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조선(古朝鮮)

우리 뿌리에 대한 소고-연재 조영진

야촌(1) 2018. 6. 12. 01:40

우리 뿌리에 대한 소고 – 치우천왕[연재(然哉)/조영진]

 

오래전에 홈페이지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부족한 사람이 선생님을 제대로 보필하여 드리지 못해 때를 놓친 일이 많았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한국에서 벌려 놓았던 일들을 이곳 Aix에 와서야 하나하나 매듭을 짓는 것을 보면 이곳도 큰 인연 지인 듯합니다.


팔순의 노구를 이끄시고 젊은이들 못지않으신 선생님의 열정에 그저 못난 소인 머리 숙여 감사를드려마지 않습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길 기도드리며, 선생님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 참말이 통하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감동을 나누고 변화시키며, 개개인 모두가 하나님과 같은 존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그런 사회를, 우리 모두 이루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선생님 마음 속깊이 사랑합니다.  
 
건강하소서.
Aix에서
Torrent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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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뿌리에 대한 소고

 

1) 중국인의 치우천왕 선양

    (전번 한. 일 월드컵 경기 때 붉은 악마 응원단의 상징으로 모처럼 숭앙되었던 치우천왕에 대하여 2002년 7월 초

    순에 중국 현지를 답사하고 돌아온 곽종혁(郭鍾爀)님이 제공해 준 자료와 내가 들은 바를 간추려 엮었다.)

 

1. 한족(漢族)에서 중화족(中華族)으로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한족(漢族)이라고 일컫다가 근자에 와서는 중화족(中華

    族)이라 일컫는다.

 

2. 한족의 시조는 황제(皇帝)로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상고시대를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라 일컫고, 황제 헌원(軒轅)을 시조로 받들어 왔다

 

3. 한족의 시조를 황제와 염제(炎帝)로
    그러다가 1980년대부터는 염제 신농(神農)을 끌어들여 황제와 함께 그들의 시조로 숭앙했다.

 

4. 중화족의 시조를 황제. 염제. 치우제의 삼조(三祖)로

   ① 황제. 염제. 치우제
       1990년대에 와서는 우리 한겨레의 신시(神市), 곧 배달나라 제14세 자오지 한웅이시며, 청구(靑丘) 나라를 처

       음 어서 청구 제1세가 되신, 별칭 치우천왕을 또한 그들의 시조로 모시어, 치우천왕과 황제의 전적지인 중국

       하베이성(하북성) 탁록현(河北省 涿鹿縣) 평원에다가 9,000m2 의 광활한 부지에 높이 12.67m, 면적 714

       의 웅장한 건축물인 “중화 삼조당(中華 三祖堂)”을 1992년에 착공하여 1997년에 준공하였다. 

 

       그 안 중앙에는 황제를, 왼쪽에는 치우제를, 오른쪽에는 염제를 각각 높이 5.5m나 되는 웅장한 소상으로 만들

       어 셔놓고 있다.

 

   ② 치우 릉(蚩尤 陵)
        아울러 지나 청(淸) 나라 건 융제 때 건립하였다는 치우 총(蚩尤 塚) 비석은 중국 문화혁명 때 파괴를 면하려고

        묻어 놓은 것을 1997년에 발견하고, 그곳 중국 산동성 문상현(山東省 汶上縣)에 2002년 6월 치우릉 복원공

        사가 시작되어 어마어마한 규모의 왕릉이 조성 중에 있다.

 

5. 치우천왕의 사당
    그리고 치우사(蚩尤祠)의 비석이 산동성 문상현의 중도(中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매년 음력 10월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치우천왕은 동방 세계 전체의 유일한 군신(軍神)으로 모시어, 중국 장

    안(長安)에 치우사가 세워졌고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도 치우제를 지냈으며, 우리나라 이 순신 장군도 치

    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있다고 한다.

 

   또한 강(姜)씨, 치우 씨와 윈난 성(운남성) 묘족(猫族)들이 모두 치우천왕을 조상신으로 섬기고 있다.  특히 묘족

   들은 후난 성(湖南省) 서부에 거대한 치우천왕 동상을 건립해 놓고 있다.

