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포재집(寒圃齋集-문신 학자 李健命의 시문집) 제10권 / 제문(祭文)
감사 이굉 치제문(監司李宏致祭文)
이건명 찬(李健命 撰)
영령은 자품이 단정하고 방정하며 / 惟靈資性端方
재주도 명민해 / 才猷明敏
약관에 과거 급제하고 / 弱冠射策
일찌감치 벼슬길로 나아갔으니 / 早歲發軔
반열에서 빼어나 / 秀出班行
명망이 높았다오. / 名高望峻
대성에 드나들며 / 出入臺省
기강을 떨치고자 하였고 / 綱紀思振
금화에서 경전 물으니 / 金華問經
주진의 예우 융숭하였지 / 禮隆晝晉
남쪽에는 어사로 내려가 / 衣繡南服
탐관오리 내쫓았고 / 貪墨解印
연행 길 도우면서 / 佐价燕路
우리의 충과 신 부축했네. / 仗我忠信
안팎에서 모두 칭송하여 / 內外咸稱
명성과 지위 점차 나아가며 / 名位漸進
굴신할 때 있었지만 / 屈伸有時
바라지도 고민하지도 않았지 / 不跂不憫
누차 하 읍을 맡아서는 / 屢試下邑
백성들 어루만지는 데 애쓰니 / 志勤撫循
간교한 관리는 손을 거둬들이고 / 奸猾斂手
피폐한 백성들 살아날 수 있었지 / 疲羸得賑
좌측의 장단과 우측의 남한산성은 / 左湍右漢
정녕 기내의 중요한 보루인데 / 寔畿重鎭
전후로 명을 받아 / 前後受命
그때마다 잘 다스렸지 / 輒有恢刃
조정의 포상 누차 더해졌지만 / 璽褒屢加
피로가 겹쳐 병이 되었고 / 勞悴成疹
급암처럼 후진들에게 뒤쳐져 / 長孺積薪
왕중서처럼 진에서 늙었네. / 弘中衰鬢
충청도 관찰사 자리 비게 되어 / 湖藩缺任
조정의 의논 어려워하며 신중했는데 / 朝議難愼
경이 비록 병들었다 고했으나 / 卿雖告病
나는 실로 선택하였지 / 予實簡遴
사람들은 좋아하고 싫어함 달라서 / 人殊好惡
칭찬하면 반드시 배척하는 이 있지만 / 譽必有擯
신하를 아는 데 나만 한 이 없어 / 知臣莫如
아낌없이 밝게 풀어 주었네. / 洞釋無吝
어찌하여 한번 병에 걸리더니 / 云胡一疾
갑자기 부고를 전해왔나 / 遽傳凶訊
여관에서 초혼하고 / 魂招旅館
길에서 돌아오는 상여 맞이했네 / 路引歸櫬
훌륭한 재주와 나라 다스릴 큰 기국을 / 長材國器
다 펼치지 못했으니 / 不克展盡
스무 해의 뜨고 짐은 / 廿載升沈
어렴풋이 한순간 같구려. / 怳如一瞬
하늘이 그대 얼른 앗아갔기에 / 天旣奪速
내 마음 슬프고 안타까운데 / 予懷用愍
세월이 흐르듯이 내달려서 / 日月流邁
빈소에 술잔도 올리지 못했네. / 奠未及殯
관리 보내 제문 지어 올리니 / 遣官文侑
민멸되지 않기를 바란다오. / 庶有不泯
[주해(註解)]
[주-01] 이굉(李宏) : 1651(효종 2)~1700(숙종 26)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대규(大規)이다.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재임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승정원일기 숙종 26년 12월 21일》
[주-02] 약관(弱冠)에 과거 급제하고 : 이굉은 1672년(현종 13)에 22세의 나이로 별시에 병과 13위로 급제하였다.
