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독립운동가 이상정

야촌(1) 2017. 4. 3. 08:33

광복군의 숨은 공로자 이상정(李相定, 1896~1947)

 

“장군이 국민정부의 초청에 응하였음은 오로지 항일전에 조력하기 위함이오. 항일전에 진력하였음은 또한 조국해방을 기한 까닭이니 장군은 조국해방의 일념을 쫓아, 항상 조국동지의 원조에 진력하였나니 장군의 공로는 실로 청사(靑史)에 빛날 바입니다.”

-이상정 영결식에서 시인 백기만의 조사(弔詞) 중

 

[독립운동가 이상정]

 

이상정(李相定, 1896~1947)1) 이라는 이름은 매우 생소하다. 2017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된 독립운동 가인데도, 그가 어떠한 활동을 한 독립운동 가인지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상정은 1920년대 중반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중국군에 복무하거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며 항일독립운동전선에서 적극 활약한 인물이었다.

 

특히, 이상정은 중국군에서 참모직으로 장관급(將官級) 대우를 받았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뿐만 아니라 군인이며 독립운동 가이면서도 학자요 시·서·화에 조예가 깊은 예술인이기도 하였다.

 

[이상화와 이상정]

 

사실 이상정의 4형제는 모두 한국근대사에서 일정한 위상을 갖춘 전문가이며 문필가로 알려져 있다. 둘째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는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으로 이름 높고, 셋째 이상백(李相佰, 1904~1966)은 역사학자인 동시에 사회학자이며 체육인으로도 저명하였다. 넷째 이상오(李相旿, 1905~1969)는 수렵가이면서 저술가였다.

 

이상정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군에서 활동하며 한중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해방 이후 중국에서 한인귀환에 힘쓰다가 1947년 9월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10월에 뇌일혈로 사망하여 해방공간에서 그의 뜻을 펼치며 활동할 기회가 없던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국내활동과 중국망명]

 

이상정은 호를 청남(晴南) 또는 산은(汕隱)이라 하였고, 직문(直文)과 연호(然晧)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1896년 6월 10일(음력, 양력 7월 9일) 대구에서 상당한 재력을 갖춘 경주이씨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조부인 이동진(李東珍) 대에 와서 재산을 모아 가난한 이들을 돕고 문중을 위해 많은 일을 하면서 널리 알려진 집안이었다. 부친 이시우(李時雨)가 1908년 사망하여, 그와 형제들은 조부와 백부 이일우(李一雨)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이일우는 대구에 우현서루(友弦書樓)라는 도서관을 설립하고 당대의 우국지사들과 교류하였다. 그 곳은 1920년대 교남학교(嶠南學校)로 발전하였고, 오늘날의 대륜중고등학교(大倫中高等學校)가 되었다. 이상정은 백부가 운영하던 사숙(私塾)에서 신구학문을 수학하였을 것이다.2)

 

이상정은 1910년대 초 일본에 유학하여, 성성중학교(成城中學校)와 국학원대학(國學院大學)에서 수학하였다. 성성학교는 본래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위한 예비학교로 만들어진 사립 특수교육기관이었으나, 1897년 이후 일반 중학교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예비 군사교육기관의 기능과 명성은 남아 있었다. 뒤에 이상정이 중국에 망명한 이후, 별다른 군사경력도 없는 상태에서 풍옥상(馮玉祥)의 서북군(西北軍)을 비롯한 중국군에 복무할 수 있던 것은 성성중학교에서 수학한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상정이 동경 국학원대학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다고 하는데, 그 졸업생 명부에서 이상정의 이름이 찾아지지 않는다. 아마도 이상정이 국학원에 재학하였지만, 졸업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3)

 

이 학교는 일본 국학과 관련하여 일본사와 일본문 등을 가르치던 곳이었으나, 본래 일본 신도(神道)의 제관을 양성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관으로, 국수적인 성격이 두드러진 교육기관이었다.

