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한국의전통문화

망주석(望柱石)의 의미와 풍수

야촌(1) 2018. 12. 23. 14:22

↑송강 정철 묘

 

망주석(望柱石)의 의미와 풍수

 

무덤 앞의 양쪽에 세워진 망주석(望柱石)은 망두석(望頭石), 망주석표(望柱石表), 석망주(石望主), 석주(石柱), 망주(望柱), 그리고 화표주(華表柱), 라는 다양한 명칭들을 갖고 있다. 이 같은 다양한 명칭과 같이 망주석(望柱石)은 우리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여러분의 선대 묘소에서도 몇 개쯤은 찾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왜 망주석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려진 내용이 없다는데 있다.
기껏해야 무덤 밖으로 외출했던 혼령이 자기 무덤을 찾아 올적에 식별하라고 세워 놓은 것이 망주(望柱) 문패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것이 과연 옳은 말일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 뿐이다.

 

더불어 무덤은 죽은 자의 집이기에 음택(陰宅)이고, 이러한 음(陰)에는 양(陽)이 있어야 음양(陰陽)조화를 이루기에 양물(陽物)과도 같은 솟대기둥을 세운 것이 망주석(望柱石)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 역시 반풍수의 입심일 뿐이다.


원래 전죽석(錢竹石)으로 부르다가 세종이후 소전대와 죽석이라는 왕릉의 석물들과 혼용을 피하기 위해 망주석으로 개명 되었기에 망(望)자의 문패적 해석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망주석이 양물(陽物)이라는 설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반풍수적인 토막상식에 불과하며,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우리역시 망주석의 의미를 모르고서 오늘날 너도나도 망주석을 산소에 세웠다면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권위 있는 조선 왕릉에 세워놓은 망주석이기에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막연한 기대감에서 세운 망주석이 정작 반풍수 집안 망친다는 블랙 코메디 무대가 된 산소도 많이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일례가 경기도 용인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산소에다가 최근에 세워놓은 망주석이다


조선시대에는 당상관 이상의 높은 품계의 산소에만 세울 수 있었던 망주석은 왕릉 석물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망주석이 이 땅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은 신라 왕릉인 쾌릉과 흥덕왕릉이지만 기능적 의미가 실종된 오늘날 망주석의 정체를 풀어보려면 조선 왕릉이 가장 적절한 현장이라고 생각이 된다.

 

문화재로서 오늘날까지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보존이 된 것이 조선 왕릉이기 때문이다. 수차례에 걸쳐 왕릉 답사를 해본 결과 조선 왕릉은 다음과 같은 일관된 원리와 통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왕릉 능원의 조성물들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풍수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 그러면 이제는 풍수 열쇠로 망주석이라는 풍수 자물통을 열어 보기로 하자. 능원 위에 조성된 석물들은 대칭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문인석(文人石), 석마(石馬), 그리고 망주석은 각각 한 쌍씩 제 짝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헌데 망주석 만은 곡장(曲牆: 능침을 감싸고있는담)안에 자리하고 있음이다.

 

왜 망주석은 곡장 안쪽에 각각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 능침(왕릉무덤)과 곡장 그리고 망주석은 풍수적으로 어떠한 연관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풍수용어에 있어 음택(陰宅)이란 죽은이의 집, 즉 무덤을 뜻한다. 이에 반하여 살아있는 사람의집을 양택(陽宅)이라 하는데, 이러한 음택과 양택 풍수원리가 서로 같은 맥락 선상에 있다.

 

양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안방이며, 안방의 주요기능은 수면을 취한다는 의미로써 이러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자리는 이부자리가 된다. 왕릉에 있어 이러한 이부자리는 침구(寢具)라는 용어에서도 눈치 챌 수 있듯이 능침이 된다.

 

왕릉의 이부자리라고 하는 능침을 둘러싸고 있는 곡장은 당연히 안방 벽돌이 된다. 그러니까 곡장 안쪽에 있는 능원구역은 양택풍수에 있어 온돌임을 알 수 가 있는데 음택(陰宅)의 경우에는 이를 혈판(穴板)이라 부르고 있다.

 

이때 왕릉의 경우는 사면이 아닌 삼면만이 곡장을 두르고 있기에 문제가 된다. 마치 엄동설한에 안방 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과 다를 바 없이 터진 그 부분으로 혈판의 생기가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능침 앞을 곡장으로 막을 수는 없다. 이러한 난관의 문제를 풍수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로 망주석임이 드러난다.


