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망주석
■ 망주석(望柱石)
[정의]
무덤 앞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개설]
망주석(望柱石)은 멀리서 보아도 무덤의 위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표석(標石)이다.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괘릉(掛陵)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봉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웠다. 고려 태조의 현릉(顯陵)에서부터 망주석은 봉분 앞에 설치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도 전통이 이어졌다.
망주석은 시간이 갈수록 무덤을 상징하는 석물로 인식되어 사대부들의 묘에도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원래 묘의 석물들은 신분에 따른 규정이 있었는데 망주석은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높은 품계의 사대부 묘에만 세울 수 있었다. 17세기에는 서민들도 망주석을 설치하자 1637년(인조 15)에는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연원]
망주석은 중국의 화표주(華表柱)에서 시작된 것으로 요순(堯舜)시대에 백성의 의견을 듣기 위해 길에 설치한 방목(謗木)에서 유래하였다. 한대(漢代)에는 큰 길 입구나 사거리에 길이가 10자, 즉 3미터 정도 되는 기둥을 설치하여 환표(桓表)라고 하였는데 이후 궁궐, 능묘 등에 표석으로 설치하였다.
당나라의 요사렴(姚思廉)이 636년에 편찬한 『진서(陳書)』 「예의(禮儀)」에는 507년에 묘제를 개편하면서 사람 형상의 입석상인 석인(石人), 짐승 형상의 석조물인 석수(石獸), 돌 비석인 석비(石碑)의 건립을 금하고 돌기둥인 석주(石柱)만 세워 그 위에 이름과 지위를 적을 것을 허가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 망주석의 기능을 알 수 있다. 현재 남경 남조(南朝)의 황제릉에는 능묘 앞 신도(神道) 양쪽에 제액(題額)에다 명(銘)을 새긴 화표주가 남아 있다.
[변천 및 특징]
(1) 조선시대 이전
우리나라 왕릉 중 최초로 망주석이 설치된 곳은 통일신라 왕릉인 괘릉이다. 당(唐)나라는 황제, 태자, 공주, 고관의 묘를 세우는 능원제도(陵園制度)를 만들었는데 신분에 따라 석물에 차이를 두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괘릉의 석물 배치는 당나라의 의덕태자(懿德太子)와 영태공주(永泰公主) 능과 일치하며 망주석도 봉분과 떨어진 곳에 화표주의 기능으로 설치되었다.
고려초기부터 무신집권기까지 왕릉의 석물 구성은 태조 현릉의 전통을 따랐는데, 현릉에서 망주석은 봉분 앞으로 위치를 옮겨 설치되었다. 고려말 공민왕(恭愍王)은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먼저 죽자 왕비의 능을 조성하면서 왕이 직접 공사를 감독하였으며 이후 합장되었다.
공민왕릉묘는 고려 왕릉의 전례를 깬 쌍릉으로 명나라의 묘제를 새롭게 받아들였으며 뛰어난 미감과 정교한 석물들을 설치하여 조선시대의 왕릉 조성의 모범이 되었다. 공민왕릉의 모든 석물은 왕과 왕비의 것을 각각 분리하여 2기씩 설치하였는데 망주석만 1쌍을 세웠다.
(2) 조선시대
망주석은 조선전기까지 전죽석(錢竹石)이라고 불리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20년(세종 2)에 정종의 능을 조성하면서 중국 국조예제(國朝禮制)의 묘제(墓制)에는 석망주라는 명칭을 쓰고 있으므로 속칭인 전죽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고쳐 망주석으로 부르게 하였다[『세종실록』 7년 10월 16일].
조선의 망주석은 공민왕릉 망주석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였는데, 이전 망주석이 단순한 8각 기둥인 데 반해 공민왕은 기둥의 몸체에 왕을 상징하는 의장물인 도끼 모양의 보삽(黼霎)을 새겼다. 이 조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고대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인 다람쥐 모양의 세호(細虎) 조각으로 형상화되었다.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세호는 망주석의 주신(柱身) 안쪽 상단에 조각하는데 왕릉 왼쪽의 망주석에는 머리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형상으로, 오른쪽은 땅을 향하여 내려오게 하는 형상으로 조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을 보면 이 기준을 따르고 있는 능은 7기이며 반대로 되어 있는 능이 8기이다. 특히 경종(景宗)과 선의왕후(宣懿王后)의 능이 상하로 조성된 의릉(懿陵)을 보면, 경종의 능은 규정대로 되어 있으나 아래에 있는 선의왕후의 능은 바꿔 조각해놓은 것으로 보아 규정이 철저히 지켜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능원에 설치되는 망주석의 제작 방법, 조각, 길이 등을 명시하고 있다. 망주석의 몸체는 8각형의 기둥과 대석(臺石)으로 구성되며 대석을 상층과 하층으로 나누고 그 중간에 기둥을 끼우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대석 상층 하단에 연꽃이 위로 향한 모습인 앙련(仰蓮), 하층 상단에 연꽃을 엎어놓은 모양인 복련(覆蓮), 받침에는 구름 모양의 다리인 운족(雲足)을 조각하였으며 길이는 대부분 10자 내외로 규정하고 있다.
16세기에는 사대부들의 묘에 망주석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에 들어와 서민들의 묘에도 망주석을 세우는 것이 유행하자 조정에서는 금지령을 공포하였다[『인조실록』 15년 5월 12일].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조선 왕릉제도 연구-정해득』, 신구문화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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