 

이상정은 이 대학의 전수부나, 단기에 일본사와 일본 문을 수학하기 위한 속성과에 적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정이 귀국한 시기는 1917년 전후였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1917년부터 1919년 3·1운동 전후까지 대구계성학교의 도화교사로 재직하였다.

 

이상정이 일본에서 미술학교와 상업학교에서 수학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특히 이상정이 귀국하여 도화교사를 하고 서양화 개인 전람회를 개최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미술학교에서도 수학하였을 것이다.

 

1923년 12월 대구에서 미술 연구와 실습을 목적으로 벽동사(碧瞳社)를 조직하였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이상정이 성성중학교와 국학원대학에서 수학하였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두 곳 모두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적·실제적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혹 이상정이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일본적인 교육기관을 선택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의 연령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뒤에 이상정이 중국군에서 활동할 수 있던 배경의 하나로 그가 뛰어난 일본통이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될 만큼, 그는 일본을 제대로 인식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아무튼 이상정에 관련된 자료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상정은 대체로 1912년부터 1917년 전후까지 일본에 유학하며 역사학과 미술, 상업, 그리고 군사학 등을 수학한 셈이고, 이런 여러 과정은 대개 정규과정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1913년 5월 이상정은 경북 청도(淸道출신의 한 살 위인 한문이(韓文伊)와 혼인하였고다음 해 1월 숙희(淑熙)라는 딸이 태어났으나 그해 12월 사망한 것으로 나타난다그리고 1916년 8월 선희(善熙)라는 둘째 딸이, 1918년 12월 외아들 중희(重熙)가 태어났다.

 

동생 이상화는 3·1운동 시위계획이 발각되어 서울로 피신하였으나 1917년부터 대구 계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이상정이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3·1운동 직후 계성학교를 사임하고 대구를 떠났으나, 1920년에는 대구청년회 조직을 주도하고 있었다.

 

아마도 1920년 후반부터 1923년 후반까지는 평안도와 서울에서 교사로 재임한 것으로 보인다. 정주의 오산학교와 평양의 광성고보, 그리고 서울의 경신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역사·지리·수학·한문·습자·도화 등을 담당하였다.

 

『개벽』 1922년 8월호에 게재된 이상정의 시조에 “패강(浿江)·청류벽(淸流壁)·모란봉(牧丹峯)·부벽루(浮碧樓)·관서 승지(關西勝地)” 등의 표현이 나타나는 것으로도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특기할 것은 이상정이 재직하였다고 알려진 이들 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다.

 

이상정이 기독교 신자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적어도 기독교와 무관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아무튼 1923년 12월 대구에서 벽동사를 조직하고, 1925년 1월 대구에서 조직된 용진단(勇進團)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음이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1923년 말에는 대구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이상정이 중국으로 망명한 시기는 1925년 5월경이었다. 그 해 1월 사회주의 성향의 용진단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4월경 서울에서 민중자대회가 해산 당하자 용진단 관계자가 종로에서 적기(赤旗)를 흔들며 만세를 부른 이른바 적기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상정의 중국망명은 적기사건의 검속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상정이 1910년대 후반부터 교육활동을 계속 하였지만, 1920년대 중반 전후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일제의 정보보고에는 이상정의 중국망명을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공명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항일활동]

 

이상정은 망명 직후 하얼빈에서 민족교육에 참여한 것으로 미루어, 망명준비를 이전부터 해왔던 것 같다. 그러나 이상정은 교육보다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40여 일간 동북지역 3,700리를 여행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26년 중에 하북성(河北省) 장가구(張家口)와 내몽고 수원(綏遠)에서 풍옥상(馮玉祥) 군 참모부의 막료로 근무하였으며,4) 유동열(柳東說) 등 독립운동가도 만났다.

 

그리고 1926년 10월 평양 출신의 권기옥(權基玉, 1901~1988)과 간단한 혼례식을 올리고 동거하였다. 권기옥은 3·1운동에 참여하여 실형을 산 투사였고, 중국에 망명하여 항주(杭州)의 홍도여학교(弘道女學校)를 마친 뒤, 1925년 운남(雲南)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풍옥상 군대의 항공대에서 복무하고 있던 여걸이었다.

