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구려(高句麗)

고구려 第二代 광명대제기(光明大帝記)

야촌(1) 2009. 8. 30. 23:49

■고구려 第二代 광명대제기(光明大帝記)

 

   남당유고/고구려 사초. 고구려 사락

 

   화랑세기 필사본으로 알려진 남당 박창화(南堂 朴昌和.1889~1962)가 남긴 30여권의 문집으로, <고구려사초>,

   <고구려사략>

  등 역사서의 형식을 띄고 있는 것도 있으나 나머지는 한문 소설이다. <을불대왕전>, <어을우동전> 등은 대한민국

  에서 마지막으로 쓰인 한문소설이다. 사료적 가치가 있다 없다 역사학계에서는 말도 많다.

 

●元年 壬寅, 九月, 葬先帝于<龍山>, 以遺命禁殉. <阿爾>妃生子<都[切]>. 以<禮>后爲太后. 十二月, <烏伊

     >. <黃龍王>,<> .<卑離王>.

 

   광명 대제의 원년은 임인 년(BC19)이다.

   9월, 선제(추모왕)를 용산(龍山)에 장사하고, 선제의 유명으로 순사(殉死=순장)를 금했다.

   <아이(阿爾)>비가 아들 <도절(都切)>을 낳았다. <예(禮)>후를 태후로 올렸다.

 

   12월, <오이(烏伊)>를 황룡왕(黃龍王), <마리(摩離)>를 비리왕(卑離王)으로 삼았다.

   이때 태후 <호예>39세, 광명대제 <유리>22세, <소서노>48세, <아이>21세, <오이>47세, <마리>45세, <재사>

    52세? <협보 > 32세,  <고루>17세, <온>공주18세, <온조>16세이다.

 

●二年 癸卯, 正月, 改元<琉璃光明>. <再思>太輔, <陜父>左輔・主民大加, <芬奴>右輔・主兵大加, <高婁>主

     宮大加. <屋>主穀, <勾鄒>主刑, <都祖>主藥, <松義>主賓, <仇都>主神. 三月, 閱水陸軍於<河>濱. 九月,

     與<召>后, 觀稼<西河>, 而如溫湯, 獲白獐. 十月, 鸞集新庭.

 

   2년[BC18] 계묘,

   정월, 연호를 유리광명(琉璃光明)으로 바꿨다.

   <재사(再思)>를 태보로, <협보(陜父)>를 좌보 겸 주민대가로, <분노(芬奴)>를 우보 겸 주군대가로, <고루(高

    婁)>를 주궁대가로 삼았다.

 

   <옥지(屋智)>는 곡물담당, <구추(勾鄒)>는 형벌담당, <도조(都祖)>는 의약담당, <송의(松義)>는 보빙담당, <구

    도(仇都)>는 제신 담당 대가의 일을 맡았다.

 

   3월, 하(河)변에서 수군과 육군을 사열하였다.

   9월, <소(召)>후와 함께 서하(西河)땅의 농사를 살피고, 온탕엘 가서 흰 노루를 손에 넣었다.

   10월, 란새가 궁궐의 새 뜰에 모였다. 황후가 딸 <진>공주를 낳았다.

 

●三年 甲辰, 正月, 以<順奴>・<絶奴>爲<沸流>治, 都<彌鄒忽>. 以<灌奴>・<桂婁>爲<溫祚>治, 都<牛壤>. <

     涓奴>・<黃龍>・<荇 >・<茶>・<卑離>, 上與<召>皇后治之, 以慰<召>后之心. 三月, 納<禾姬>. 五月, 與太

     . 皇后, 如<海山>, [좌石우族]而還. <東明神宮>成. 七月, 以<松>氏爲妃. 作<鶻川>離宮, 上與<召>皇后・

     <溫>公主居之. <汗南王><溫>, 入朝, 請移都于<尉那城 >, 許之. 十月, <溫>公主崩, 春秋二十. 上食二

     日, <召>皇后慰止之.

 

   3년[BC17] 갑진

   정월, 순노(順奴)・ 절노(絶奴)는 <비류>가 미추홀(彌鄒忽)에서 다스리게 하고, 관노(灌奴)・ 계루(桂婁)는 <온조

    (溫祖)>가 우양(牛壤)에서 다스리게 하였으며 연노(涓奴)・ 황룡(黃龍)・ 행인(荇人)・ 구다(句茶)・ 비리(卑離)는

    상이 <소>황후와 함께 다스리기로 하여서 <소>후의 마음을 위안하였다.

