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 11. 20
[경향신문]이기환 선임기자입력 2019.11.20. 11:37
[단독] 40년 논란 충주 고구려비는 '영락7년' 명문 읽었다.
제2의 광개토대왕비가 확실
↑동북아역사재단과 고대사학회 연구자들이 읽어낸 글자들. 영락 7년, 즉 397년 광개토대왕 7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 1979년 충북 중원(충주)에서 발견된 충주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대에 세운 제2의 광개토대왕비라는 증거가 나왔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충주고구려비 발견 40주년을 맞아 오는 22일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고구려비의 연구성과와 과제를 점검하는 학술회의에서 발표문(‘충주 고구려비 판독문 재검토’)을 통해 “재단이 고대사학회와 공동으로 두차례에 걸쳐 중원 고구려비문을 최첨단 기법, 즉 3D 스캐닝 데이터와 RTI 촬영으로 판독한 결과 맨 첫머리에서 ‘397년(광개토대왕 영락 7년)’을 의미하는 연호(영락 7년) 등 8자를 읽어냈다”고 20일 밝혔다.
충주 고구려비는 발견 이후 건립연대를 두고 첨예한 논쟁을 벌여왔다. 난해하기로 이름난 비문을 판독하던 전문가들은 애초부터 광개토대왕설, 장수왕설, 문자명왕설 등 다양한 설을 주장했고, 요즘들어서는 장수왕설 및 문자명왕설이 유력한 설로 일컬어졌다.
1979년 6월9일 7시간에 걸친 고구려비 학술대회에서는 두계 이병도(1896~1989)가 “밤늦도록 고구려비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비문 전면에 ‘건흥(建興)’과 ‘4년’ 글자가 보였다”고 주장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여든이 넘은 두계(당시 83살)가 ‘꿈 이야기’를 꺼냈지만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젊은 학자인 이호영 단국대 교수는 “저는 양원(陽原)으로 읽을 수 있고, 4년이 아니라 7년으로 보고 있다”고 반박했다.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연대는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아왔다.
그러다 이번에 동북아역사재단과 고대사학회 소속연구자들이 이른바 ‘3D 스캐닝’과 ‘RTI 촬영(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을 활용해서 비문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냈다. 두 방식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360도 돌아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빛을 쏘아 글자가 가장 잘 보이는 순간 읽어내는 기법이다.
고광의 연구위원은 “두계 이병도가 읽은 부분은 비석 전문에 가로쓰기로 형태로 새겨진 제액(액자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씀)인데, 이 부분을 전문가들이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로 읽어낸 것”이라고 밝혔다.
즉 전문가들은 제액의 첫번째 글자를 ‘영(永)’자로 확정지었다. 자획의 판별이 쉽지 않지만 하부에서 ‘水’자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고, ‘水’자 우측에는 점획이 분명하고 상부에도 패인 부분을 가로지르는 획이 보이기 때문이다.
고광의 위원은 “RTI 촬영 사진과 3D 스캐닝 사진 등을 통해 전체적인 글자 형태는 ‘永’자로 확인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 글자는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에서 발견된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永’자와 비슷한 형태”라고 밝혔다,
‘永’자 좌측에도 다소 복잡한 형태의 필획들이 보인다. 이는 1500년 이상의 세월을 겪은 비석의 자연적 풍화가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흔적 지우기’의 하나로 인위적인 훼손일 수도 있다.
또 두번째 글자의 상부와 하부의 형태를 결합해 보면 전체적으로 ‘락(樂)’자에 가깝다. 상부에 ‘白’자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고 그 양옆으로 삼각형에 가깝거나 혹은 역삼각형 형태 필획들도 나타난다. 하단부에는 가로획과 세로획들이 다수 엉켜있지만 ‘木’자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고광의 위원은 “전체적으로 광개토태왕비의 ‘樂’자 형태와 유사한 결구로 보인다”고 밝혔다. 세 번째 글자는 ‘七’자가 분명했다. 가로획은 우측으로 약간 올라가는 형태이고 획의 끝 부분에서 미세한 파책의 흔적이 나타난다. 네 번째 글자는 ‘年’자이다. 두계 이병도는 마멸된 것으로 보았으나 이호영 교수는 ‘年’자로 읽었다.