이것을 텃자리 풍수인 양기(陽氣)풍수에서 찾아보면 보다 이해하기가 쉽다.

우리나라에 입지한 전통마을의 구조는 산을 등지고 물을 향한다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원리에 매김질 되어 있다.

 

이러한 배산임수(背山臨水) 마을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삼면이 산자락으로 둘러쳐져 있고 한 면은 꼭 터져 있다는 것이다.

(사면이 꽉꽉 막혀버린 마을입지는 있을 수 없다 그곳은 호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터진 그곳으로는 한결 같이 물줄기가 흘러나가는데 그런 곳을 풍수용어로 수구(水口)라고 하는데, 이러한 수구(水口)는 단순히 물줄기가 빠져나간다는 서구적 시각의 배수로(排水路)개념만 일수는 없었다.

 

마치 농경사회에서 소를 단순한 고깃덩어리로만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농사를 짓는데 힘센 원동력이 되는 머슴중의 상머슴인 소를 그래서 생구(生口)라고 불렀듯이 마을 발복(發福)을 걸머지고 있는 그곳을 물줄기만의 수구(水口)라고 불렀음에서 가히 그 중요성이 짐작이 된다.


그리하여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에서도 마을입지 선택에 있어 가장먼저 수구를 살피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수구가 휑하니 빠져나가면 마을의 번영은커녕 폐촌을 초래하게 된다.

 

수량(水量)이 부족하여 농사짓기에도 피해를 당하지만 터진 그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정서 역시 메마르게 되는 것이다.(내지르는 고속도로와 굽이굽이 감도는 산길을 바라보는 정서가 다르듯이)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곳으로 마을 발복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음질 하였는데 이것이 수구막이, 수살(水殺)막이며, 방언으로 수구매기, 수살매기 라하고 매김 질을 하였는데 이러한 수구막이 역할로 돌기둥이나 돌탑 그리고 장승과 벅수를 세웠고 가장 많은 조성물은 단연 마을 앞의 숲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의 서낭당 역시 이러한 수살막이의 맥락과도 통하여 참으로 이채롭다 읽을 때는 서낭당이라고 하지만 쓸 때는 성황(城隍) 이 되는데 이것은 성 외곽을 방어하기 위하여 파 놓은 해자(垓字)라는 뜻의 성지(城地)라는 풀이이기도 하다.

 

이렇듯 양기풍수에서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는 수구막이가 바로 왕릉의 망주석의 기능인 것이다. 즉 양기풍수에서 마을의 지기(地氣)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수구막이이듯 왕릉에서 생기가 곡장 앞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는 역활을 망주석이 하고 있다.


수구막이와 망주석

 

수구지점에 우뚝 서 있는 산봉우리를 풍수용어로 화표(華表)라고 하는데 망주석의 또다른 명칭에도 화표주(華表柱)가 있어 양자간이 같은 맥락임이 더욱 논 중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망주석은 곡장의 터진 부분을 막아주는 수구막이임이 드러났는데 이러한 망주석을 자세히 보면 혹과 같은 조각이 붙어 있다. 이것을 세호(細虎)라고 부른다.


세호는 왕릉 답사시 왕릉 관리소 직원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저것이 무슨 동물인지, 왜 그곳에 붙어 있는지, 어떤 것은 올라가는 형상 이고, 어떤 것은 내려가는 형상인지의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누가 세호의 정체를 알았기나 했겠는가. 그러나 망주석을 풍수로 풀었을 때 세호는 이미 절반이나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앞서 우리는 망주석이 수구막이임을 알았다

 

그래서 화표라는 용어를 풍수에서나 망주에서 쓰고 있는데 이러한 화표보다 더 강력한 수구막이 풍수용어는 한문(寒門 : 막는문이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寒門은 다음과 같은 동물형상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정의되어 있기도 하다 거북이와 뱀과, 사자와, 코끼리의 모양새를 합한 봉우리라고 하였다. (귀(龜), 사(蛇), 사(獅), 상(象),


조선 왕릉의 세호를 살펴보면 중종 이전까지는 세호의 형상은 그저 뭉툭한 모양새 였는데 중종이후 조선후기로 올수록 세호의 모양새는 회귀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무슨 동물인지, 하지만 한문설명에 나오는 거북이, 뱀, 사자, 코끼리를 합성해 보면 꼬리는 뱀, 몸통은 코끼리, 머리는 사자, 다리는 거북이로 망주석의 세호임이 상상되어진다.