 

   3월, <화희(禾姬)>를 거둬들였다.

   5월, 태후 및 황후와 함께 해산(海山)엘 갔다가 소금과 돌화살촉을 가지고 돌아왔다. 동명신궁(東明神宮)이 완성

   되었다.  7월, <송(松)>씨를 비로 올렸다. 골천(鶻川)에 이궁을 짓고, 상이 <소>황후 및 <온(溫)>공주와 함께 기

   거 하였다. 

 

   한남왕(汗南王) <온조>가 입조하여 위나성(尉那城)으로 도읍을 옮기겠다고 청하여서, 허락하였다.

   10월, <온(溫)>공주가 나이 스물에 죽어, 상이 이틀을 감식했더니, <소>황후가 위로하며 그만하시라 하였다.

 

   그림11. “<비류>의 초기치도 <미추홀(彌鄒忽)>은 <흥제(興濟)>, <온조>의 초기치도 <우양(牛壤)>은 <우산(牛

   山)>주변평지인 <임치(臨淄)> 또는 <제(齊)>, <온조>의 <위나성(尉那城)>은 <제하(濟河)>남변 <제남(濟南)>

   지역, <해산(海山)>은 <낭야산(琅邪山)>정도, <한수(汗水)>는 <상간하(桑干河)>. <온조>가 <한남(汗南)>땅

   을 헌납하고 남하하여서, <신라>무리는 <배미산(陪尾山=舟尾山)>주변에서 다시 남하하였다.”고 추정해 볼

   있다. ⇒<동국여지승람><공주/웅주>부분 대조 권장됨.지리명이 유사한 음가나 뜻의 글자로 바뀌었다고 추정

   할 수도 있음)

 

●四年乙巳, 二月, 勸耕巡戍. 八月, <劉河>蚕師. 九月, <馬>公主及<雉姬>入宮. <平>氏生女. 十二月, <芬奴>

    伐<北沃> ・<敦河>平之.

 

   4년[BC16] 을사,

   2월, 농경을 권장하며 수자리를 순시했다.

   4월 황후가 <불>을 낳았다.

   7월 후와 같이 동쪽을 돌면서 어루만졌다. <시길>이 차거보합옥마산호를 바쳤다.

   8월 <비류>와 <온조>가 입조하였고 <유하(劉河)>를 잠사로 삼고 누에치기를 가르쳤다. 송씨가 아들 <도조>를

   낳았다.

   9월, <마(馬)>공주와 <정공>의 딸 <치희(雉姬)>가 입궁했다. <평(平)>씨가 딸 <준>을 낳았다.

   12월, <분노(芬奴)>와 <구추>가 북옥저의 돈하(敦河)를 쳐서 평정하였다.

 

●五年丙午, 正月, 以<香>公主妻<高婁>. 三月, <紫蒙>王<涉臣>女<皐豆{=皐頭}>妻<乙豆智>, <曼>公主妻<

     沸流>. 置車騎府.  五月, 互市<溝婁>. 八月, 與<召>后, 勸稼<西河>獎十羊五豕. 十月, 大閱<滸口>.

 

   5년[BC15] 병오,

   정월, <향(香)>공주를 <고루(高婁)>의 처로 삼았다.

   3월, 자몽(紫蒙)왕 <섭신(涉臣)>의 딸 <고두(皐豆)>를 <을두지(乙豆智)>의 처로 삼고, <만(曼>계루의 딸>공주

   를 <비류(沸流 >의 처로 삼았다. 화씨와 치씨가 양곡으로 이사했다. 동해의 신마의 7천필을 사고 차기부를 설치

   했다. <을두지>를 장군 겸 어가 주부로 삼았다.

 

   5월, 구루성(溝婁城)=쌍산)에 한인과 교역하는 호시(互市)를 열었다.

   8월, <소(召)>후와 함께 서하(西河)에서 농사를 권장하고, 양 열 마리와 돼지 다섯 마리씩 키우기를 장려하였다.

   10월, 호구(滸口)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만>공주가 <비류>의 자식 <양인>을 낳았다.

 

●六年丁未, 四月, 增「漢舘」, 而招一技者, 厚祿給妻. 爲<松>妃築<豆谷>行宮. 七月, 拔<蓋馬城>,虜其王<小

    噲>, 約貢牛馬.

   6년[BC14] 정미,

   황후가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4월, 서하와 하빈에 한관(漢館)의 수를 늘리고, 한가지 기술에라도 능통한 자는 불러들여서 후하게 녹봉을 주고

   짝도 지어 주었다.  <송(松)>비를 위해서 두곡(豆谷)에 행궁(行宮)을 지었다.

