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7. 08. 14
↑제주성(城) 남문(南門)의 옛 모습
1914년 동문·서문 사라지고 간성 2문도 없애
제주성 원형 회복 위한 학술규명·관심 절실
제주시 남문로터리 근처 한짓골 진입부. 지금은 쇠락한 도심의 뒷골목이지만 이곳은 제주성의 중심 도로로 관덕정을 향하는 길목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젊은이들이 즐겨찾던 해방구였다.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이곳 관덕로 8길 일대에 남문루 자리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표석을 제외하고 남문이 위치했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제주성 동문과 서문 역시 자취는 사라졌다. 1910년대까지 제주성 남문·동문·서문 등 3문은 존재했으나 일제에 의해 철거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올해가 제주성 동문과 서문이 철거된 지 꼭 100년이 된다. 그 100년 동안 제주성은 기본 골격이 완전히 해체돼버렸다. 제주성에는 처음부터 북문이 없었다. 그 이유는 해안선에 가까운데다 외적의 침입을 우려한 때문에 북문을 축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성문은 사라지고 문루를 감쌌던 옹성은 헐어내 도로가 뚫렸다. 성문은 일제에 의해 훼철되기 전 사진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약 100여 년 전 제주성 남문은 현무암을 켜켜이 쌓아올려 견고한 모습이다. 그 위의 문루 역시 기왓장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굳건히 서있다. 성 안과 밖을 오가는 길은 넓적한 현무암을 바닥에 깔아 포장했다. 일제가 허물기전까지 제주성과 성문은 성곽형태를 온전히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남문 안쪽으로는 초가가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속 사람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빈 지게를 지고 있는 여인과 성 안으로 훠이훠이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여인이 오버랩된다. 구덕을 지고 있는 어린이와 갈옷을 입은 여인, 흰 무명옷을 입은 여인 등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남루한 옷차림에 일상의 고단함이 느껴지지만 순박하기만 한 제주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남문루와 제주성의 실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진이다.
제주성에 문루가 세워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기록상으로는 1512년(중종 7)에 목사 김석철이 남문을 개축한 것이 처음이다. 그 이전부터 남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언제 처음 건축됐는지는 알 수 없다.
남문은 옛 이름이 정원루였다. 1512년(중종 7)에 김석철 목사가 남문루가 협소하고 낡아서 새롭게 증축하고는 편액을 정원이라 하였다. 1512년부터 남문은 정원루로 불리기 시작했으나 그 이전 편액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원루는 1705년(숙종 31)에 목사 송정규에 이어 1780년(정조 4) 목사 김영수가 중수했다.
↑제주성 남문지 자리에 설치된 표석.
남문은 제주성 동문과 서문 등 3문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남문루만 소개하고 있고, 동문ㆍ서문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추측할 수 있다.
남문이 가장 먼저 생긴 것은 동문, 서문에 비해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문은 일제 강점기인 1918년에 철거되고 만다. 남문에 앞서 철거된 것이 제주성 동문과 서문이다.
제주성 동문은 옛 이름이 제중루였다가 후에 연상루로 바뀐다. 1666년(현종 7년) 목사 홍우량이 중수했고, 1808년(순조 8년)과 1856년(철종 7년)에 목사 한정운과 채동건이 각각 중수했다.
동문 역시 일제에 의해 1914년 문루가 철거되고 말았다. 동문은 원래 산지천 서쪽에 있었다. 그러다가 곽흘 목사가 1565년(명종 20년) 산지천 밖으로 제주성 동성을 확장하면서 동문이 건축됐다. 동문이 있던 자리에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서문의 옛 이름은 백호루였다. 백호는 동서남북 네 방위중 서쪽으로 수호하는 방위신이어서 문루를 백호루로 한 것으로 보인다. 1773년(영조 49년)에 박성협 목사 당시 중수하면서 진서루로 개편됐다. 서문 역시 1914년 훼철되고 말았다. 서문 자리는 아스팔트 도로가 뚫렸고 옛 자취는 찾을 수 없다. 다만 헐리기 전에 서문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 1장이 남아있다.
일제는 제주성 3문만 헐어버린 것이 아니다. 제주성에는 산지천을 따라 쌓았던 간성에 남문인 소민문과 북문인 중인문 등이 있었다. 간성의 두 개 의 문 역시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다.
소민문은 1780년(정조 4년) 제주목사 김영수가 축조했으나 1915년에 철거했다. 북문은 수복문에서 후에 중인문으로 불렸다. 현재 탐라문화광장 조성부지가 중인문 위치여서 발굴조사를 통한 문지 규명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중인문은 소민문보다 1년 앞서 1914년에 철거됐다.
일제는 제주성 3문과 간성 2문을 없애버렸다. 문루는 성곽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일제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성문뿐만 아니라 성곽 훼철과정에 대한 학술규명을 통해 제주성의 원형을 회복하기 위한 관심과 중장기 대책이 절실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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