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역옹패설] 사람으로 읽는 역사 - 김승룡 교수

야촌(1) 2008. 9. 5. 22:27

『역옹패설』 사람으로 읽는 역사  ― 김승룡교수 부산대 한문학과

 

고려후기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역사가의 눈으로 포착한 당대 공직자의 풍경을 '역옹패설'에 남겨놓았다. 흡사 콩트처럼 제시된 에피소드를 읽다보면 사람들의 표정까지 되살아난다.

 

그가 제시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풍경 하나. 국가대사가 발생하면 정승들은 함께 모여 합의했다.

이것을 '합좌(合坐)'라고 한다.

 

이 자리에 기홍수(奇洪壽)와 차약송(車若松)이 참석했다.

먼저 차약송이 기홍수에게 물었다.

 

'자네 집 공작새는 안녕하신가?' 기홍수가 대답했다.

'그렇네만, 자네 모란 키우는 법이나 좀 알려주게?'

 

풍경 둘. 원부(元傅)가 문생들과 담소하다가 여론이 궁금했다.

그 가물었다.

 

'나는 재주가 없는데도 외람되이 국정의 수반을 맡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던가?'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방우선(方于宣)이 나섰다.

'정치가 선생님의 성씨(둥글 元)와 같다고 하더이다.

 

'원부가 머쓱해져 반문했다.

'나는 둥글게 돌아 제 자리로 돌아왔다만, 너는 네 성씨(모 方) 따라 모가 지면 어디까지 갈는지?'

 

풍경 셋. 정통(鄭通)은 기생 소매 향을 사랑하여 아이 하나까지 낳았다.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가다가 너무도 허전해진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두 달 더 머물고는 소매 향을 말에 태운 채 자신은 애를 업고 걸어서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서울 아내는 먹을 것이 없어 고민 끝에 식솔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이들과 마주쳤다.

식솔 가운데 하나가 아내에게 말했다.

 

'저기 오는 사람이 서방님이 아닌지요?'

'설마, 바람이 들었기로 저럴 리가 있겠느냐?'

 

가까이 보니 남편이었다.

기가 막혀 물었다.

 

'쯧쯧, 당신 꼴이 웬일이오?'

정통이 흠칫 놀라 그대로 선 채 말했다.

 

'한 번 장난을 해본 것이네.' 국정을 논하면서 농담을 일삼는 안일함, 비판이 못마땅해 되받아 치는 옹졸함, 정욕에 빠져 소중한 것을 잃고, 그러고도 모자라 자신의 잘못조차 모르는 어리석음! 당시의 모습으로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정도전(鄭道傳)이 '경제문감'에 정승을 비롯한 관리의 바른 도리를 집중적으로 설파하고 있는 것도, 국정이 어떤 사람을 쓰는가에 달렸음을 말해주는 것일 게다.

 

사람은 역사의 색인이다.

혹시 선택이 어려워 세상을 읽는 지혜를 빌리고 싶다면 사람 찾아 역사를 뒤적이는 것도 유용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