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보재 이상설선생

야촌(1) 2017. 1. 6. 09:12

■ 이상설 선생(李相卨先生)

 

[생졸년] 1870년(고종 7). 1월 27일(음력12월. 7일 ~ 1917년. 3월. 2일(음력 2월 9일 금요일)

[문 과]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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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순오(舜五). 호 보재(溥齋).본관은 경주(慶州). 충북 진천(鎭川) 출생. 일찍이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 ·러시아어 ·법률 등을 공부하면서도 189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요직을 거쳐 1904년 보안회(保安會)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이 되었고, 1905년 법부협판(法部協辦) ·의정부참찬(參贊-正二品)을 지냈다.

 

그 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 등과 협의, 조약의 무효를 상소하고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1906년 이동녕(李東寧)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노우키에프스크[煙秋]로 이주, 원동임야회사(遠東林野會社)를 세우고, 간도(間島) 룽징춘[龍井村]으로 가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 교포자녀의 교육과 항일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참석,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여 전세계에 알리려 하였으나 일본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하였다.

 

이 때 이준이 단식으로 자결을 단행, 세계를 놀라게 하였는데, 본국에서는 일본의 압력으로 궐석재판(闕席裁判)이 진행되고 이상설에게는 사형이,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래서 귀국을 단념하고 영국 ·미국을 거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유인석(柳麟錫) 등과 성명회(聲鳴會)를 조직,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각국에 발송하는 등 세계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관헌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이듬해 석방되어 이동녕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권업보(勸業報)》 《해조신문(海潮新聞)》 등을 발행,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