이 글자 좌측 부분은 물갈이 흔적이 잘 남아 있어 필획 구별이 비교적 잘되며 2000년 고구려연구회 판독회에서도 제액의 글자 중에서 유일하게 확인했던 글자이다.
첫 번째 획은 세로가 짧은 ‘ㄴ’ 형태이고 그 아래로 3개의 가로획이 있다. 그리고 이들 필획을 중간에서 관통하는 세로획으로 구성되어 있어 광개토태왕비와 유사한 자형 결구이다.
다섯 번째 글자와 여섯 번째 글자는 ‘세재(歲在)’이다. ‘歲’자 부분은 상부의 ‘山’자 형태는 비교적 명확하고 그 아래쪽에 비스듬한 세로획들과 이 세로획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획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 출토 ‘천추만세영고명(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자형과 비슷하다. 여섯 번째 글자는 ‘在’자이다. 3D 자료를 보면 아래쪽 삐져나간 흔적은 뒤집힌 부채꼴 형태로 떨어져 나간 훼손 흔적이 분명하다.
또한 전문가들은 그 다음 글자에서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를 읽었다. 따라서 고광의 위원은 “이렇게 종서에서 횡서로 또는 횡서에서 종서로 서사 방식을 혼합하는 경우는 고대의 간독이나 서간문 등에서는 보이지만 금석문에서는 흔치 않은 사례”라고 밝혔다.
고광의 위원은 “따라서 이번에 읽어낸 글자는 8자이며,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고 전했다. 고구려에서 이러한 연호와 간지를 기재하는 방식은 광개토태왕비의 ‘영락5년세재을미(永樂五年歲在乙未)’ 등을 비롯하여 ‘건흥오년새제병진’명 금동광배 등에서도 보인다.
고광의 연구위원은 “이 충주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며 이 비석을 세운 연대는 397년 이후일 것”이라며 “따라서 이 비석의 건립연대가 광개토대왕 재위시절로 소급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중원고구려비에서 읽은 주요 내용은 ‘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이다. 즉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여형여제’, 즉 형제사이임을 영원히 맹세했다는 뜻이다
물론 고구려가 형이고, 신라가 동생이다. 또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일컬었다.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한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구려는 스스로를 천자국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폄훼한 것이다.
또 동이매금지의복(東夷寐錦之衣服)’과 ‘상하의복(上下衣服)’, ‘대위제위상하의복(大位諸位上下衣服)’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대목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고구려군의 신라 주둔과 관련된 대목이다.
즉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신라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당주(고구려 군부대의 지휘관)’라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와 신라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신라 자비왕) 때 이미 친선(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에는 신라가 왕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는 예속관계가 이어졌다. 즉 광개토대왕 2년(내물왕 37년·392년) 신라 왕족 실성(훗날 실성왕으로 등극)이 고구려 인질로 떠났다.
401년 귀국한 뒤 내물왕의 후계자가 된 신라 실성왕은 412년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인질로 보낸다. 또한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10년(400년) 신라가 왜구의 침입을 받자 고구려는 5만 보기병을 파견, 왜병을 쫓아낸 적도 있다.
하지만 424년 장수왕 12년(눌지왕 8년)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交聘)의 예를 닦았다”(삼국사기)는 기록을 끝으로 고구려·신라의 우호관계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신라가 고구려의 예속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판독이 맞다면 충주고구려비가 고구려와 신라가 형제국 사이이고, 밀월관계를 맺고 있을 때 건립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고광의 연구위원은 “그러나 아직까지 비문에 등장하는 간지 등의 해석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100% 확증할 수는 없다”면서 “향후 비문을 더 판독하겠다”고 밝혔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사진]우리나라 유일한 충주(중원) 고구려 비 - 필자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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