 

6. 삼족 분할 지도
    여러 차례 중국 현지를 답사한 김 세환(金世煥)님이 발표한 글과 자료에 의하면 1997년 10월에 산동성 제남(山

    東省濟南)의 산동성 박물관에는 동이족(東夷族), 하화 족(夏華族), 묘만 족(苗蠻族)의 삼족 분할 지도(三族分

    割地圖)가 있어서 사진을 찍어 왔다는 것이다. 

 

   그 지도에 의하면 동이족은 허베이 성(河北省) 일원과 산동성(山東省) 일대의 황하 하류지역이며, 하이족은 그

   서쪽으로 황하 상류지역에 자리하고, 묘만 족은 양자강 중류와 그 남쪽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족이

   일컫는 동이족이 황하유역 비옥한 중원에서 거창한 고대문화를 이룩했음을 넉넉하게 짐작할 수 있다.

 

7. 관우(關羽)의 사당
   그런데 한족들은 언제부터인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關羽)를 군신으로 슬쩍 바꾸었고, 우리 조선왕조시대의

   사대주의자들은 관우를 숭앙하여 관우 제를 지냈었다.  서울 동대문 밖에 지금도 남아있는 동묘(東廟)에서 그 흔

   적을 볼수 있다.

 

8. ‘며느리발톱’ 이야기
    인체의 발 가운데, 새끼발가락 바깥쪽이 며느리발톱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 며느리발톱이 있는 것은

    중국 사람들 중에서도 동이족만이 있어서 동이족의 유전적 특징의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며느리발톱이 있는 사람은 모두 치우천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며느리발톱이 있는 민족은 우리 한민족은

    물론이고, 중국인 중의 일부, 몽골인, 일본인 그리고 남. 북 아메리카의 아메리카 인디언이라는 것이다.

 

1)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우리 뿌리의 재조명

    위와 같이 다른 민족들은 조상의 뿌리를 찾아 숭앙하고, 고대 정신문화사상을 재조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옛날 조

    상의 뿌리를 찾숭앙하지 못하고, 고대 정신문화사상이나 우리의 것을 아끼고 다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매우 부

    끄럽게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몇 가지를 간추려 본다.

 

   그와 같이 우리 조상의 뿌리를 등한시하고 우리 원래의 말이 흐려지게 된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일연의 <삼

   국유사(三國遺事)>에는 그래도 ‘옛날에 한국(桓國)이 있었다(昔有桓國)’고 <고기(古記)>를 인용해 적어놓아,

   우리 상고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해놓고 있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우리 상고사를 싹둑 잘라내

   버렸고, 그 뒤 오랫동안 지나 중심주의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왔고, 더구나 일제 강점시기에는 역사왜곡이 심했기

   때문이다.

 

   우리 원래의 말이 흐려지게 된 것은 표음문자인 가림토(加臨土) 문자(38자)가 후세에 한글로 재생되기는 했지만,

   표의 문자인 한자의 세에 밀리어 중간에 전해지지 못하고, 한자의 훈과 음을 빌어서 이두문자나 구결 문자로 대행

   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서구 중심주의 문화와 실증주의 역사연구의 경향에서는 사고의 일대 전환이 있어야만 우리 상고사

   는 재조명될 형편에 있다.

 

1. 중화 삼조당’의 뜻하는 바는?
    중국인들이 황제 헌원을 시조로 모시다가 새삼스럽게 염제 신농과 치우천왕을 ‘치우제(蚩尤帝)’라 일컫고 ‘중화

    삼조당’에 모시며 치우 총을 치우 릉으로 격상시켜 거창한 토목공사를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현대판 중화사상의 시현이다.  상고시대의 정신문화를 중국의 현대적 입장에서 재조명하고 재

   해석해서 계승 한다는 데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 물론 중국 내 복잡한 소수민족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동화정

   책의 일환이겠지만, 중국 국경 내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중국의 변두리 역사로 간주하며 중국의 역사통합을 시

   도하고 있다.

 

   우리가 청구 나라를 처음 건국한 우리 겨레의 조상으로 믿고 있는데, 장차 우리 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는지는

   예의 주시해야 일로 생각된다.

 

2. ‘동이’라는 용어는?
    ‘동이(東夷)’라는 그 용어는 고래로 지나인의 ‘하화(夏華)’, 곧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거주 위치를

    기준으로 동쪽에 우리 겨레 선민(先民)들이 사는 곳을 대칭적으로 일컫던 말이다.

