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지리지(地理志)

남지읍 성사리 매전마을 유례

야촌(1) 2016. 4. 7. 23:38

경남 창녕군 남지읍 성사리(成士里) 매전(梅田) 유례

 

1. 위치와 환경

 

성사 남쪽의 마을 매말리를 매전으로 한자를 쓴 행정리의 명칭이다. 관동리에서 1964년 3월 1일 분동되었다. 매전의「매]는 산의 옛말인 [뫼, 메]가 [梅]로 전사(轉寫)된 것으로 곧 뫼 마을, 산마을이란 뜻이다. [전(田)]이 신전리의 경우처럼 밭을 말하기보다는 마을을 뜻한다.

 

산의 옛말 뫼가 매(鷹), 마(馬), 마(麻), 미(彌), 매(買) 등으로 전사되어 옛 지명에서 산을 뜻하는 글자로 많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매전, 매말리는 [뫼마을] 곧 산마을이라 할 것이다.

 

2. 입향 성씨와 마을의 형성

 

1925년 8월, 관동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옮겨오기 시작하였는데 밀양박씨 박재근(朴在根 -박영익의 조부). 이종석(李鍾錫). 전기수(全寄壽), 옥산전씨 전태영(全泰永 -전성백의 조부), 이영우(李永雨) 등이 이주해 오고 이듬해 경북 성주로부터 이기만(李寄萬: 매전 이명락의 증조부) 외 11호가 이주하여 왔다고 한다.

 

처음에 관동으로부터 4호가 이사를 왔는데 밀양박씨, 옥산전씨, 경주이씨 판전공파의 후손인 이종표(李鍾杓) 등이었는데 경주이씨는 이천회(李千會, 30世, 숙종 때 사람, 李洪雨의 8대조)가 의령 정곡 유곡에서 1700년대에 관동으로 이거하여 살다가 매전으로 이사를 나온 것이다.

 

그 후 성주이씨와 함안조씨 사과공파 후손인 조윤규(趙潤奎, 조인업의 父) 등이었고 그 후 장마 가음에서 달성서씨 서상립(徐相立, 고종 기축 : 1889년, 서낙규 2代祖)이 1920년경 이사를 와 살다가 잠깐 학암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매전으로 돌아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또 경주김씨도 성사에서 이사하여 살았다. 경주이씨, 함안조씨, 밀양박씨의 주거지로, 달성서씨, 경주김씨, 김녕김씨 등도 살고 있다. 매산재(梅山齋  : 이곳 梅田마을 입향조인 慶州李氏 處士 李千會를 기리는 齋室)가 있다.

 

 

■ 거주 성씨 현황

 

    <그림1>

성별 이씨 조씨 박씨 전씨 최씨 조씨 서씨
본관 경주 성주 전주 벽진 함안 밀양 옥산 경주 창녕 달성
세대 10 3 3 2 10 5 2 2 2 3
성별 김씨              
본관 안동 경주                
세대 1 1               44

 

3. 매전리 (梅田里)의 오늘

 

1931년 11월 5일, 관동에서 분동되기도 전에 마을회관부터 건립을 하여 독립마을의 터전을 마련하였는데 그 당시 호수는 41호였다고 한다. 10년 후 1941년 성사리에서 관동으로 분동되고 1964년에야 관동으로부터 매전이 분동하였으니 그때 호수는 52호였으며, 초대이장은 이종선(李鍾善)이었다.

 

1990년대에 가구 수는 52호이던 것이 44호로 줄었는데, 98년 현재 가구 수는 45가구 인구수는 80명(남 34명 여 46명)이며 직업별로 보면 농업이 43, 약종업 1, 상업 1가구 등이다. 마을회관은 마을 가운데 있으며 건평 20평의 건물로 사무실 외에 경로당과 창고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가구 수 및 인구 변동 상황은 다음과 같다.(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1991∼1997)

 

<그림2>

구 분 가구수 인구수 합계
1990년 44 102 41 61
1993년 45 107 52 55
1996년 43 92 40 52
1998년 12월 말 44 94 44 50

 

 

가. 역대 이장 명단

◌李鍾善(1964.03.01.∼1965.11.10.).◌朴順浩(1965.11.10.∼1967.12.17.).◌趙鏞鐵(1967.12.17.∼1969.03.28.).◌朴順浩(1969.03.29.∼1971.02.28.).◌趙熙濟(1971.03.01.∼1981.12.31).◌李善福(1982.01.01∼).◌趙熙濟(1982.∼).◌趙英助(1991.02.04∼1995.01.16).◌趙判濟(1995.01.17∼).◌ 李相雨(1997.01.17∼현재) <자료 : 남지읍, 리동장 대장(臺帳)>

