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鄭瓜亭(정과정)

야촌(1) 2008. 9. 21. 04:09

■ 鄭瓜亭(정과정)

 

憶君無日不霑衣 / 억군무일부점의

님 그려 옥지시지 않는 날이 없으니,

 

政似春山蜀子規 / 정사춘사촉자규

바로 봄산의 자규와 비슷하도다.

 

爲是爲非人莫問 / 위시위비인막문

옳거니 그르거니 사람들아 묻지 마오.

 

只應殘月曉星知 / 지응잔월효성지

응당 새벽달과 별이 알 것이로다.

 

 

● 요점 정리

 

[지은이] 이제현

[시간적 배경] 이른 아침, 새벽]

[시형] 소악부(중국의 악부를 볼 때, 우리 나라의 민간 가요에서 제재를 취하여 이제현이 7언절구의 형식으로 지은 한시)

 

[주제] 님을 그리워함

 

 

● 내용 연구

    새벽달과 별이 알 것이로다 : 새벽달과 별을 절대자로 보고 있음,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존재로 파악.

 

 

●이해와 감상

   이 노래는 충신 연주지사로 사람들에게 널리 애송되었으며, 궁중에서도 이를 전악(典樂)으로 보존하여 모두 익히도록 할 정도로 귀히 여긴 고려 가요이다.

 

고려 가요 중 향가의 잔영으로서 대표적인 작품인데, 작자가 유배 상황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향가계(鄕歌系) 여요(麗謠)로 향가계 여요는 신라의 향가에서 고려 가요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과도기적 형식의 노래를 총칭하는 개념이다.

 

고려 때 지어진 노래로 향가적 형식을 띤 '도이장가(悼二將歌), 정서의 '정과정' 등을 말한다.

--------------------------------------------------------------------------------------------------------------------------------------

■ 지은이 인물소개

 

● 이제현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饑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이지만, 아버지 진(山)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가문이 비로소 떨치기 시작했는데, 진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까지 올랐다.

 

[생애]

 

어려서부터 남달리 뛰어나,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왕 27) 15세의 나이에 성균시와 문과 과거에 장원(1등)으로 합격하고, 그해 당시의 대학자이자 세도가였던 권부(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충선왕 3)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재원(在元) 생애가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琅)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재원 생애와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하는 데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320년(충숙왕 7)은 그의 생애를 통해 또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해, 성균좨주(成均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 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그의 재원 생애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로 인한 정세변화는 고려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뒤이어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또한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고(瀋王暠)와 그 일파의 준동이 격화되었다.

 

그는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이배된 데에는 그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과 충혜왕 부자가 중조(重祚)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해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1339년 조적(曹使)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해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했는데, 그 동안 ≪역옹패설 饑翁稗說≫을 저술하였다.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 뒤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활동]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 순의 광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해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그는 학자로서의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들여온 백이정(白蓬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 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저술]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이라 한다. 그는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고,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牧隱藁,

◇李益齋의 在元生涯에 대하여(金庠基, 大東文化硏究 1, 1964),

◇李齊賢(高柄翊, 人物韓國史 Ⅱ, 1965),

◇益齋 李齊賢의 史學에 대하여(金哲埈, 東方學志 8, 1967),

◇整治都監의 設置經緯(閔賢九, 國民大學論文集 11, 1977),

◇益齋 李齊賢의 政治活動(閔賢九, 震檀學報 51, 1981),

◇李齊賢의 歷史意識(鄭求福, 震檀學報 51, 1981),

◇益齋 小樂府와 高麗歌謠(徐首生, 東洋文化硏究 11, 198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소악부

 

고려 후기에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악부시. 당시 유행하던 우리말 노래를 한시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익재난고 益齋亂藁≫ 권4에 수록되어 있다. 모두 칠언절구 11수로 이루어졌다.

