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 문희공 전(松巖 文僖公 傳)
고려 충렬왕(忠烈王) 조정에 이름 있는 신하가 있었으니 곧 이세기(李世基)이다 초명은 기(琪)다
좌복야(左僕射) 열헌(悅憲) 핵(翮)이 아들 三형제를 두었으니 장자 인정(仁挺)은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냈고 차자 진(瑱)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그 다음이 세기(世基)인데 글을 잘하여 진의 자제 제현(齊賢)과 명성을 같이하였다.
벼슬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동지 춘추 관사(同知春秋館事) 검교정승(檢校政丞)이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살펴 보건데 세기가 복야공의 자제로서 충렬왕의 조정을 이러러 대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들어가서 청환(淸宦 : 장래 출세의 길이 터진 좋은 벼슬)과 화관(華貫 : 화려한 벼슬)을 거쳤다. 과거도 이른바 천장(天場 : 왕이 친이 문신을 시험함)에 급제하여 형제가 동시에 석차를 나란 이 하여 좋은 성적이었으므로 왕의 문생(門生 : 貢擧에 의하여 시험에 합격한 사람 왕이 친히 시험을 보였기 때문에[왕의 문생]이라 한 것이다) 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남다른 영광이 보통이 아니어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재상의 자리에 앉아서 문형(文衡 ; 대제학)까지 잡았다 그 재주와 덕이 높은 것을 생각한 다면 여러 자제들과 손자들이 문장으로 생상에 날렸으니 이른바 녹을 찾아서 百가지 복이 자손에게 미친 것인가!
자제 천(蒨)은 호가 국당(菊堂)이고 증손 정보(廷俌)는 우이(이조) 태종이 잠저(潛邸 : 세자가 등극하기 전에 거처하던 진)에 있을 때 벼루를 같이하여 공부하였다 무학(無學 : 중의 이름)의 말로 만리현(萬里峴)에 자리를 잡아서 집을 짓고 살았다.
六대손 정암(廷암) 정형(廷馨) 정험(정혐)이 다 검열(檢閱) : 사헌부의 正九品 벼슬이니 청환으로서 문과한 사람들이 처음에 가는 자리의 하나다 한림이라고도 칭한다)이 되었다 지금에 이르도록 한림동(翰林洞)이라고 이른다. 지은이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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