 

이들은 해방 될 때까지 함께 중국군에 관여하거나 임시정부에 참여하며 항일운동에 투신하였기 때문에, 단순한 부부로서의 역할보다 동지로서의 움직임으로 이해된다. 다만 이때 이상정은 권기옥에게 국내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권기옥과 동료들]

 

이상정은 권기옥과 내몽고를 떠나 북경으로 이주하였고 1927년 권기옥이 상해 동로항공사령부의 비행원이 되자 상해로 이주하였다. 권기옥이 남경판사처로 전임되자 남경 진회하(秦淮河) 부근에서 살았다.

 

이 시기 이상정은 항공사령부의 특별문관 등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5) 그런데 1928년 3월 이상정 부부와 의열단 계열의 손두환(孫斗煥) 등이 공산당 혐의로 중국관헌에 체포되어 남경 일본영사관에 넘겨져 40여일 조사를 받은 일이 일어났다.

 

남경의 중국 유력인사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이로 미루어 이상정 부부는 의열단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권기옥은 남경항공서에 복직하였는데, 이즈음 남경을 방문하였던 동아일보사 특파원 주요한(朱耀翰)은 중국의 대표적인 기독교인 장군으로 알려진 인물의 집에서 열린 가족예배에 참석하는 이상정 부부를 만났다. 이들 부부는 기독교인으로 지내고 있었다.

 

1929년 이상정은 국민정부군 사단 훈련처 책임자로 배속되었다가 사임한 이후, 1938년까지 중국군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중국군 항공 관련 업무에 관련된 활동이 없지 않았는데, 이는 권기옥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정 부부는 권기옥이 1933년 7월 항주항공국으로 발령이 나, 남경에서 항주로 옮겼다. 1933년 12월 항주에 소재하던 임시정부에서는 이상정을 임시의정원의 경상도의원으로 보선하였으나, 의정원 회의에 참석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에서 1934년에도 의정원 의원에 추천되었다가 철회되었다. 의열단 계열과 가까웠던 이상정은 이 시기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1936년 하반기에 이상정 부부는 일제의 첩자로 오해 받아 8개월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들 부부를 시기한 동포의 무고로 비롯된 일이었는데, 주위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국내에도 알려졌는지, 1937년 3월경 이상화가 이상정을 만나기 위하여 남경을 찾아왔고, 형제는 3개월 정도 남경과 북경 등지를 여행하였다. 이상화는 이상정의 원고를 가지고 귀국하였으며, 이 일로 일제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압수된 원고가 분실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직후인 1937년 7월 7일 이른바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상정은 중일전쟁의 발발을 기회로 민족전선 통일운동의 선두에 섰다. 7월말 우파세력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고, 이어 11월 좌파세력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는데, 이상정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출발을 주도한 한 사람이었다.

 

이들 부부는 이미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고 있었다. 남경 철수시에 이상정과 권기옥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金元鳳) 등과 함께 이동하다가 헤어져, 1938년 중경(重慶)에 도착하였다.

 

이상정은 국민정부의 교섭을 받아 육군참모학교의 소장교관(少將敎官)으로 취임하였고, 아울러 화중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의 막료직도 겸하였다. 무엇보다도 이상정이 군사전문가의 자격보다 일본통이고 중국역사에도 정통하였다는 점에서 중국군에서 그를 필요로 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상정은,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파세력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1940년대에 이르러 임시정부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상정은 1942년 8월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이어 10월 경상도 지역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다. 이보다 일찍 1941년 육군참모학교에서 귀주성(貴州省) 식봉현(息烽縣) 소재의 유격대훈련학교의 소장교수(少將敎授)로 전임되었으나 임시정부의 직임을 맡고 적극 활동하였다. 중국군에 재직하면서도 임시정부 활동을 병행하였다.