 

나. 역대 새마을지도자 명단

◌金正甲(1972∼).◌李癸出(1978∼).◌徐絡圭(1982∼).◌趙熙濟(1991∼).◌趙英助(1995∼).◌趙鍾燮(1999∼현)/ ☆부녀지도자 : ○金且仙(1972∼).○朴孝順(1978∼).○辛睦任(1982∼).○朴南斗(1991∼).○李今子(1995∼).○宋淑子(1999∼현) (자료 제공 : 매전리장)

 

4. 땅이름과 유래

 

가. 매말리{梅田}

옛날 이곳에 시장이 있었는데 말을 매어 놓았던 곳이라 하여 매말리라 하였다 하거나 어떤 이는 [梅田]이란 한자의 뜻에 부회(附會)하여 살구, 매실 밭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매]는 산의 고어 [뫼]에서 변화된 것이니 매말리는 [뫼 마을]로 봄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또 임란 때, 의병이 진을 친 진터(陣地-)로 장시銜가에 진마라 하는 곳이 있는데, 그때 이 근처에서 말을 기르고 매었으므로 그에 연유하여 매말리라 불리었다고도 어떤 이는 주장한다. 이 역시 마을 유래나 이름을 좋게 꾸미고자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나. 황새목

매전 동쪽 성사 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산줄기가 황새의 모가지처럼 길게 내려오다가 이곳에서는 잘록하게 들어간 곳이므로 황새목이라 한다. 이 목은 남지에서 성사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옛길은 이곳을 통과해야 산 넘어 고곡지구로 갈 수 있었다.

 

지금은 이곳 목 위쪽 산등으로 길을 닦아 이곳을 통과하지 않아도 된다. 인가가 목 양쪽에 있고 주막들도 있어 길손들의 쉼터였다. 도정공장이 있고, 그 옆에 군수의 선정비가 있다. 매전쪽으로 성사기로회 경로당과 상덕사(尙德祠)가 있다.

 

◈군수 비껄

황새목 동편 학암과 대성으로 가는 길 북쪽 편에 서 있는 비를 군수비라 부른다. 바로 계성천 다리를 건너가기 전에 있으므로 지명으로도 불린다. 이곳 비석은 1867∼1870년간에 영산현감으로 있었던 조운한 현감의 선정비로 성사리 주민들이 1876년에 세운 것이다.(전설 참조)

 

◈도사골(道沙谷)

매전 입구에 있는 뜸을 도사골이라 부른다. 남지읍 남부의 옛 이름이 도사면이었으니 이 뜸의 이름과 같아 서로 관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예전에 우물이 있었는데 지나가던 도사가 이곳 물을 마시며 물맛이 좋다고 하며, 쉬어 갔다고 하여 도사골이라 하였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러나 산이나 길이 돌아가는 모퉁이나 모롱이를 이곳에서는 모랭이, 모리 등으로 부르고 한자로 표기할 때 흔히 회(回), 모래 사(沙)를 써 돌모랭이, 돌모리를 회사곡(回沙谷)으로도 사용하니 이 도사골도[도는 모랭이, 모리]이라 하여 음차로 도사(道沙)로 표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매말리골

매전 마을이 있는 골짜기를 매말리골이라 부른다.

 

◈질마산

매전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마을 앞산이기도 하다. 동편 봉우리는 65m이고 서편 봉우리는 130.4m로 두 봉우리를 잇는 산줄기가 길마처럼 생겼으므로 질마산이라 부른 것이다. 길마를 이곳 사람들은 질마, 질매라 한다.

 

◈진막골(陣幕谷)

매전 앞쪽의 질마산 골짜기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영산현에 들어 온 왜군과 싸우며 이곳에 진을 쳤다고 하여 진막골로 불린다.

 

◈장시銜(長成浦)

예전에 성사리의 어귀라서 장승이 서 있었던 자리이므로 장승늪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매전 앞 남쪽 일대로 전에는 큰 늪이 있었으나 점점 개답되어 늪의 흔적은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아 이제는 들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 늪에 말을 키우고 매었다는 진마가 임진란 때 있었다고 한다.  

 

 ↑황새목에서 바라본 매전 마을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