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사미정 이구(四美亭 李龜)

야촌(1) 2017. 8. 21. 23:48

■ 사미정 이구(四美亭 李龜)

    [생졸년] 1469(예종 1)∼1526(중종 21).

 

글쓴이 : 홍천/정연재

 

조선 중종시대 동부승지, 충주·홍주·상주목사를 거쳐 후에 장예원 판결사까지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강원도 홍천으로 내려와 은둔하다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이 구(李龜·1469~1526)는 자는 자장(子長),호는 사미정(四美亭). 고려 문충공 이익제(李益齊)의 7대손이며, 창평현령을 지낸 이공린(李公麟)의 아들 8형제중 둘째로 1469(乙丑)년 서울에서 출생. 본관은 경주이다.

 

형제 무오사화 연루… 결운리 은둔 결심
홍천강 언덕 사미정 건립 후배교육 매진


사미정은 23세 되던 1492년(성종 조)에 생원시와 문과에 급재, 승문정자(承文正字)로 관직을 시작하여 예빈시 직장(禮賓寺直長), 예조좌랑(禮曺佐郞), 장악정(掌樂正)을 거쳐 1494(甲寅)년 고성현감으로 부임한 이후 면천군수를 지내던 중 아우 재사당 원(再恩堂 黿)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돼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죄를 가자하여 사형되자 사미정도 이와 관련 관직을 삭탈당하고 홍천 땅으로 유배된다.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의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인이 된 조의제문(弔義帝文)사건에 사미정공의 동생 원이 연루되었던 것이다.'조의제문'이란 성종 때 학자인 김종직(金宗直)이 항우(項羽)가 초회왕(楚回王)을 죽인 중국의 고사에 비유하여 세조의 앙위 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뒤에 김종직의 문하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 있을 때 이 글을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

 

후에 연산군 때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극돈(李克墩)이 이글을 사초에서 발견하였는데 훈구파(勳舊派)인 그는 사림파(士林派)인 김종직·김일손과는 사이가 좋지 않던 터라 이를 기화로 사림파를 몰아낼 목적으로 이 글이 단종을 조상(弔喪)하는 동시에 세조를 헐뜯은 것이라고 연산군을 충동질하여 사화를 일으켰는데 연산군 4년(戊午年)에 일어났다 해서 무오사화로 불리고 있다.


공의 아우 원(再恩堂)은 사림파 학자로 무오사화의 직격탄을 피할 수 없었다.
공은 그 후 1506(丙寅)년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회복되어 호조정랑(戶曺正郞)에 제수되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정언(正言), 교리(校理), 수찬(修撰), 응교(應敎), 승정원동부승지(丞政院同副丞旨) 등 내직을 거쳐 중주, 홍주, 상주목사로 외직을 거치는 동안 민사를 잘 다스린다는 중종의 찬사를 받아(중종실록 제25권 참조)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제수 받았다.

 

사육신 박팽년의 외손으로 부모 생전에 8형제 중 둘째인 사미정공과 일곱째인 선, 여덟째 곤만 남고 30대 청장년 5형제가 바른말을 간하다가 사화에 연루돼 사약을 받거나 형의 고통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특히 다섯 번째인 별(鼈)은 평산 땅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당호를 자라(8명의 형제를 자라에 비유하여 '팔별(八鼈)이라했음)가 머리, 다리, 꼬리 등 여섯을 감추었다는 뜻으로 장육당(藏六堂)이라 하고, 세상을 풍자하는 노래 6곡(李 鼈의 六歌)을 지어 세상 사람들을 계도하니 후에 도산 이퇴계가 이를 개작하여 전6곡, 후6곡을 만들어 '도산12곡'을 남기게 되었다.

 

어려운 세태에 강직하게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또는 형의 후유증으로 8형제 모두가 과거에 급제하고도 5형제를 잃은 애통한 마음으로 장예원 판결사를 사임하고 10여년간 유배시절 정이 들었던 홍천으로 돌아와 은거하기로 작정하니 "은거를 결심하였다"하여 '결은(決隱)'이라 하였다현재 홍천읍 결운리(決雲里)의 유래가 되고 있다.

 

공은 은거를 시작하면서 양신(良辰: 좋은 때), 미경(美景:아름다운 경치), 상심(賞心:완성하는 마음), 락사(樂事:즐거운 일)이라는 뜻으로 '사미정(四美亭)'을 자신의 호로 삼고 정자를 홍천강 언덕(지금의 갈마곡1리)에 짓고 후배교육을 시작했다.

