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3. 06. 22
■ 중원 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신라 당주"...신라에 주둔한 고구려군의 총사령관을 말함.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280-11 입석마을 입구에 있던 고비(故碑)를 1979년 2월 25일 충주지방의 향토사 연구모임인 ‘예성 동호회’의 제보에 의해 동년 4월 8일, 단국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단이 비면 탁본과 정밀한 해독(解讀) 작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확인 결과 이 중원 고구려비는 한성 백제를 멸망시킨 제20대 장수태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城)들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그 기념으로 세웠을 것으로 추측되며,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오늘의 서울)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 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중원 고구려비는 한 눈에도 광개토호태왕비(廣開土好太王碑)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이 석비의 높이는 2m3cm, 너비는 55cm로 형태는 석주형(石柱形)이며 자연석을 각자면(刻字面)을 간 다음 비문을 새겼다.
비문의 한 글자의 크기는 대략 3~5cm 정도이며, 사면에 새겨진 글자의 총 수는 730여 자로 추정되고, 판독 가능한 글자는 270여 자 정도이지만, 광개토호태왕의 비문의 내용 중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조공을 바쳐 왔었다(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를 증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문의 내용은 광개토호태왕 비문에 나와 있는 하 평양에 대한 기록, ‘백 잔 위서 여왜 화통 왕 순하 평양(白殘緯誓 與倭和通 王巡下平壤)’을 뒷받침한다. 하 평양은 지금의 북한 평양성임이 증명된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비의 건립 시점을 광개토호태왕 비가 세워진 50여 년 후인 장수왕 69년(481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했다. 마을사람들은 그냥 선돌이라고 불렀고 그에 따라 마을 이름도 입석(立石) 부락이었다.
마을 어귀에 강물을 굽어보는 요지에 2m가 넘는 선돌이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비석을 마을 지키는 수호 석으로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겨 수시로 찾아와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
천년이 넘는 세월의 풍상으로 비의 겉면에 끼어 있는 이끼가 비문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이 비가 고구려비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마을의 경계표시를 위해 세워둔 비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언제인가 밝혀지게 마련이다. 이 비의 비밀이 밝혀진 것은 역사의식이 투철한 충주의 문화재 애호인 들의 모임인 ‘예성 동호인’에서 시작되었다. 역사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 작은 모임의 관심이 없었으면, 아마 중원 고구려비는 아직도 그렇게 선돌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 모임에서는, 이 비에 관심을 갖고 조사를 했으나 비면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을 할 수가 없어서, 단순한 백비로 생각을 하고 넘어갔었다. 그러던 것이 회원 중 ‘충주 북 여중의 역사교사였던 장준식’ 선생에 의해서, 드디어 이 비가 천년이 넘는 세월의 베일을 벗게 된 것이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을 공부하던 그는, 이 비에 대해서 당시 단국대 박물관장이었던 호불 정영호(豪佛 鄭永鎬) 박사(博士)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마침내 1979년 4월 8일 그 천년이 넘는 역사가 오늘에 드러나게 된다.
정영호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은 석비 앞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이틀 동안 비문에 낀 이끼를 벗겨낸 후 조심스럽게 탁본을 시작한다. 이 비를 본 교수단들은 분명 “고구려비일 것이다”라는 의견을 나누면서 탁본 과정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이윽고 1차 탁본에서 ‘前部大使者’ ‘節敎賜’ ‘諸位上下’ ‘十二月甘三’ ‘募人三白新羅土內幢主下部授位使者’ ‘蓋盧供○募人新羅土內衆人’ 등의 글귀가 전면(前面)에서 나타났고, 좌측면에서는 ‘辛酉年’ ‘大王國土’ ‘東夷寐錦王’ ‘共軍至于’ ‘古牟婁城守事下部’ 등의 명문이 뚜렷하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정 단장이나 교수단은 순간 숨이 멎었다. 바로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고모루성(古牟婁城)’에 대한 부분과 고구려의 관직명인 ‘전부 대사자 제위(前部大使者 諸位)’ ‘하부 사자(下部使者)’ 등이 선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나타난 탁본의 글귀로, 이 땅에서의 고구려비가 처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감격은 가슴을 터지게 했으나,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음 작업을 초초하게 기다렸다.
바로 석비 서두 부분의 이끼가 너무 심하여 탁본에서 나타난 ‘○○대왕’이 누구인지와 ‘고구려’라는 명문(銘文)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끓인 물을 심하게 낀 이끼 위에다 부운 후, 불린 이끼 부위를 30분 간 손톱으로 한 획 한 획 긁으니 ‘고려대왕’이라고 선명하게 나타났고, 탁본을 지휘한 정 단장은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중원고구려비는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이 땅에서 발견된 최초의 고구려비며, ‘광개토호태왕비’의 발견에 비견될 수 있는 최대의 발견이었다.
