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익재(益齋)의 문답

야촌(1) 2008. 9. 23. 07:44

익재(益齋)의 문답

 

상왕(上王) - 충선왕(忠宣王)이다. 이 이제현(李齊賢)에게 묻기를, “우리나라가 옛날에는 문물(文物)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일컬어져 왔다.그런데 지금 배우는 자들이 모두 석자(釋子승려(僧侶))를 따라서 장구(章句)를 익히고 있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하므로,이제현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옛날에 태조께서는 나라를 처음 개창하시느라 한가한 틈이 없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먼저 학교를 일으켜서 인재를 길러 내었으며,한 차례 서도(西都)에 행차하시어 수재(秀才)정악(廷鶚)에게 명하여 그를 박사로 삼아서 육부(六部)의 생도들을 가르치도록 하고,이들에게 채백(綵帛)을 내려 권면하고 녹미(祿米)를 반사(頒賜)하여 배양하였으니,그 마음 쓰심이 얼마나 절실하였던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광묘(光廟광종(光宗))이후로는 더욱 문교(文敎)를 닦아서 안으로는 국학을 숭상하고 밖으로는 향교를 세웠습니다.그리하여 마을의 학당과 고을의 학교에서 글 읽고 거문고 뜯는 소리가 서로 이어서 들렸으니,이른바 문물이 중국과 대등하였다는 말이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만 불행하게도 의왕(毅王의종(毅宗))말년에 무인(武人)들이 변란을 일으켜서 글줄이나 하는 자들을 선악(善惡)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는데,그중에 겨우 호구(虎口)를 탈출하여 죽음을 모면한 자는 궁벽한 산속으로 도망가서 관디[冠帶]를 벗어던지고 가사(袈裟)를 걸치고서 여생을 마치고 말았으니,신준(神駿)이나 오생(悟生)과 같은 무리들이 바로 이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 뒤 나라가 차츰 문치(文治)를 회복하게 되자 비록 글을 배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었지만 배울 곳이 없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모두 이와 같은 무리들을 따라서 강습을 받게 되었던 것인바,신은 말씀드리거니와 지금 배우는 자들이 석자(釋子)들을 따라서 배우는 것은 그 연원이 바로 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하께서 이처럼 학교를 확충하고 상서(庠序)의 가르침을 삼가서 이를 통하여 육예(六藝)를 가르치고 오교(五敎)를 밝혀서 저 선왕(先王)의 도리를 드러내 밝히시니,지금에 와서야 누가 참된 선비를 버리고 석자들을 따라서 배우려고 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이제현이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가가 병란(兵亂)을 치른 지 거의20년이 되었다.그동안 선비들이 모두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싸움터에 나갔던 관계로 집에서 책을 끼고 글을 읽은 자는 열에 한둘도 되지 못하였다.그런데 선배로서 나이 많은 선비들이 차츰 모두 세상을 떠나 사라지게 되어 육경(六經)의 경전들이 근근이 전해져 온 것이 마치 간들거리는 실오리와도 같았다고 하겠다.

 

그러다가 대덕(大德원(元)나라 성종(成宗)의 연호)말엽에 와서 문성공(文成公)안유(安裕)가 재상이 된 다음에야 비로소 국학(國學)을 손질하고 학교를 수리한 다음 이성(李晟),추적(秋適),최원충(崔元沖)등을 거용(擧用)하여 경전(經典)하나에 교수 두 사람씩을 배치하게 되었으며,금학(禁學천문(天文)ㆍ역산(曆算)등 잡과(雜科)의 학문),내시(內侍),오군(五軍),삼관(三官), 7품 이하의 관원과 내외의 생원(生員)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따라 듣고 배워서 익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故)낭중(郞中)유함(兪咸)이란 자가 사천(泗川)에 살고 있었는데,그가《사기(史記)》와《한서(漢書)》에 밝다는 말을 듣고는 역마(驛馬)로 불러 서울로 올라오게 한 다음,윤신걸(尹莘傑),김승인(金承印),서인(徐諲),김원식(金元軾),박리(朴理)등을 보내어 강설(講說)을 듣게 하였다.이에 선비와 대부의 무리들이 대개 경전에 통달하고 고금의 역사에 정통한 것을 중시하게 되었다.”

 

주세붕(周世鵬)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公안유)의 그 올바른 지향이 삼한(三韓)의 오염되었던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어 버렸다고 하겠는바,익재(益齋)나 포은(圃隱)과 같은 제공(諸公)들은 모두 그 여파(餘波)가 점차 불어나서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후240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 이 땅에 다시 천리(天理)가 밝아지고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으니,이것이 누구의 힘이라고 하겠는가.공이야말로 참으로 우리 동방(東方)의 도학(道學)의 조종(祖宗)이라고 할 만하다.그런데도 유독 문묘에 종사(從祀)할 수가 없단 말인가.

 

《고려사》에서는 일컫기를, ‘안모(安某)가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문묘에 종사를 하였다.’고 하였으니,그 비루함이 바로 이와 같다.”

 

출전 : 임하필기 1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