 

홍천 사람들은 흔히들 '새미정'이라고 부르는데 '사미정'을 잘못 알고 부른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26년 11월 13일 58세를 일기로 결은리에서 서거했다.
그가 은거하기를 결심한 이 마을을 400여년이나 결은리로 불러오다가 일제가 국토측량을 하면서 결


"민사 다스리는 행정의 달인"

이구가 처음 밟은 홍천 땅은 유배지였다.
그의 동생 이원(李黿)이 무오사화에 연루되면서 사형을 당했고, 이구(李龜)는 죄인의 형이라는 이유로 귀양을 온 것이다.

 

그러나 인생 말년의 이구에게, 홍천은 은둔과 휴식의 땅이었다.
그는 장예원판결사(노비 송사에 관한 판결 책임관)라는 큰 벼슬을 버리고, 유배지였던 홍천을 다시 찾는다. 

비극적인 가족사와, 조정 안팎의 권력 투쟁에 대한 염증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홍천은 그의 운명을 단적으로 설명하기에 충분한 고장이고, 홍천 주민에게 이구는 특별한 존재로 남아있다.

그를 포함한 여덟 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총명하고 강직했다. 

그러나 그 강직함이, 결과적으로 비극을 부르는 단초가 됐다.

 

고려 문충공 이 익제의 후손인 이들 형제 중 둘째인 사미정공 이구와 일곱째인 선, 여덟째인 곤만 남고, 30대의 다섯 형제는 바른 말을 간하다가 사화에 연루돼 사약을 받거나 형벌의 고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중 다섯째인 별(鼈)은 경주 이씨 팔별자손 후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평산 땅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당호를 '자라가 머리, 다리, 꼬리 등 여섯을 감추었다'는 뜻으로 장육당(藏六堂)이라 했다. 8명의 형제를 자라에 비유하여 '팔별'(八鼈)이라 명했다. 또한 별은 도산 이퇴계가 지은 '도산12곡'의 기본 구조를 제공하기도 했다. 평산에 은거하던 그는 세상을 풍자하는 노래 6곡을 지어 세상 사람들을 계도했으며, 후에 퇴계가 이를 개작, '도산12곡'을 남기게 된 것이다.

 

동생인 원이 사화에 연루되기 전까지, 이구는 승승장구하던 젊은 관료였다.
23세에 생원시 문과에 급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로 관직을 시작했다. 

 

예빈사 직장(禮賓士直長), 예조 좌랑(禮曺佐郞), 장악정(掌樂正) 등 요직을 거쳐 1494(甲寅)년 고성현감으로 부임한 이후 면천군수까지 지냈다.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회복된 뒤에도 출세행진은 계속됐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정언(正言), 교리(校理), 수찬(修撰), 응교(應敎), 승정원동부승지(丞政院同副丞旨) 등 내직과 중주, 홍주, 상주목사로 외직을 거쳤다. 여러 관직을 맡으면서 그는 민사를 잘 다스린다는 중종의 찬사를 받아(중종실록 제25권 참조)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제수 받았다. 당시로선 '행정의 달인'으로 앞날이 창창했던 그였지만 계속되는 형제들의 비극은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접게 했다.

 

지금도 홍천에는 이구에 대한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갈마 곡 1리, 홍천강 언덕에 '사미정'이란 정자를 짓고 후배들을 교육한 그를 기려 지금껏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새미정'이라 부르고 있다. 은둔을 결심했다는 뜻의 결은(決隱)은 지금까지 결운리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만약 당시 사화라는 시대적 변수가 없었다면, 총명했던 조선관료 이구와 그의 강직했던 형제들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끝>

 

 

 

 

↑사미정 이구 선생 묘/소재비 :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결은리(決隱里)

 

↑사미정 이구 선생 묘의 옜 표석입니다. 후손들이 묘역을 정비하면서 선조들이 세운 구 표석은 이전하고

    새로운 묘비를 건립해서 새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옛 표석을 그 자리에 두고 곁에 새로 건립한 비를 세

   우면 더욱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74년 8월 15일 복원한 사미정(四美亭)/소재지 :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결운리(갈마곡 1리)

     270-14번지

 

 

↑2016년 가을에 후손들이 옛 정자를 흘어내고 정면 2컨,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재 건축한 사미

    정 정자 입니다.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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