당대의 학자 100여 명은 단국대에서 중원고구려비에 관한 첫 학술회의를 열고 해방 후 최대 수확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고구려 석비의 신비를 풀어 나갔다.』(중략)
전면의 비문은 거의 모두 판독되었는데 그중 중요한 부분은 서두로 다음과 같다.
"고려 건흥 4년 5월 중(高麗建興 四年 五月中) 고려대왕 조왕(高麗大王祖王) 령환신라매금야(令還新羅寐錦也) 세 위원 여형 여제(世爲願如兄如弟) 상하 상지 수천(上下相知守天) 동이지매금기태자공(東夷之寐錦忌太子共) 전부 대사자(前部大使者)....건흥 4년 5월에 고구려대왕(文咨王)의 조왕[장수왕(長寿王)]이 신라의 자비왕(慈悲王=신라 제20대 왕)을 돌려보낼 때 대대로 형제와 같이 지내기를 원하고, 상하(上下)가 수천(守天 : 하늘의 도리)할 것을 서로 약속해야 한다는 말에, 동이(東夷)의 매금(寐錦 : 신라왕)이 공손히 응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전부(前府 : 소속 부명) 대사자(大使者 : 직명) 등과 주부(主簿 : 직명) 등에게 명하여 신라 경내에서 300인을 모집케 하였더니, 고구려의 당주(幢主 : 고구려의 무관직으로 군 지휘관)로서 그 하부의 사자로 있던 자가 백제왕 개로(蓋盧 : 蓋鹵)와 서로 공모하고 신라 경내에서 사람들을 모집 동원하였다.""
중원 고구려 비문을 통하여 고구려의 공식 국호는 한자로 고려(고리)이며, 광개토태왕을 제외하고 고구려왕의 공식 칭호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대왕 이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도 중앙집권 국가를 실현한 법흥왕 이후부터 대왕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장수대왕 당시 신라지역에 고구려 군이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광개토태왕에서 장수대왕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 고구려의 속국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광개토태왕 능비에 나온 문자들이 그대로 이 석비에 나오고 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고구려왕이 신라왕을 ‘매금(寐錦 : 신라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매금’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비단과 같은 아름다운 잠자리’라는 뜻으로 상대를 낮춰 부르는 용어인데, 한술 더 떠 동쪽의 오랑캐(東夷) ‘매금’이라며 분명히 문자로 못 박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문 서두에서 보이듯 고구려왕은 형(兄)으로, 신라왕은 아우로, 상하를 분명하게 구분 명기하였다.
결국 중원 고구려비에서 나타난 사실은 오랫동안 신라군의 영내에 고구려 군이 주둔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일본서기에서도 "웅략(雄略) 8년, 즉 장수왕 52년(464년)이 정병 100인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도록 하였다. 고구려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 내의 유성(流城)에 주둔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문헌기록내용과 당시에 세운 광개토태왕비와 중원 고구려비. 호우총(壺杅塚=신라 돌무지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제사용 청동 솥 등 고고학적 사료들이 증거 하듯이 고구려가 광개토태왕에서 장수대왕 까지 100년이 넘도록 신라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신라의 모든 부분에서 직. 간접적으로 통제를 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장수태왕이 백제가 고구려 제후국인 북위에 보낸 국서 내용(북위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자를 보고 분개하여 한성백제를 초토화시키자, 위기에 빠진 신라도 신라내의 고구려 관리들을 죽이고 백제와 군사적 동맹을 맺으며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게 되면서 비로소 고구려에서 독립을 하게 되고, 고구려의 영토를 침략하는 초원 국가로써 맹위를 떨치게 된다.
나제동맹까지 파기하고 성왕까지 살해하며 한강지역까지 차지하며 서해를 통해 당나라와 교류하며 군사동맹을 맺게 되었다. 김유신「金庾信, 595(진평왕 17)∼673(문무왕 13)」은 백제에 부산 현감 조미압(租未押, 15세기 신라와 백제의 관료인 첩자)과 미인 무녀 금와((金蛙)를 투입시켜 백제의 정보를 빼 오고, 미인계를 통하여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하였다.
그리고 기고만장해진 의자왕의 총기를 흐리게 한 후 성충 등 백제 충신들을 제거하여 백제 내분을 조장한 후 당나라와 협공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권력 내분으로 고구려의 힘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가 티베트와 전쟁을 하는 동안 잠시 만주지역까지 점유했으나, 대조영의 대진국이 흥기 하자 임진강이 남으로 영토가 축소되어 고려 이전까지 신라는 완전 독립국으로 남한의 주인 자리를 차지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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