 

이러한 세호에 운동성이 부여 됐던 것은 갑자사화(1504년)직후 연산군에 의하여 추숭되었던 폐비 윤씨 묘가 된다.(현재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 비공개지역에 이장되어 있음) 그런데 이러한 세호의 상행(上行), 하행(下行),의 운동성을 관찰해 보면 조선왕조의 역사 하나가 새롭게 드러난다. 아직까지 학계조차 횡설수설하고 있는 조종조(祖宗祖)의 정의가 말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설과도 같이 조선 왕들은 승하 후 묘호(廟號)를 남기고, 그리고 망주석에 세호를 남겼던 것이다. 그러니까 묘호와 세호는 같은 방정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것이 왕릉 답사과정에서 밝혀낸 가장 큰 수확중의 하나였다.


먼저 문화재 관리국에서 공문서로 각 왕릉 관리사무소에 내린 조종조(祖宗祖)의 유권해석은 이러하다.
재위 시 업적과 치세에 공이 있는 임금이 승하 시 내린 묘호에는 조(祖)가 붙고, 단지 덕망만 있는 왕에게는 종(宗)이 붙는다는 실록의 해석을 그대로 내렸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초등학생에게 물어보아도 제4대 세종과 제23대 순조의 경우 치세와 업적이 누가 더 많은 왕이라는 답을 하겠는가. 더욱이 제16대 인조는 삼전도 치욕에서 욕까지 당한 인물인데 업적을 남겼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역사적 기록에서만 과거의 역사를 인정하려 할 때, 곡필과 어용의 기록을 만날 경우 정 반대의 해석이 되어 버린다. 최근의 일예로 5공화국 당시 삼청교육대를 그 당시 신문들은 사회정화적 차원이라며 미화된 보도를 하였다.

 

그런데 삼청교육대의 실상은 인권박해라는 아우슈비츠의 악명을 띠고 있었다. 그 당시 신문의 기록만을 인정 한다면(실록적해석) 삼청교육대는 사회적으로 긍정적 평가만을 내릴 수밖에 없는 오류에 빠져 버린다. 풍수의 현장인 조선 왕릉의 망주석 세호(勢呼)에서 찾은 조종조의 결론은 이러했다.

 

먼저 조종조(祖宗祖)는 조종(祖宗)이라는 뼈대의 개념과 종조(宗祖)라는 혈통의 개념으로 정리 된다. 이와같은 조종의 뼈대에는 창업지군(創業之君)을 태조(太祖)라 하고 수성지군(守成之君)을 태종(太宗)이라 하는데 세조(世祖)의 경우는 왕통의 뼈대를 다시세운 창업에 속한 조(祖)가 붙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조 이후 왕들의 묘호는 종조(宗祖)라는 혈통이 내려오는데 숙종 때 부터는 망주석 세호 에다 이를 새겼던 사실마저 드러났다. 조선왕조 27대 왕의 부계는 당연히 왕의 혈통이지만 모계는 그렇지가 않았다.

 

중전의 혈통과 후궁의 혈통으로 그 품계가 나뉘어 졌다. 일례로 제19대 숙종에게는 중전(장희빈)에게 태어난 아들이 있었고, 후궁인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도 있었다. 후일 두 아들 모두 왕위에 올랐는데 중전을 모계로 한 아들이제20대 경종이며, 후궁의 모계인 제21대 왕이 영조 였다.

 

즉, 중전혈통을 모계로 한 왕에게는 종(宗)을, 후궁 혈통인 왕에게는 조(祖)를 붙였던 것이다. 성종(정희왕후 혈통), 중종(정현왕후 혈통), 인종(장경왕후 혈통), 명종(문정왕후 혈통), 효종(인렬왕후 혈통), 현종(인선왕후 혈통), 숙종(명성왕후 혈통),에서 보듯 종은 모두 중전 혈통을 모계로 삼고 있는 반면, 선조(창빈안씨 혈통), 인조(인빈김씨 혈통), 영조(숙빈최씨 혈통), 정조(영빈이씨 혈통), 순조(수빈박씨 혈통),모두 후궁 모계의 혈통이며 이에는 조가 붙여 있다.(철종과 고종 역시 조로 변경 되어야 하나 조선왕조는 망국이 되어 전례처럼 바로잡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종조 혈통에 세호가 그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음택풍수에 있어 좌우(左右) 방위는 혈 자리에 누워있는 고인을 기준으로 측정을 하는데 고인의 왼쪽 팔은 좌(左),오른쪽은 우(右)가 된다. 이런 고로 우측은 남자의 자리이며, 좌측은 여자의 자리로서 남녀 쌍분 묘를 쓸 때 일반적인 관례 역시 이에 따른다.