 

내용은 11수 가운데에 국문사설이 현재까지 전하여지는 것이 3편이다. 여섯 번째 시 〈처용가〉, 여덟 번째 시 〈정석가〉 혹은 〈서경별곡〉, 아홉 번째 시 〈정과정곡〉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설은 전하지 않으나 제목과 내용이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것이 5편이다. 첫번째 시 〈장암 長巖〉, 두번째 시〈거사련 居士戀〉, 세번째 시 〈제위보 濟危寶〉, 네번째 시 〈사리화 沙里花〉, 일곱번째 시 〈오관산 五冠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출처를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다섯 번째 시가 있다. 옷을 벗어 어깨에 둘러메고 꽃밭에서 나비를 좇던 지난날의 추억을 그리는 내용으로 보나, “이 고을 사람들은 남녀가 봄을 만나 놀기 좋은 시절을 서로 즐기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는 〈양주〉와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열 번째와 열 한번째 시는 제주도 민요를 옮긴 것이라고 밝혀 놓았다. 열번째 시는 젊은 여자가 재산 많은 사주(寺主)에게 시집감으로써 사주는 황모(黃帽)를 쓴 신랑이 되어 상방으로 신부를 맞아들인다는 내용이다.

 

열 한번째 시는 제주도 주민들이 종래 물산이 별로 없어 뭍에서, 특히 전라도 쪽에서 장수들이 옹기와 백미를 팔러 오면 크게 도움이 되었는데, 그나마 자주 올 수 없었으므로 북풍이 불어 보내는 이 배를 항상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몽고의 목장이 설치된 뒤로 관사(官私)의 우마가 전야를 덮어 현지 백성들은 경작할 땅조차 없게 되고, 드나드는 관리들은 북새를 이루어 더욱 백성들을 못살게 하고 있었으므로 그 동안 여러 차례 변고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한시도 표현이나 정서에 있어서는 우리 문학다운 면모를 갖추어야 하겠다는 자각에서 이런 작품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속악가사를 다른 측면에서 재검토하고, 속악가사로 전하지 않는 우리말 노래까지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소악부는 어느 것이나 칠언절구의 짧은 형식이어서 우리말 노래의 개요를 옮겨놓았거나 어느 한 대목을 번역하였을 따름이다. 우리말 노래의 묘미를 살리는 데에 충실할 수 없었던 것이 한계이다.

 

[참고문헌]

 

◇益齋亂藁, 한국문학통사 2(조동일, 지식산업사, 1983),

◇高麗歌謠의 硏究-益濟小樂府에 限하여(徐首生, 慶北大學校論文集 제5집, 1962),

◇小樂府試攷(李鍾燦, 東岳語文論集 제1집, 東國大學校東岳語文學會, 1965),

◇高麗末期의 小樂府-高麗俗謠와 士大夫文學-(李佑成, 韓國漢文學硏究 1, 韓國漢文學硏究會, 1976),

◇高麗末 小樂府의 樣式的 特性과 形成經緯(박혜숙, 形成期의 韓國樂府詩硏究, 한길사, 199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악부

중국의 시체(詩體)로 원래는 음악을 맡아보던 관청 이름이었으나, 거기서 채집 ·보존한 악장과 가사 및 그 모방 작품을 악부(樂府) 또는 악부시(樂府詩)라 하게 되었다. 관청으로서의 악부는 전한(前漢) 무제(武帝:재위 BC 140∼BC 88) 때에 비롯하며, 이연년(李延年)이 협률도위(協律都尉)가 되어 사마 상여(司馬相如) 등에게 시부(詩賦)를 짓게 하였다.

 

이는 100여 년 동안 존속하다가 애제(哀帝) 때 폐지되고 태악(太樂)에 통합되었으며, 악부시의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여 본사(本辭)가 되는 것으로는 정사(正史)의 악지(樂志) 등에 실린 작품, 악지 등에 실리지 않은 민간 가요, 악부체(樂府體)로 문인이 창작한 작품 등이 있고, 본사 이외에 이를 모방한 작품과 이민족(異民族)의 가요 등이 포함된다.

 

문인이 창작한 것으로는 당나라 때에 이르러 종래의 악곡이 탈락된 두보(杜甫)의 <병거행(兵車行)> <삼리삼별(三吏三別)>, 원결(元結)의 <계악부(系樂府)> 등이 있고, 이민족의 유명한 가요로는 <칙륵가(勅勒歌)>가 있다.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