡縣多) / 동남으로 여러 고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영가형승각우가(映嘉形勝覺尤加) / 영가의 경치가 제일 아름다워라.
읍거최득산천세(邑居最得山川勢) / 고을이 산천 형세 가장 좋은 곳에 있어
인물분연장상가(人物紛然將相家) / 인물도 많아라, 장상가가 분분하네.
장포세공요숙속(場圃歲功饒菽粟) / 논밭에 풍년 들어 곡식들은 넉넉하고
루대춘몽요앵화(樓臺春夢繞鸎花) / 누대의 봄날엔 꾀꼬리와 꽃이 있네.
직수명정종금석(直須酩酊終今夕) / 모름지기 오늘 밤이 다 새도록 취하리
만리초회해상착(萬里初回海上槎) / 만리 길을 처음으로 배를 타고 왔잖은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시(詩)이다.
1342년(충혜왕 복위 3)~1398년(태조 7), 본관은 봉화(奉化).자는 종지(宗之),호는 삼봉(三峰).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조선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판호조사(判戶曹事)·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제 영호루(題暎湖樓)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비룡재천롱명주(飛龍在天弄明珠) / 나는 용이 하늘에서 맑은 구슬을 희롱하다가
요락영가호상루(遙落永嘉湖上樓) / 멀리 영가고을 영호루에 떨어 뜨렸구나.
야상불순근병촉(夜賞不須勤秉燭) / 밤경치 구경코자 불 밝힐일 따로 없네.
신광만장사정주(神光萬丈射汀洲) / 신기한 광채가 물가를 만길이나 비추네.
↑백운(白雲) 우탁(禹倬)의 시이다.
1262년(원종 3)~1342년(충혜왕 복위 3)때의 고려후기 문신학자로 영해사록, 감찰규정, 성균좨주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시조 우현(禹玄)의 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우천규(禹天珪)의 아들이다.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제자이다.
우탁(禹倬)
영남유탕열연다 (嶺南游蕩閱年多) / 영남지방을 여러 해 노닐었지만
최애호산경기가(最愛湖山景氣加) / 호수와 산의 경치 가장 좋았네.
방초도두분객로(芳草渡頭分客路) / 풀 우거진 나루에 갈림길이 있고
녹양제반유농가(綠楊堤畔有農家) / 버들 숲 언덕에 농가가 서 있네.
풍념경면횡연대(風恬鏡面橫煙黛) / 거울 같이 물 위에 먼 경치 비치고,
세구장두장토화(歲久墻頭長土花) / 낡은 담장 위에 토종 꽃이 자라네.
우헐사교가격양(雨歇四郊歌擊壤) / 비 개자 사방 들판에 풍년가 들리는데,
좌간임초창한사(坐看林杪漲寒槎) / 누각에 앉아 숲 위로 외로이 뜬 배 보네.
↑성도공(成度公) 조효문(曺孝門)의 시(詩)이다.
조효문「미상~1462년(세조 8)」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예조참판(禮曹參判), 악학도감제조(樂學都監提調)등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창녕(昌寧). 조우희(曺遇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경수(曺敬修)이고, 아버지는 참판 조혼(曺渾)이며, 어머니는 정윤숭(鄭允崇)의 딸이다. 훗날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성도(成度)이다.
영호루(映湖樓)
조효문(曺孝門)
영남가려이무다(嶺南佳麗已無多) / 영남의 좋은 경치 이미 많지 않은데
형승화산백배가(形勝花山百倍加) / 지형이며 경치야 화산(안동)이 제일이지
방초청천분객로(芳草晴川分客路) / 꽃다운 물 맑은 내에 나그네길 나뉘고
녹양수죽엄인가(錄楊脩竹掩人家) / 푸른 버들 긴대는 인가를 가렸네
호심일난어취랑(湖心日暖魚吹浪) / 호숫물 따뜻하니 물고기 뛰놀고
장각풍미연축화(墻角風微燕蹴花) / 바람 잔 담 모서리엔 제비가 나네
남북분치하일요(南北奔馳何日了) / 남북으로 바쁜 걸음 언제 그치랴
영주직욕문장사(瀛洲直欲問張槎) / 영주에서 장건의 멧목을 묻고 싶구나?
↑점필제(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시(詩)이다.
김종직「金宗直, 1431년(세종 13)~1492년(성종 23)」은 조선전기의 병조참판, 홍문관제학,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로 경상남도 밀양 출신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는 사예 김숙자(金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이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계승하여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도학 정통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은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영호루(映湖樓)
점필제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落日簾旌灝氣多(낙일염정호기다) / 지는 해 쓸쓸한 기운 발에 어리어
倚樓愁思亂交加(의루수사난교가) / 누에 오른 이 마음 시름도 많아라.