 

숙종이후 영조, 정조, 순조의 왕릉 즉, 모계가 후궁인 혈통들의 좌측 망주석 세호가 내려가고(下行)있다. 중전이 아닌 후궁이니 여자자리를 격하(格下)시킨 것이다. 이에 견주어 숙종, 경종, 현종의 망주석 세호의 운동은 정 반대를 하고 있다. 이때의 해석은 풍수음양 원리가 적용 된다. 좌측은 양(陽)이며, 우측은 음(陰)이다.

 

종(宗)들의 세호는 좌측이 상행(上行)하고, 우측은 하행(下行)하고 있다. 즉, 양기(陽氣)는 세우고, 음기(陰氣)는 누른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초래시켰던 장본인은 다름 아닌 장희빈 이었다. 오죽 했으면 숙종은 어명까지 내렸겠는가. 다시는 빈이 중전에 오를 수 없도록 말이다.

 

만약 장희빈 이라는 음기(陰氣)가 되살아난다면 이는 무얼 뜻 하겠는가 연산군시절 폐비윤씨 기세를 탓 던 갑자사화의 피비린내가 다시 한 번 산천초목을 휩쓸 것을 염려해서였다.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하니 왕릉은 음기발복(陰氣發福)을 아예 눌러 놓았다. 이러한 세호의 운동성은 오늘날 아직까지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기에 블랙코메디 같은 일들이 과시욕에서 곧잘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은 조선시대처럼 신분사회가 아니기에 효도의 생각에서 망주석을 세워도 무방하긴 하지만, 과시욕이 지나쳐 세호까지 붙혀 놓았을 때 문제가 발생하는데 근래에는 이런 깊은 뜻을 모르니 남이 한다고 따라하고 망주를 세우면 그저 효를 다하는 것인 냥 너도 나도 하고 있으며, 석재상(石材商) 에서도 세호 문양은 아니지만 세호처럼 마치 다람쥐와 비슷한 것을 세호로 조각하여 팔기도 한다.

 

근래의 풍수지관 들도 이러한 망주를 세우면서 세호 운동성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자기 멋대로 세우는데 잘못임에는 틀림없다. 무슨 일을 하던지 그 의미를 잘 알고 행하면 실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 만약에 세호를 우측이 올라가게 해 놓았다면 우리집안은 첩의 자손입니다 라는 욕이 되어버린 격이며, 음기를 올리고 양기를 내리는 웃지 못 할 내용이 된다.


이번에는 반풍수가 나라를 망치고 있는 무덤풍수 현장을 짚어보면 경기도 용인에 있는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의 묘소는 서북쪽 송도(개성)를 바라보고 있다. "임 향한 일편단심" 으로 고려의 도성을 바라보고 있는 정포은 선생에게 조선왕 중종은 문충공(文忠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유림들은 고려 충신의 "일편단심"에 누가 될까봐 그것이 비록 어명 일지라도 이를 새겨놓지 않았다. 오로지 비석앞면에는 "고려수문하시중 정몽주(高麗守門下侍中 鄭夢周)"라고 당당히 고려벼슬만을 새겨 놓았을 뿐이다. 한데 최근에 어떤 반풍수가 어떻게 설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식하면 용감해진다고 했던가.


제19대 숙종 혈통의 세호 문양(정확하게1701년 인현왕후 승하 시 부터 나타난 문양)을 보란 듯이 새겨놓는 망발을 저질러 놓았다. 고려충신인 정몽주 선생이 조선왕 숙종의 혈통을 받은 문중이다. 라는 해석쯤 된다면 망발치고는 과히 국보급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좌측 세호는 올라가고 우측세호는 내려가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여러분의 선대묘소(先代墓所)의 망주석 세호의 운동성은 어떻습니까? 가령 좌우 양편 세호 모두가 상행(上行)하고 있을 적에는 무방하다(이점도 정포은의 산소에는 통용되지 않겠지만),

 

아울러 현대건축물 출입구에 망주석 상징물과 비슷한 디자인 처리를 할 때 좌우모두 상행(上行) 문양이 정답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출입구 음양의 기운을 모두 살린다는 풍수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건축물에서 출입구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풍수에서는 더더욱 중요시 된다.

