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자를 연재하면서)
치우천자의 "구려(九黎=구리하고도 읽음)"시대를 강조하는 이유는 단한가지입니다
"중국정사와 우리사서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단군왕검 이전의 실존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중국현지에서 유물/유적도 발굴하였기 때문에 증빙이 가능 합니다
이를 부정하지 않는 한 "단군조선(檀君朝鮮)도 당연히 실존의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이하 자료를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1) 치우천자(蚩尤天子) 항목에 대한 간략한 소개
여기는 중국의 정부에서 작성한 "정사(正史)"중 제일먼저 작성된 "사마천(司馬遷,2세기까지의 중국사기)의 사기본기"에 나오는 우리 "동이((東夷)"의 2번째 나라 "치우천자"의 "구려(九黎)"에 대한 설명을 하는 곳입니다
"구리"는 우리의 사서(史書)인 한단고기 등에는 "배달((倍達: 밝은 산, 큰 산을 뜻하는 ‘박달’의 말소리가 변해서 이루어진 말), 한웅(桓雄 : 단군의 아버지로 전해지는 신화상의 인물), 신시(神市: 배달환웅의 만주 요녕성 홍산문화 배달국(倍達國)"시대라고도 기록되어 있으나 같은 의미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도표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 빨간색 네모로 표시된 부분입니다.
(추가설명 : 한글병기)
① 최초의 나라 "한"(桓國: 동아시아 단일시대)
우리민족은 약 9200년 전인 기원전 7197년에 최초의 국가 "한"(桓)이 일어나 약 3000년간 지속 되었습니다.
② 두 번째 나라 구리(九黎)
- 배달(倍達) 또는 한웅(桓雄), 신시(神市)시대 : 동아시아 단일국가
한(桓)에 이어 기원전 3898년(약6,000년 전)에 구리(九黎)시대가 1565년간 유지되었는데 치우천자는 구리시
대의 14세 천자(B.C 2707년, 일명 자오지 한웅)이었습니다
이때가 중국정사에 나오는 중국인의 시조 "헌원(軒轅 :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린 오제(五帝)의 첫 번째
왕)"시대로 치우천자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2) 치우천자(蚩尤天子)를 소개하는 이유
우리나라는 "한국(韓國)" → "구리(배달, 한웅)" →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이어지는
약 92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학계에서는 우리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근거가 없다며 단군은 실존인물이 아닌 신화라 주장하고 전통 무속 등 미신으로 격하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 기원전 2333년 단군조선을 개국한 단군왕검 보다 400여 년 전 선조인 구리시대 치우천자의 실존을 밝힘으로써 단군이 신화가 아닌 실존역사시대였다는 것을 증빙하고 단군조선 이전 1600여 년간의 "구리시대(九黎時代)"가 이미 실존하였다는 사실을 정사의 기록을 인용하여 증빙코자 하는 것입니다.
이 자료를 보시고 기존 학계의 무지와 원서를 보지 않고 스승의 뜻만 좇아 교육하는 도제식(徒弟式 : 도제 관계와 같이 제자가 스승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방법) 조폭역사문화(組暴歷史文化)의 "게으른 학문의 한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3) 치우천자(蚩尤天子)란 누구인가
한단고기(桓檀古記)중 "삼성기(三聖記)"중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에 나오는 14대 천자입니다.
중국 정사에는 치우천자로 한단고기에는 치우한웅(또는 자오지 한웅)으로 기록하고 있어 "양국사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단군왕검(檀君王儉=古朝鮮,:檀君朝鮮의 첫 국왕)의 단군조선 개국 400여 년전 동이(東夷)의 선조라는 것 입니다.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 분홍색 네모 칸이 14대 치우천자 항목입니다.
이분이 중국의 시조 헌원(軒轅)과 탁록(涿鹿)에서 전쟁을 합니다.
중국정사(中國正史)에 나오는 신분을 비교해보면
◇치우(蚩尤)
"치우"는 "구리(려)"의 "천자"이고 그 백성이 "묘민(苗民)"이다
"치우(蚩尤) = 구리(九黎=東夷國의 이름)의 천자(天子)"
치우천자(蚩尤天子)의 무덤은 곡창 평야지대인 중국 산동성(山東省省) "동평(東平)"에 있습니다.
