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조선(古朝鮮)

고조선(古朝鮮)의 한사군(漢四郡) 현(縣)성립과 조선유민의 이동

야촌(1) 2018. 6. 26. 22:23

고조선(古朝鮮)의 한사군(漢四郡)성립과 조선유민의 이동


기원전 108년 요서지방과 한반도 북부 및 동북아 일대를 재패하였던 고조선(古朝鮮)은 한 제국[漢나라]과의 전쟁과 지배계층의 분열 등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또한 고조선의 멸망과정에서 중국과 적극적인 우호관계를 주장하던 친 중국파가 주도적인 역 활을 하게 됨으로써, 고조선 멸망 이후에는 주요지배계층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데 고조선 유민 이동경로에 대해서는 대단히 단편적인 역사적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어, 그것을 추적하는 일은 대단히 힘들다. 우선 한제국과 1년이 넘는 전쟁과정에서 유민(流民)이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예측은 당연한 것이지만, 과연 얼마만큼의 규모로 어떻게 발생하였는지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전쟁 피난민 외에, 친 중국 정책에 반발하여 발생한 정치적 목적의 유민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친 중국세력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 우거(右渠)를 살해하고 한 제국에 투항할 정도로 모화사상(慕華思想)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친 중국 세력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것이 우거왕(右渠王)의 대신이었던 충신 성기장군(成己將軍)이었다. 하지만 성기장군의 노력역시 또 다시 주화파의 암살에 의해 실패되었다. 더구나 주화파의 핵심세력은 우거왕의 아들 장(長)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지도부의 친 중국 세력에 반발하여 대거 정치적 유민이 발생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세력이 해모수(解慕漱)와 양산세력(楊山勢力=신라의 6촌장)이었다. 해모수를 고조선의 유민 세력으로 보는 이유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북부여기(北夫餘記)에 나오는 내용이 단군신화(檀君神話)에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구려기(高句麗紀)에는 단군이 유하를 만나 주몽(朱蒙)을 낳은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해모수는 단군계열의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주몽의 탄생시기가 기원전 58년으로 되어 있어, 고조선의 멸망연도와는 50년차가 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적어도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웠다면 최소 20대 중반정도는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학적으로도 70대 중반에 자손을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기록에도 주몽을 낳을 당시 해모수가 대단히 늙은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연관성은 있다고 보여 진다. 

 

아니면 해모수계의 왕족이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는 없으나, 주몽과 해모수가 혈연적으로 연관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이렇게 해모수세력이 북쪽방면으로 이동하여 북부여를 세우고, 후일 고구려로 계승 발전되었다면 알평(謁平)세력은 남쪽으로 내려갔다.


 알평(謁平)세력은 고조선의 유민집단임이 해모수 세력보다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양산(楊山)을 비롯한 고허(高墟), 진지(珍支), 대수(大樹), 가리(加利), 고야촌(古野村) 등 6부는 고조선의 유민임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알평 세력은 이들 6부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으로 알천 양산촌(楊山村)을 세우게 된다. 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와 고야촌(高耶村)을 세운 촌장 호진(虎珍)은 처음에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온 것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져 있다. 그렇다면 호진세력은 고조선 내 동쪽방면에서 이탈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 등의 6부지명은 신라의 고유지명인지 아니면 고조선의 지명을 붙인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이들이 고조선의 유민인 만큼 알천 양산촌 같은 지명은 고조선의 지명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사고해 본다.


또한 신라사람 역시 낙랑(樂浪)이라고 한 것 등을 보아도, 고조선의 유민집단이 남하하여 신라건국의 중심세력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듯 고조선 유민세력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진출하여, 우리역사의 주요 고대국가를 세우는데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즉 이들은 한(漢) 제국에 예속되어 사는 것보다, 당당하게 주권을 가진 국가에서 살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것은 완전한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치열한 민족통합 전쟁에서 신라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그 역사를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당(唐) 제국과의 정치적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단지 그것만 가지고 신라의 위업을 평가절하 해서는 안될 것이다. 국제간의 협력이나 공동 전쟁작전 수행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것이며 외교적인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주권 운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것은 어쩌면 지나친 피해의식이 아닐까?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 중 하나였던 신라는 비록 영토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지만, 한반도 전체를 복속시키고자 하였던 당제국의 대공세를 막아내고 이땅의 역사와 주권을 온전하게 지켜낸 위대한 대업을 이룬 나라이다.


그리하여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동등하게 평가돼야 할 것이며, 고구려의 대륙 진출이나 백제의 해양진출에만 고무되어 신라의 역사를 깎아내리는 일은 반드시 지양해 나가야 할 것이다.

 

출처 : 고조선(12) 한군현의 성립과 조선유민의 이도이작성자 경영의 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