 

 ① 큰 활을 메고 다니는 씩씩한 사람들


      이(夷) 자는 한자의 상형문자로서, 한자 제자 당시 우리 선인(先人)들이 ‘큰 활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늠름한 모

      습이미지’를 상형한 글자이다. 지나 중심 중화사상에서 그들이 주변 이민족을 남만(南蠻), 북적(北狄), 서융

      (西戎), 동이(東夷)라고 일컬어서, 이민족을 비하한 흔적이 있고, 우리가 그 글자의 훈을 ‘오랑캐’라고 한 것은

      후세 사대주의 관점에서 분별없이 붙인 것이므로 모든 자전은‘큰 활 이’자로 고쳐져야 한다.

 

 ② 치우천왕은 누구신가?
     치우천왕의 ‘치우’는 천자(天子)의 뜻이며, 치우천왕은 이미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신시 시대, 곧 배달나라 제

     14세 자오지 한웅으로 청구 나라를 처음 세운 분이시다.

 

 ③ 청구(靑丘) 나라의 위치
      아직 청구 나라의 위치를 고증한 글을 접하지 못했으나,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 김 세환(金世煥)님이 1997년 10

     월에 산동성 박물관 입구 정면에 걸려 있는 현판에 ‘먼 옛날부터 한(漢) 나라 때에 이르는 동안 산동성에 고대 동

     이족이 모여 살던 주요 지구(遠古至漢山東省 古代 夷聚居的 主要地區)’라고 적혀있는, 그 현판과 그 전시실에

     서 본 ‘동이족, 하화족, 묘 만족의 삼족 분할 지도’로 미루어, 중국의 허베이 성(하북성), 산동성, 황하의 중류지역

     일대가 청구 나라가 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④ 청구나라는 도의의 나라
     청구는 기후도 온화하고 비옥한 푸른 언덕, 평원지대에 자리하여 ‘우주 자연의 이치와 그 움직이는 기운을 사람

     의 마음속에서 통합하여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 되는 삼신일체(三神一体)의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교

     화(敎化)와 덕치(德治)의 길을 펼쳐 나갔으므로, 순화된 민인이 모여 살면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룩하여 도의

     의 나라였으므로 지나인은 청구나라를 ‘동방 예의의 나라(東方禮義之國)’라고 칭송했었다.

 

     어쨌든 우리 청구 나라를 ‘동이’라고 하면서 그 문화를 높이 평가했는데, 앞으로 ‘청구문화’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기를 기대다.

 

⑤ 세상에서 가장 먼저 쇠로 투구를 만들어 썼다.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구리 머리에 쇠 이마의 사람(銅頭鐵額者)’이라고 했으나, 그것은 ‘처음으로 쇠로 투구

     를 만들어 쓰고  갑옷을 갖추어 입은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백전백승의 용맹을 떨쳤으므로 오랫

    동안 그를 군신(軍神)으로 추앙 했었다.

 

⑥ <사기(史記)>는 한족(漢族) 중심의 기록이다.
    사마천(司馬遷, Ssuma Ch'ien)은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헌원 황제의 구적이라 하여 포악한 것으로 묘사하

    고, 탁록대전에서 사로잡았다고 하였으나, <환단고기>에는 그 반대로 기록되어있다.  남의 기록에 언제까지 추종

   만 할 것인가?

 

⑦ ‘멍 자국’과 ‘며느리발톱’을 가진 겨레
     우리 한(桓) 민족의 유전적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태어날 때 엉덩이의 ‘멍 자국(몽골반점 : 서양인이 붙인 명

     칭)’과  ‘며느리발톱’은 북방계 아시아인 일부의 특징인 듯한데, 장차  DNA 검사와 유전학 연구 결과를 기다

     려 그 분포도가 확정될 것으로 보이나, 그 분포는 우리 겨레를 중심으로 지구 각처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⑧ 명칭 하나라도 옳게 붙여야 한다.
     동서남북 상하좌우는 항상 자신이 기준점이 되어 일컬어지는 말인데, 과거 사대주의 관습에서 무의식적으로 우

     리나라를 스스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와 같이 ‘동국(東國)’, ‘해동 조선국(海東 朝鮮國)’ 등으

     로 일컬어 왔다.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우리나라 안에서 ‘극동(極東)’, ‘동국’, ‘해동’, ‘동이(東夷)’ 등의 용어가 회사, 단체 등의 명

    칭에서 간혹 보이는데, 주체의식이 있는 젊은 층에서는 어느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세운 회사나 단체냐고 묻

    기도 한다.