[문과] 현종(顯宗) 13년(1672) 임자(壬子) 별시(別試) 병과(丙科) 13위(17/21)
[주-03] 일찌감치 벼슬길로 나아갔으니 : 이굉은 1673년 7월 8일에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임명되었다. 《승정원일기 현종 14년 7월 8일》
[주-04] 대성(臺省)에 드나들며 : 이굉은 1680년(숙종 6) 9월 28일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임명되었다. 《승정원일기 숙종 6년 9월 28일》
[주-05] 금화(金華) : 금화지연(金華之筵)과 같은 말로, 한(漢)나라 성제(成帝)가 금화전(金華殿)에서 《상서》와 《논어》 등의 강론을 들은 고사에서 온 말이다. 흔히 경연(經筵)이나 서연(書筵)을 가리킨다. 《漢書 卷100上 敍傳上》
[주-06] 주진(晝晉)의 예우 융숭하였지 : 원문의 ‘주진’은 깊이 친애하고 예우한다는 뜻으로, “나라를 편안케 한 제후에게 말을 많이 하사하고, 낮에 세 번 만나 본다.[康侯, 用錫馬蕃庶, 晝日三接.]”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周易 晉卦 卦辭》
[주-07] 탐관오리(貪官汚吏) 내쫓았고 : 원문의 ‘탐묵(貪墨)’은 탐욕스러워서 행실이 더러운 것이나 그런 사람을 가리킨다. 이굉은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가서 계문(啓聞)을 올려 장흥 현감(長興縣監) 이행성(李行成)을 파직(罷職)시켰으며, 임피 현령(臨陂縣令) 김만증(金萬增)ㆍ고산현감(高山縣監) 이세무(李世茂)ㆍ흥양 현감(興陽縣監) 박세주(朴世柱)를 잡아다 추문케 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8년 12월 17일, 9년 4월 3일》
[주-08] 연행(燕行)길 도우면서 : 이굉은 1684년(숙종 10) 7월 6일에 사은사 겸 동지사(謝恩使兼冬至使) 사신 단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10월 27일에 떠나 이듬해 4월 2일에 돌아왔다. 《국역 승정원일기 숙종 10년 7월 6일, 숙종 11년 4월 2일》
[주-09] 좌측의 …… 보루인데 : 이굉은 1697년(숙종23) 6월 16일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이듬해 7월 26일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제수되었다. 《국역 승정원일기 숙종 23년 6월 16일, 24년 7월 26일》
[주-10] 잘 다스렸지 : 원문의 ‘회인(恢刃)’은 업무가 많아도 잘 처리함을 뜻한다. 포정(庖丁)이 소 잡는 방법에 대해 말하기를 “두께가 없는 칼을 두께가 있는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 데에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以無厚入有間, 恢恢乎, 其於遊刃, 必有餘地矣.]”라고 하였다. 《莊子 養生主》
[주-11] 급암(汲黯)처럼 후진(後進)들에게 뒤쳐져 : 원문의 ‘장유(長孺)’는 급암의 자(字)이다. ‘적신(積薪)’은 장작더미를 쌓을 때 나중의 장작이 맨 위에 놓이는 것처럼 뒤에 온 자가 오히려 앞자리를 차지하는 일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급암이 공손홍(公孫弘)이나 장탕(張湯) 등 자신의 후배들이 자기보다 높은 지위로 계속 승진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한 무제(漢武帝)에게 말하기를 “폐하가 신하들을 임용하는 것을 보면 마치 장작더미를 쌓는 것 같아서, 뒤에 온 자들이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陛下用群臣如積薪耳, 後來者居上.]”라고 하였다. 《史記 卷120 汲鄭列傳》
[주-12] 왕중서(王仲舒)처럼 진(鎭)에서 늙었네 : 원문의 ‘홍중(弘中)’은 당(唐)나라 왕중서의 자이다. 왕중서는 소주 자사(蘇州刺史)로 있다가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들어가게 되자, 늙은 몸으로 젊은 사람들과 문서를 다루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외직을 청하였다.
그는 마침내 강남서도 관찰사(江南西道觀察使)로 나가 진(鎭)에서 졸하였다. 《五百家注昌藜文集 卷33 故江南西道觀察使贈左散騎常侍太原王公墓誌銘》
[주-13] 칭찬하면 …… 있지만 : 이세백(李世白)이 이굉을 충청도 관찰사에 추천한 일에 대해 응교(應敎) 윤지인(尹趾仁)이 배척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26년 10월 22일》
[주-14] 신하를 …… 없어 : 제 환공(齊桓公)이 병세가 위독한 관중(管仲)을 찾아가서 문병하면서 적당한 후임자가 누구인지 묻자, 관중이 대답한 말이다. 《史記 卷33 齊太公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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