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보림(李寶林),

야촌(1) 2017. 10. 22. 00:03

■ 제용재(濟用財) 

 

고려 이보림(李寶林,1337년(추정) ~1385년(우왕 11)이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있을 때의 일이다. 

새로 제용재(濟用財)를 설치해서 여러 가지 비용을 지급하여 함부로 백성들로부터 비용을징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이색(李穡))이 후세에 오래 전하고자 그에 대한 기문을 썼다.

 

“매양 사자(使者)가 부세(賦稅)를 독촉하는 것이 급해 고을에서 미처 마련하지 못하면 빌려다가 충당을 하니, 백성들은 더러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이보림은 이를 우려하였는데, 마침 포탈한 세를 징수해서 포(布) 약간을 얻고, 또 노비의 송사를 판결해서 포 약간을 얻어 도합 650필이 되었다. 

 

또 전에 둔전(屯田)이 있어 아전들의 농간에 맡겨져 있었는데 그가 몸소 그 둔전을 관리하니, 백성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여 도합 쌀 200석과 콩 150석을 얻었다. 이에 72석을 거둘 만한 신간전(新墾田)을 비축하는데 바치도록 하고 제반 집기, 도구까지 완전히 마련한 다음 아울러 이름 하기를 ‘제용재(濟用財)’라 하였다. 

 

이리 하여 백성들이 함부로 재물을 수탈 당하는 괴로움이 없어졌다.” [각주][주01]제용재(濟用財) : 부족한 경비에 보태어 쓰기 위하여 마련해 두는 재물로서 이것은 고려 말 문숙공(文肅公) 이보림(李寶林)이 최초로 ‘제용재(濟用財)’라는 기금을 마련하고 그 이자로 속현에빌려 주어 세금을 채우도록 하는 지방의 재정제도였다. 

 

곧 오늘날의 지방자치단체 재정기구이다. 

 

[주01] 둔전(屯田) :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이나 관청의 경비에 쓰기 위하여 경작하는 논, 밭. 

[주02] 신간전(新墾田) : 새로 개간한 경작지인 논. 밭. 자료 : 『목은집(牧隱集), 권1 - 남원부신치제용대기(南原

            府新置濟用財記)』. 『목민심서 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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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보림(李寶林),

    [생졸년] 1337년(추정) ~1385년(우왕 11)

    [가계] 익재 이제현의 장손(長孫). 종부시 부령(宗簿寺副令)/贈 門下侍郞) 서종(瑞種)의 장자(長子)

    [거주지] 개경(開京)

    [봉호] 계림군(鷄林君)

    [시호] 문숙(文肅)

   [경력] 우사간(右司諫), 남원부사(南原府使), 판안동부사(判安東府事), 경산부사(京山府使), 정당문학(政堂文

               學)

    [고려문과] 공민왕(恭愍王) 4년(1355) 을미(乙未) 을미방(乙未榜) 丙科2위(12위/3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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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문하시중을 지낸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장손(長孫), 종부시 부령(宗簿寺副令-正四品)/贈 門下侍郞-正二品)공 서종(瑞種)의 장자(長子)이고. 어머니는 밀직사(密直使) 유(侑)의 딸로 정부인(貞夫人) 풍산홍씨(豊山洪氏)이다.

 

공은 안보(安輔)의 문생으로 안을기(安乙起), 정습인(鄭習仁), 염국보(廉國寶), 이인(李韌), 이원령(李元齡), 우현보(禹玄寶) 등과 함께 동문수학(同門修學) 하고 문학에 능하였다. 스승 안보(安輔)는 그를 평생 아들 같이 귀히 여겼다 한다,

 

문과는 안을기(安乙起), 이원령(李元齡>훗날 李集으로 개명), 한방신(韓方信) 정습인(鄭習仁)·우현보(禹玄寶) 등과 함께 공민왕(恭愍王) 4년(1355) 을미방(乙未榜)에 급제하였다. 또한 공은 성품이 엄격하고 품행이 방정 하였으며 정사(政事)에 재능이 있어. 특히 고을의 옥사(獄事)를 잘 처리했다.

 

1357년(공민왕 6) 우사간(右司諫-正六品)으로 있을 때, 염철별감(鹽鐵別監)을 각 도에 나누어 파견하였는데, 좌간의(左諫議) 이색(李穡), 기거사인(起居舍人) 전녹생(田祿生), 좌사간(左司諫) 정추(鄭樞) 등이 글을 올려 염철별감의 파견은 폐단이 있어 불가하다 상소하였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359년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어서는 새로운 제도로 제용재(濟用財)를 설치해 공공 비용으로 충당하고 백성들로부터 함부로 수탈하지 않았다. 또한, 경산부사(京山府使 : 지금의 星州)로 옮겨서는 어려운 송사를 잘 처리하여 평판이 좋았다.

 

1363년(공민왕 12)에는 숙부인 밀직공(密直公) 창로(彰路)와 함께 익재의 시문을 모은 《익재난고(益齋亂藁)/원고가 많이 흩어져 모두 거둘 수가 없으므로 난고(亂藁)라고 이름 붙임》와 문학론을 담은 《역옹패설櫟翁稗說)》를 모아 편집하고 이색(李穡)의 서(序)를 받아 역옹패설 4권 1책과 익재난고 10권 4책을 조부(祖父) 생전에 처음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초간본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같은 해 안렴사(按廉使-오늘날의 광역시장 및 도지사 급의 임시파견 지방관)로 있을 적에 는 순군제조(巡軍提調)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의 행궁에 머무르던 왕을 시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우정승 홍언박(洪彦博) 등을 살해하자 그를 국문하여 밀성군(密城郡)에 유배시켰다.

 

1375년(우왕 1) 판안동부사(判安東府事-正三品)로 있을 때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치적이 최상이라 하여 그해 5월 대사헌(大司憲-從二品)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따라 중서성에 바치는 글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논핵하고 평민으로 폐하여 길안현(吉安縣)에 귀양 보냈다하여 한때 이인임에 아부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正三品)가 되었으며, 제주에서 바친 고력(羖䍽 : 일종의 빈묵양(牝黑羊-흑염소)을 여러 주에 나누어 기르게 하였는데 죽는 것이 많아지자 백성들에게 그 값을 물리므로 권중화(權仲和,1322~1408/權漢功의 庶子로 정승에 이름)와 함께 부당성을 지적하여 정지시켰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中書門下省의 從二品)에 올랐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또한 선생은 포은 정몽주와 벗이기도 하지만 삼종(三從/8촌) 처남 매부(妹夫)지간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高麗列朝登科錄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史綱目. ◇牧民心書(56-2)◇慶州李氏戊辰譜(1748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집필>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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