 

이상정이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을 때, 경상도 의원은 김원봉·김상덕(金尙德)·이정호(李貞浩)·유림(柳林)· 한지성(韓志成) 등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파계열이 장악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상정이 의정원의원에 선임된 이유로 “증재국내조의용단활동(曾在國內組義勇團活動)”이라고 기재된 일이었다. 1925년 국내에서 의용단 활동을 전개한 것이 지적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이상정이 임시정부와 무관하게 지내왔다는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상정의 임시정부 참여는 그간 15년 이상 중국에 있으며 일정한 거리를 두어온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의정원의원에 선출된 직후 1942년 10월 말에 개최된 제34회 의정원회의에서 이상정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국무위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상정은 조선민족혁명당과 연계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1945년 2월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에 참여할 때까지 당적을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상정은 의정원에 참여한 직후인 10월 28일자로 의정원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최단기간 내에 중·미·영·소 등 연합 각국정부에 향하여 정식으로 아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이라는 주문의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건’ 제의에 대표제안자로 나섰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최단 시일 내에 대중화민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향하여 현하 해회(該會)에서 한국광복군에 행용하는 소위 행동준승(行動準繩) 9개 조항을 즉시 취소하고 절대적으로 국제간 평등적 입장에 처하여 우의적으로 적극 원조하기 요할 것이며 단 중국 영토 내에서 침략국가에 대하여 공동작전을 계속하는 기간 내에 있어서는 해군(該軍)의 지도를 임시로 태평양전구 중국구 사령장관에게 위임함이 타당하다 인함”이라는 주문의 ‘광복군에 관한 건’도 대표제안자로 서명하였던 것이다.

 

[임시의정원 제24회 정기 회의록]

 

임시의정원에서 이상정은 1943년에도 임시의정원 제2분과위원, 의정원법 개정위원, 제1분과위원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1944년 6월에는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재선임 되었다.

 

1944년 이상정은 의정원의 제4분과위원에 김원봉·이청천(李靑天)·유동열·조성환(曺成煥)과 함께 선임되었는데, 군무·교통을 담당하는 이 분과위원회 구성으로 미루어 그가 임시정부 내 군사부문의 대표적인 전문가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상정이 의정원에서 한 여러 발언으로 미루어, 한국민족에 대한 자부와 자존을 크게 강조하였다고 할 것이다. 특히 중국군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광복군의 자주적 활동을 위한 9개준승의 취소를 여러 차례 강조하였으며, 9개준승을 취소하고 중국과 평등조약을 체결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일본군 탈주 한적사병(韓籍士兵)에 대해서도 ‘부로(俘虜)’나 ‘감화(感化)’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가출금(假出金)’이나 ‘신수비(薪水費)’와 같은 일본용어 사용의 잘못됨을 지적하며, 우리말의 사용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이상정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의지를 살필 수 있다.

 