◇헌원(軒轅)
헌원은 치우천자의 구리연방국의 제후 "소전(少典)"의 아들로 치우천자에 반역을 도모하였다가 태행산맥(太行
山脈 =Taihang Mountains) 서쪽으로 쫓겨나 중국민족의 시조가 되었는데, 황제는 산동성 "수구(須句)"에서 태
어나 치우천자에게 반역을 도모하다가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다가 고산지대 척박한 땅 장
안북쪽 섬서성(峽西省) "황릉(黃陵)"에 묻혔습니다. (이를 지도상에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평(東平) : 치우천자의 무덤이 있는 곳
◇거야((巨野) : 치우천자 부인 "견비(甄妃ㅣ이름은 호접)"의 무덤이 있는 곳/ 산동성(山東省) 거야현(巨野縣, 쥐
예) 지역
◇수구(遂久) : 제후국 소전의 아들 "헌원"이 태어난 곳/수구(遂久)는 현 윈난성(雲南省) 여강시(麗江市) 지역을
말하며, 여강고성(麗江古城) 이라 불린다
◇탁록(涿鹿 : 치우천자에 반기를 들어 쫒겨 다니다 "탁록"에서 최종적으로 황제가 패함/ 탁록(涿鹿)은 오늘날 하
북성(河北省) 장가구시(张家口市) 탁록현을 말함.
◇황릉(黃陵) : 고원지대 척박한 땅 장안 인근으로 달아나 끝끝내 "헌원"이 태어난 옥토 산동성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황릉"에 묻힘/중국 산시성(陝西省)성 황링(黃陵)현 지역.(운영자 주) 최근 치우천자 부인의 이름이 밝
혀졌는데 추후에 소개합니다. (2004.10.18)
(4) 산동성(山東省)에서 발견된 실존 유물
동이의 역사를 찾기 위한 뜻있는 분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산동성에서 "치우천자(蚩尤天子)의 유적"이 발견 되
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어도 기존 학자들은 치우는 "중국의 악신일 뿐, 우리와 상관없다" 합니다.
그들에게는 유물유적도 중국의 정사도 자기들 기준과 다르면 모두 부정하는 특히한 구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아래에서 산동성(山東省)의 동평(東平)에서 발굴된 유적지를 간략히 소개합니다.
① '치우총(蚩尤塚)' 비석
↑'치우총(蚩尤塚)' 비석
석회암으로 된 길이 2.38m, 넓이 0.83m, 두께 0.31m의 비석
② '치우사(蚩尤祠)' 표지석
↑'치우사(蚩尤祠)' 표지석화강암에 석각된 된 길이 1.1m, 넓이 0.55m, 두께 0.15m의
표지석이다.
③ "치우천자의 비석 및 표지석" 발굴시 같이 나온 "연호"가 새겨진 유물
↑"원화(元和)" 연호는 후한(84 ~ 86), 당(806 ~ 820)때 사용한 연호 입니다
④ 복원중인 치우천자 총(蚩尤川子冢)
↑복원중인 치우천자 총(蚩尤川子冢)
↑산동성의 치우 총 표석(山東省의 蚩尤 冢 標石)
⑥ 탁록(涿鹿)에 있는 치우유적 중 현존하는 "치우북채(蚩尤北寨) 표지석"
치우천자가 진을 쳤던 북쪽요새가 있었던 자리 표시로 북채(北寨) 외에 중채(中寨), 남채(南寨)가 있다.
↑치우북채(蚩尤北寨) 표지석
⑦ 탁록(涿鹿)에 있는 치우천(蚩尤泉)과 치우송(蚩尤松)
↑치우천(蚩尤泉)과 치우송(蚩尤松)
⑧ 하북성(河北省) 장가구시(张家口市) 탁록현에 있는 삼조당내 “치우천자상”
↑좌측이 치우천자, 우측이 염제, 중앙이 훤원이 모셔져 있다.
(4) 맺음말
이러한 자료는 학계의 누가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뜻있는 분들이 사비를 들여 발굴하고 찾아낸 유물유적들입니다.
땅을 파서 유물이 나와야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계 그들은 이제 재야 사학자들이 발굴 한 것은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나라의 역사를 찾아가는데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가장 큰 걸림돌이 일본 중국사람도 아니고 바로 "우리나라 학계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더 정확하고 더 자세한 자료들이 이 홈페이지를 통하여 공개될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의 선택권은 네티즌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네티즌 여러분들이 비교를 통하여 본 홈페이지 내용이 옳다면 주변에 전파하여 우리역사를 바로잡는데 힘을 기울여 주십시오. 바로 우리 민족의 자존심 문제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처음오시는 분 필독)(1) 치우천자를 연재하면서 ! | 작성자 : 환신
'■ 역사 > 고조선(古朝鮮)'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조선(古朝鮮)의 한사군(漢四郡) 현(縣)성립과 조선유민의 이동 (0) | 2018.06.26 |
---|---|
우리 뿌리에 대한 소고-연재 조영진 (0) | 2018.06.12 |
2천여년 전의 흉노제국 마차 발굴 (0) | 2017.12.12 |
고조선의 역대 단군록 (0) | 2017.12.05 |
최씨낙랑국, 최리의 낙랑(略) (0) | 2017.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