透迤湖水秋通漢(투타호수추통한) / 출렁이는 물결은 은한(銀漢)에 닿고
轂轆柴車夜向家(곡록시거야향가) / 덜컹대는 수레는 집을 향하네.
光射汀洲星斗額(광사정주성두액) / 모래톱을 비추는 북두의 별빛,
香生林簿蕙蘭花(향생임부혜란화) / 들에서 스며 오는 혜란화 향기.
月明更想前朝事(월명갱상전조사) / 달 밝은 밤 고려의 흥망을 다시 생각해 보니
惟有鶖鶬呌斷槎(유유추창규단사) / 재두루미 우는 소리 간장을 끊네.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선생 시(詩)입니다.
1495년(연산군 1)~1554년(명종 9) 때의 조선전기 풍기군수, 성균관사성,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고려 말에 고조가 경상도 합천에 우거했으나, 아버지대에 칠원(漆原)으로 옮겨 살아 칠원에서 출생(일설에는 합천에서 출생했다고 함) 하였다.
증사복시정 주상빈(周尙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장손(周長孫)이고, 아버지는 주문보(周文俌)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영호루(映湖樓)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등조고루물색다(登眺高樓物色多) / 높은 누에 오르니 풍경이 좋고
전인비술우하가(前人備述又何加) / 선인들이 남긴 시구가 찬란하여라
굉천소고삼천지(轟天蕭鼓三千指) / 퉁소와 북 연주하는 소리 하늘을 울리고
박지여염일만가(撲地閭閻一萬家) / 평민들 집집마다 땅을 두드리며 기뻐한다네.
원객금회공백수(遠客襟懷空白首) / 길 떠나온 나그네 시름 탓에 백발만 더 하는데
궁후절서속황화(窮秋節序屬黃花) / 쓸쓸한 가을철 맞은 국화는 활짝 피었네.
현지취수연은한(懸知翠水連銀漢) / 푸른 물이 저 먼 하늘 은하수에 닿았으니
직소응간범두사(直泝應看犯斗槎) / 바로 올라가면 북두칠성까지 사달리 이어지리.
↑퇴계 이황의 시(詩)이다.
이황「李滉, 1501(연산군 7)∼1570(선조 3)」때의 조선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로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시호는 문순(文純),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다.
映湖樓(영호루)
퇴계 이황(退溪 李滉)
客中愁思雨中多(객중수사우중다) / 나그네 시름이 비 만나 더한데
況値秋風意轉加(황치추풍의전가) / 더구나 가을바람에 더욱 심란하구나,
獨自上樓還盡日(독자상루환진일) / 홀로 루에 올랐다 해져야 돌아옴이여,
但能有酒便忘家(단내유주편망가) / 다만 술잔 들어 집 그리움 잊는다,
慇懃喚友將歸燕(은근환우장귀연) / 은근히 벗을불러 돌아가는 제비는
寂寞含情向晩花(적막함정향만화) / 쓸쓸히 정을 품고 늦은 꽃을 향하구나,
一曲淸歌響林木(일곡청가향임목) / 한 곡조 맑은 노래 숲속을 울리는데,
此心焉得以枯槎(차심언득이고사) / 이 마음 어쩌다 마른 삭정이 같이 되었나.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의 시(詩)이다.
이현보「1467년(세조 13)~1555년(명종 10)」는 조선전기에 형조참판,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문인이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菲仲), 호농암(聾巖)·설빈옹(雪鬢翁)이고, 예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참찬 이흠(李欽)이다. 그는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다.
제 영호루(題映湖樓)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落魄登樓歲月多(락백등루세월다) / 낙백하여 누에 오르던 세월도 많았는데
重來非分印章加(중래비분인장가) / 분에 넘는 벼슬 받고 다시 또 왔네
黌堂負笈留遺蹟(횡당부급유유적) / 글 배우던 향교엔 옛 자취가 남아 있고
驛里居停有主家(역리거정유주가) / 집 떠나 머물던 주인집도 그대로네
白首東西身已老(백수동서신이로) / 동서로 분주하다 몸은 이미 늙었지만
靑山今古眼添花(청산금고안첨화) / 청산은 예 같아 눈에는 꽃이 피네.
長林遠樹渾依舊(장림원수혼의구) / 긴 숲 멀리 흐릿하게 뵈는 옛 나무들
三十年來半作槎(삼심년래반작사) / 삼십 년 동안 반은 삭정이가 됐네.
↑누대
↑누대에서 보는 안동시가지
사진출처 : 대구광역시 행정동우회
'■ 보학 > 고궁,정려,서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농월정(弄月亭) (0) | 2020.11.07 |
---|---|
낙성대(落星垈) (0) | 2020.09.18 |
제주성 남문 옛 모습 (0) | 2020.06.07 |
음성 도통사(道統祠) 복원(復元) 관련 이야기 (0) | 2020.03.19 |
신항서원 묘정비(莘巷書院廟庭碑) (0) | 2020.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