 

3. 내친김에 몇 가지 부연하여 말해두겠다.

 ① 고대 환국(桓國)은 ‘한국’으로 읽어야 한다.
      <한단고기> 책가위에 <환단고기>라고 적혀있으니 그렇게 읽는 것 같으나, 고대 ‘한국(桓國)’, ‘한인(桓因)’, ‘한

      웅(桓雄)’의  ‘한’은 우리말 어원대로 ‘환’이 아닌, ‘한’으로 읽어야 한다.

 

     한국, 한인, 한웅은 이두식 표기로서 桓에서 음을 따고, 國, 因, 雄에서 훈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한나라’의 한문식 표기가 桓國이고, ‘하나님’의 표기가 桓因이며, ‘한 임금’의 표기가 단군(檀君)이다. 

    그리고 1세 단군이 왕검이지만, 단군은 한 사람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역대 단군조선 임금의 통칭이다.

 

    우리는 옛날 우리말의 원음을 밝혀 적는데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서 이두 문으로 적어왔다.  거기에 애매한 점이

    있어 큰 혼란을 빚었으며, 일반 자전에 桓의 음이 ‘환, 완, 훤’으로 나와 있을 뿐, ‘한’음이 나오지 않아서 혼란이 생

    겼다. 

 

    옛날 글자인 한()자 음에는 반절 음으로 환[호관절(胡官切)], 완[우완절(雨阮切)], 훤[화원절(火遠切)] 외에 한

    [하간절(河干切)]이 모로하시[제교(諸橋)]의 <한화대사전(漢和大辭典)>에 나와있으며, 그 ‘한()’은 桓과 가

    차(假借)로 통용하는 글자라고 되어있다.

 

    한()자는 우리말의 ‘하나, 전체, 으뜸, 크다, 많다’ 등의 뜻을 가진 ‘한’의 뜻을 가장 잘 나타낸 한자이다. 

    한()자는 회의(會意)자로서 큰 대(大) 밑에 두 이(二)사이에 달 월(月), 또는 두 이(二)사이에 돌아올 회(囘→回)

    가 본자인 뻗칠 (亙)자가 합해진 글자이다.

 

    ‘크게 하늘과 땅 사이에서 달이 차고 이지러져 변화하고, 또는 위 아래로 회전하여 오르고 내리어 천도(天道)가

     순환한다’는 우리 고대정신사상과 상통하는 글자로 보인다.

 

    그 외에 우리말 ‘한’을 나타내기 위하여 빌려 쓴 한자는 ‘韓. 漢. 汗[징기스칸(成吉思汗)]’. 干[거서간(居西干).

    마립간(麻立干)] 많이 있고, 몽골어 계통에서는 ‘칸’이라 하는데, ‘한. 간. 칸’은 그 발음위치가 가까이 있어서

    모두 ‘한(桓)’의 전음이다.

 

② 대야미(大夜味) 지명이 무슨 뜻인가?
     오늘날 한자권 방문객을 위하여 지명 등에서 한자를 병기하는 것은 좋으나, 분별없이 이두 식 한자를 함부로 쓰

     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예로서 서울 지하철 4호선 아래쪽에 ‘대야미(大夜味)’라는 전철역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인가? 
   아무리 한문 식으로 해석해도 뜻을 알 수 없다.  그것은 논의 구획선이 큰 것을 ‘큰 배미’, 작은 것을 ‘작은 배미’라

   고한, 우리말을 굳이 이두 식 한자로 적어서 큰(大), 밤(夜)은 한자의 훈을 따고, 미(味)는 음을 따서 밤 미로 적어

   서 ‘배미’를 나타낸 것이다.

  

    또 경북 봉화군 내성면에 ‘해저리(海底里)’가 있는데, 소백산 높은 지대 마을 이름이 어떻게 ‘바다 밑 마을’이 되

    었는가?  그것은 지대가 하도 높아서 원래 ‘해 밑 말’인데, 한자 海에서 음을 따고 底의 훈을 따서 원래의 뜻을 생

    각하지 않고 마구 붙인 지명이다. 

 

    섣부른 백정이 사람 잡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어의 난조(亂調)는 곧 정신문화의 황폐화를 의미한다.

    2002년   가을에


    출처 : 원천 源泉 La Source 원문보기▶ 글쓴이 : Torr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