 

입춘대길 이라는 입춘방에서 보듯 만복이 들어오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開門萬福來, 掃門萬福來) 이러한 출입구가 텃자리 풍수에서는 수구가 되기 때문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원리에 의하여 입지한 우리전통마을과 명산대찰, 절집(사찰)은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꼭꼭 마을과 절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물줄기를 거슬러 올러 오르다보면 동구 숲이나 돌무지 혹은 장승, 벅수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그런 것들이 수구막이이며 수살막이인 것이다. 인하여 이중환 선생(擇里志)역시 텃자리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구(만복이 굴러들어오는 출입구격)라고 지적 하였는데 이러한 수구지점이 현대건축물에도 존재 한다. 단지 서구적 시각에서 수구를 보는 안목이 가려져 있기에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현대의 건축물들은 출입구, 내실, 주방, 화장실, 거실, 등 구조들이 가주의 사주에는 아랑곳없이 건축 설계 사 들이 그려 주는 대로 지어진 구조들인데, 집(家屋)이란 의식주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터전인데, 아무렇게 지어서 되겠는가.

 

음택은 후세를 논 하지만 양택은 당대(當代)를 논하는 것이니만큼 양택을 더욱 신중히 설계하고 좌향을 잘 헤아려야 하겠다. 근래에는 남이 지어놓은 집에 내가 들어가 사는 실정이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남이 지어놓은 집에 내가 들어가더라도 그 집이 나의 사주와 오행이 맞는지 잘 알아보고 매입하여 들어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음택(음택)에도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들어가시는 망명인의 사주로 좌향을 맞추는 것인데도 어떤 이들은 자손의 사주를 본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 풍수사도 있는데 물론 좌청룡 우백호로 음양의 남녀와 전후좌우 상하를 구분하는 오행 법들이 있어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학문이므로 섣불리 다가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욱이 풍수와 지관을 같은 학문으로 알고 있지만 잘못 생각하고 있는 상식이다.


풍수를 하면 지관도 하고 지관을 하면 풍수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엄연히 다른 학문이란 것을 지적하고 싶다.
풍수라는 것은 지기, 지세, 를 살피고 수맥이 없는지 물 빠짐이 잘 되는 땅인지 살풍(殺風)이 닿지 않는지 등을 살펴서 가부를 결정하고 명당이다,

 

좋은 자리다, 하고 자리를 가리는 사람이 풍수이고, 글자 그대로 풍수(風水)이며, 지관은 지사(地師)라고도 하는데 철학과 역학을 겸비한 많은 지식을 가지지 않고는 왈가왈부 할 수가 없는 학문이다.

 

땅의 원리 혈처의 높낮이 혈(穴)의 흐름을 잘 살필 줄 알아야하고 토색감별로 혈(穴) 자리를 결정하고 주작현무(朱雀玄武)를 잘보고 좌향을 망명인과 합이 되도록 하며, 황천살, 팔요수,를 피하고(이것을 천살, 요살, 이라고 한다)자손들에게도 해가 없도록 잘 맞추어 주는 사람이 지관 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풍수가 지관이고 지관이 풍수인줄 알고 있지만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명당이라는 것은 좋은 자리일 뿐 모두에게 명당은 아니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아무튼 망주석을 논하는 대목에서 풍수 지관을 운운 하기란 경망하다 할지 모르지만 망주는 풍수지관과 연관이 되고 풍수지관이 잘못 판단을 하면 남의 가문에 먹칠을 하기 때문에 잠깐 논한 것뿐이다.

 

아무튼 산소에 석물을 세울 때는 석물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고 세워야 하겠다. 산소에는 근래에는 무덤을 둘러싸는 둘레 석, 을 비롯해서, 상석, 걸방석, 혼유석, 월석, 병풍석, 국석, 향로석, 문인석, 동자석, 사자 상, 석등, 비석, 표석, 등등 많은 석물들이 있는데 이런 석물들의 의미와 뜻을 잘 알고 설치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면서 과문천식한 식견으로 옳다

 

그르다 왈가왈부 한 것을 너그러이 관용을 바라며 결론은 모든 것은 신중하게 살피고잘 생각해서 매사를 행해야 하고 진행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아무튼 망주석은 아무나 아무렇게나 세워서는 안되는 석물이라는 것을 강조 한다.


출처:창원전문대학 장례복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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