사실 이상정이나 권기옥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무엇보다도 한중연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부터 중국군과 관련을 맺었던 것이 그러한 한중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광복군의 9개준승 문제 등 한국독립에 중국이 적극 지원하지 않자, 이상정은 자주적 관점에게 강력하게 이를 비난하였다. 한국과 중국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중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1945년 2월 이상정은 신한민주당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 정당은 한국독립당 1당 위주의 임시정부의 개조와 임시정부 내부의 대립과 갈등을 비판하는 세력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한국독립당의 지도부에 불만을 지닌 세력과 민족혁명당의 비의열단 계열이 연합한 형태로 조직된 신한민주당은 홍진(洪震)·유동열·김붕준(金朋濬)이 주석단을 맡고, 이상정과 손두환 등이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신한민주당은 반한국독립당의 기치 아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개혁, 그리고 독립운동자대표대회의 소집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상정이나 손두환 등 이들은 대개 중국군에 복무한 경력을 가지고, 민족전선 통일운동의 선두에 나선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 임시정부에서도 의정원 의원으로 한국독립당에 대립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상정의 정치노선은 민족주의 좌파 또는 중간파로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권기옥은 1943년 2월 중경에서 재건된 한국애국부인회에 참가하여 사교부 주임직을 맡는 등, 여성독립운동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이상정은 1945년 5월 중경에서 흥사단(興士團)의 예비단우로 입단하였다. 이상정은 이미 남경에 거주하던 때부터 흥사단에 기부금이나 서적·잡지 등을 낼 만큼 관심을 두고 있어 왔는데, 1945년에는 흥사단에 입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1945년 흥사단에 입단한 예비단우는 이상정을 포함하여 모두 신한민주당의 간부들이었음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아마도 신한민주당 주석단의 김붕준과 선전부장 안원생(安原生), 재무부장 유진동(劉振東) 등이 흥사단 단우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권기옥도 흥사단에 입단한 것 같지는 않지만, 1945년 3월 안창호 서거 7주기 기념식에서 합창에 참여하고 있었다. 1940년대에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래 이상정은 임시정부의 개조와 통합을 통한 독립운동 노선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상정은 중국이 삼민주의를 따라 민주주의에 계획경제를 실시하고 사회주의노선으로 갈 것 같다는 중국군 장성의 견해를 수긍하면서, 대중의 자각과 비판 하에서 대중을 대변하는 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견해는 임시정부의 정치형태에 대한 완곡한 비판일 수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상정은 일제의 항복이 알려진 1945년 8월 13일 신한민주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의정원에,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차 성립될 전국통일 적 임시의회에 봉환(封還)할 것을 요구한 제안에 참여하였다.

 

이어 8월 23일에는 내각 총사직을 통한 ‘간수내각(看守內閣)’의 조직을 주장하는 제안에도 동참하였다. 이러한 이상정의 움직임은 한국독립당이 주도하던 임시정부가 좌우합작의 형태로 개조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대중성이 결여된 임시정부의 한계를 인식하고 대중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활동을 기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임시정부 내에서 좌우세력이 전개한 권력투쟁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상정은, 1930년대 이래 관심을 가져온 민족전선 통일운동의 관점에서 해방 이후의 정치적 지향을 권력투쟁보다 대중을 우선하는 노선에 주목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상정의 정치노선을 민족주의 좌파 또는 중간파로 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점에서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독립운동사에서의 이상정]

 

이상정은 1925년 중국망명 이전에는 교육과 사회운동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중국망명 이후에는 중국군과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항일전선의 선두에 섰다. 특히 중국군에서 이상정을 장관급의 참모나 교관으로 대우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군사전문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정은 군사전문가에 그치지 않았다. 예술가적 소질을 지닌 이상정은 풍류를 즐겼고, 전각(篆刻)과 문예에 조예가 깊었다. 즉 시·서·화에 능하였던 것이다. 이상정의 유고집인 중국유기(中國遊記)를 통해서도, 그가 중국사와 문예에 정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정은 적지 않은 저술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상정의 사상이나 독립운동 이념 등을 살피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군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궤적만으로도, 역사를 직면하고자 한 한 지식인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상정은 1930년대 후반 민족전선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1940년대에는 임시정부의 개조와 통합을 통한 독립운동 노선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아울러 한국민족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발전을 위한 자부와 자존을 크게 강조하였으며, 대중정당의 필요성도 인식하고 있었다.

 

이상정이 조선민족혁명당이나 신한민주당, 그리고 조선민족전선연맹에 관여하고 보인 정치노선으로 미루어, 민족주의 좌파 또는 중간파로 분류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상정은 해방 후 즉각 국내에 들어오지 않고 1946년 1월 상해로 가서, 한인의 권익보호에 진력하였다. 이상정이 전후 중국의 일본진주군사령부의 중장막료로 내정되었다가, 중국의 일본진주가 중지되자 중국 거주 한인문제에 전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47년 7월 이상정은 모친상을 맞아 9월에 귀국하였으나, 10월에 뇌일혈로 별세하였다. 20년 만에 돌아온 해방된 조국에서 건국을 준비하기도 전에 이승을 버렸던 것이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1968년 이상정에게 건국훈장을, 1977년에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