 

   7월, 개마성(蓋馬城)을 빼앗고, 그 곳의 왕 <소쾌(小噲)>를 붙잡았더니, 매년 양 오천마리와 소와 말 각 2백 마리

   를 바겠다고 약속 했다.<아이>후가 딸 <진(眞)>을 낳았다.

 

●七年戊申, 正月, <艴>太子薨, 四歲. 皇后如<汗南>. 五月, <解明>生. 上, 如<汗南>, 迎后而歸. 有<魚遊詞>.

    7년[BC13] 무신,

   정월, <불(艴)> 태자가 네 살에 죽었다.

   4월 황후가 한남(汗南)으로 갔다. 이로서 <구추>를 현토태수로 삼았고 경계하여 성을 지켰다.

 

   5월, <송>비가 두곡에서 <해명(解明)>을 낳았다. 상이 한남으로 가서 황후를 맞이하여 돌아왔다. 

   어유사(魚遊詞)라는 노래가 생겼다. <화씨>가 <도>공주를 낳았다. 황후가 한남으로 가자 유리가 자신의 심복인

   구추토태수로 삼았다는 내용인데 그 이전까지는 황후의 모사격인 을음이 태수로 있었는데 직위를 박탈하였

   다는 것이다.

 

●八年己酉, 五月, <柴吉>子<昌特>立. <翊>公主入宮.

   8년[BC12] 기유,

   5월, <시길(柴吉)>이 죽어 아들 <창특(昌特)>이 섰다. <익(翊)>공주가 입궁하였다.

 

●九年庚戌, 四月, 田于<箕山>七日, 得眞珠於<桂>后陵, 返于<凉谷(鶻川行宮)>. <雉姬>, 與<禾姬>相罵, 而

    去. <雉>, <共> 女也. 家在<汗>濱上, 追之樹下, 有<黃鳥詞>. 八月, <素奴>女<可治>妻<羊>太子. 太輔<

    房良>請退, 不許.

 

   9년[BC11] 경술,

   4월, 기산(箕山)에서 7일간 사냥을 하다가, <계(桂)>후의 무덤가에서 진주를 주워서 량곡(凉谷) 골천행궁)으로

   돌아왔다. <치희(雉姬)>가 <화희禾姬>와 서로를 욕하다가 친정으로 돌아갔다. <치희(雉姬)>는 <정공(鄭共)>

   의 딸이었고, 친정집은 한(汗) 수변 위쪽에 있었다. 그녀를 뒤쫓아 가다가 나무 밑에 이르러서 황조사(黃鳥詞)를

    지었다.

 

   8월, <소노(素奴)=비리왕)가 딸 <가치(可治)>를 <양(羊)>태자에게 처로 주었다. 태보 <대방량>이 물러나겠다고

   청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양>태자는 황룡국 <보득>의 딸 <화>소비의 아들이다.

 

●十年辛亥, 正月, <沸流>太輔. 四月, 鍊于<南口>. <解術>生.

    10년[BC10] 신해,

   정월, <재사>가 죽어 <비류(沸流)>를 태보로 삼았다. <송>비가 여아 <목>을 낳았다.

   <섭신=자몽국왕>이 그 아들의 혼인을 청하였는데 공주가 어리다고 답하여 화목을 잃었다.

   4월, 남구(南口)에서 군사를 훈련하여 개마와 자몽국에 대비하였다. <화>씨가 아들 <해술(解術)>을 낳았다.

 

●十一年壬子, 四月, <涉臣>反, <芬奴>拔其都城(昆都), <臣>南莽. <雉姬>・<鵲姬>皆生女.

   11년[BC9] 임자,

   4월, <섭신>이 반란하여, <분노(芬奴)>가 그의 도성을 쳤더니, <섭신>은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치희(雉姬)>가

   딸 <정>을 낳고   <작희(鵲姬)>가 딸 <와>를 낳았다.

 

●十二年癸丑, <漢>, <驁>, 無子, 以其侄<欣>爲太子.

   12년[BC8] 계축,

   한(漢)의 <유오(鷔=成帝)>가, 아들이 없어, 조카 <유흔(欣=哀帝)>을 태자로 삼았다.

   2월 <송>비가 여아 <은>을 낳았다. 황후가 <람>공주를 낳았다.

 

●十三年甲寅, 正月, <阿爾>后崩, 春秋三十三. 后, 皇后前夫<仇台>女也. 性溫慈貞敏, 生<都切>太子及三公

     主. <金蛙>王殂, <帶素>立.

 

   13년[BC7] 갑인,

   정월, <아이(阿爾)>후가 춘추 서른에 죽었다. <아이>후는 <소>황후 전 남편 <구태(仇台)>의 딸이다.

   성품은 따뜻하며 자애롭고 정숙하며 영리하였고, <도절(都切)>태자와 공주 셋을 낳았다. 

   <금와(金蛙)>왕이 죽어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한>공주(한소의 딸 평씨의 딸)을 거두었다. <송>비를 후로 삼았다. <온조(溫祚)>가 동명묘를 세웠다.

     <금와(金蛙)>가 죽은 것과 <온조>가 동명묘를 세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온조는 금와의 서자 우태의 아들이다.

 

●十四年乙卯, 正月, <都切>如<柵城>娶<帶素>女. 七月, <溫祚>立柵于<漢山>, 以<再思>公主妻之. 十月,

      <帶素>, 引五萬軍入寇<松江(通江}{松花江?}>, 大雪七日, 凍死者十九, 悔不聽<觧素>之諫.

 

   14년[BC6] 을묘,

   정월, <도절(都切)>이 책성으로 가서 <대소(帶素)>의 딸과 혼인하였다.

   7월, <재사(再思)>공주를 <온조(溫祚)>에게 처로 주었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 땅에 목책을 세웠는데 아

   마도 남진의 뜻이 있었다.왕이 황후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짐과 경(황후)은 서쪽으로 나아가고, <온조>와 <재사

   >는 남진으로 나아 가는 것은 선제(추모왕)의 영혼이 있으면 기뻐할 것이다. 이때는 <재사>가 비류의 비(妃)가 되

   어있던 까닭이다.

 

   10월, <대소>가 5만군을 끌고 들어와 송강에서 노략하다가 큰 눈이 7일간을 내려서 얼어 죽은 이가 열에 아홉이

   되자,  <해소(觧素)>의 간언을 뿌리친 것을 후회하였다.

-------------------------------------------------------------------------------------------------------------------------------------

[참고 1]

◈온조13년[BC 6]

   봄 2월에 서울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나이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

   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漢水)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8월에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 (走壤)

  이르다.

 

   9월에 성과 대궐을 수축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도절(都切)>太子의 어머니는 <아얼(阿爾)>后이며, <소서노(召西奴)>가 낳은 <우태(優台)>의 딸이다.

   <유리(類利)>太子는 그녀를 맞아들여, <도절(都切)>과 딸 5명을 낳았다. 

   그 리고 나서 유리 13년(BC7년)에 <아이>후는 세상을 떠났다.

 

   <아이>후가 세상을 떠나자 <유리>는 <도절>을 부여에 인질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소서노>는 <도절>의 동부여 인질을 반대하였고 <유리>세력과 일대 혈전을 벌린다.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투구를 입고 군사를 지휘하는 소

   서노와 그녀를 호위 하는 다섯 명의 중신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유리>가 왕권을 강화하고자 <소서노>의 세력을 제거코자 하니 <소서노>와 그의 중신들이 이에 저항하다가 결

    국 <소서노>는 죽게 된다.

 

   <소서노>는 BC 66년에 태어나서 BC 6년에 61살의 나이로 죽은 것이다.

   고구려는 <소서노>의 죽음을 <예>태후가 죽은 해(AD 28)에 <유리>와 함께 죽은 것으로 슬쩍 집어넣어 은폐하려

   하였다.

 

◈유리14년[기원전 6]

   봄 정월에 부여 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서 방문하여 문안하고 인질을 교환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인질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으

   므<대소>가 화를 냈다.

 

   겨울 11월에 대소가 병력 5만으로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이 많이 얼어 죽으니 이에 돌아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도절>은 하는 수 없이 동부여에 인질로 가고 <소서노>의 졸본세력이 제거되자 동부여의 <대소>가 고구려를 침

   공 다.

 

●十九年庚申, 八月, <託利>・<斯卑>傷逸豕于<長屋澤>, 命坑之. 而不豫, 皇后與巫跌禱謝之. <武骨>左輔, <

    高婁>右輔. <漢>,  <欣>死. 從弟<衍>立, <董賢>夫妻自殺, <王莽>女專政.

 

   19년[BC1]경신,

   8월, <탁리(託利)>와 <사비(斯卑)>가 달아난 제사희생용 돼지를 장옥택(長屋澤)에서 상하게 하였기에, 그들을

   땅에 으라고 명하였다. 이후 상의 목숨이 위중하여 졌더니, 황후와 무당이 <탁리>와 <사비>를 땅에 묻어 죽인

   제의 잘못빌고 사죄하였다.

 

   <무골(武骨)>을 좌보로, <고루(高婁)>를 우보로 삼았다. 漢에서는 <애제><흔>이 죽고, 종제[4촌동생]인 <평제>

   . <연 >이 섰다.  <동현>부처가 자살하고, <왕망>의 딸이 정사를 도맡았다.

 

●二十年辛酉, 正月, <都切>太子, 自<柵城>歸未幾, 薨. <帶素>, 自愧其失, 而還<都切>而留其女, 故<都切>

    悲傷不起. 五月, <沸 >薨, 年三十七. 上, 減食以慰皇后, 以<阿爾>女<眞>公主妻<沸流>子<昜人>. <曼>公

   主改嫁于<都助>. <陜>太輔. <大房良>薨, 年八十二. 賜其妻<掩>公主年穀.

 

   20년[AD1] 신유,

   정월, <도절(都切)>태자가 책성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으니, <대소(帶素)>는 이 일을 자괴하여, <도절>의 시신

   은 려 보내고, 딸은 데리고 있으려 하였더니, 죽은 <도절>이 슬퍼하며 일어나지 않았다.

 

   5월, <송>후가 <두>공주를 낳았다. <비류(沸流)>가 37살에 죽었다. 상은 감식하며 <소>황후를 위로하였고, <아

   이(阿爾)>의 딸 <진(眞)>공주를 <비류>의 아들 <양인(昜人)>에게 처로 삼아 주었다.

 

   <만(曼)>공주가 <도조(都助)>에게 개가하였다. <협보(陜父)>를 태보로 삼았다. 태보 <대방량(大房良)>이 82살

   에 죽었다. 그<엄(掩)>공주에겐 매년 양식을 주도록 하였다.

 

   그림12. 현금 <북경> 동북에 <사물택{沙勿澤}>과 유사한 유일한? 지리명인 <사물촌{沙勿村}이 있다.

 

●二十一年壬戌, <絶奴>掌牲<薛支>遂逸豕, 至<國內><尉那岩>, 見麋鹿魚富裕, 宜五穀, 多茂林大樹, 藥

    泉, 神山, 以爲可都地. 三月, 謁上, 請建都. 四月, 畋于<尉中林(在尉那岩近地)>, 與皇后, 相都于<國內(解

    慕漱與柳花相逢故曰國內)>. 九月,與皇后,又如<國內><熊心>・<合歡>・<尉那岩>等地, 而仍遊<沙勿澤>,

    訪隱者<位沙勿>于澤畔石. 上載而歸, 皇后曰: “山間賤夫, 何用.” 上曰: “不然, <伊尹>・<呂尙>, 皆此類也.”

    以<玄>公主爲<鵲>太子妃. <再思>公主生<溫祚>子<多婁>.  <漢>, <衎>以<王莽 >女爲妻. <莽>召又■■

    女■, ■居次.

 

   21년[AD2] 임술,

   제사 희생물을 관장하는 절노(絶奴)부의 <설지(薛支)>가 도망간 돼지를 좇아 국내(國內)의 위나암(尉那岩)에

   다다랐니, 큰사슴 작은 사슴 물고기가 풍성하고 넉넉하며, 오곡을 가꾸기 적당하고, 무성한 숲과 큰 나무가 많

   고, 약수가 샘고, 신성한 산이 있어, 도읍으로 하기에 합당한 곳임을 발견하였다.

 

   3월에 상께 도읍을 세우기를 주청하였다.

   4월, 위중림(尉中林)으로 사냥을 나가서, 황후와 함께 국내가 도읍으로 삼기에 어떠한 지를 살폈다.

   9월, 황후와 함께 국내의 웅심(熊心)・합환(合歡)・위나암(尉那岩)등의 땅을 살피러 갔다가, 사물택(沙勿澤)을 유

   람하고, 하고 있던 사람 <위사물(位沙勿)>을 늪의 반석으로 찾아가서 만났다.

 

   상이 이 사람을 태우고 돌아왔더니, 황후가 “산속에 사는 미천한 사내를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상은  “그렇지 않소. <이윤>이나 <여상(呂尙)>도 이와 같은 사람이었소.”라 답하였다.

    <현(玄)>공주를 <작(鵲)>태자의 비로 삼았다.

 

   <재사(再思)>공주가 <온조(溫祚)>의 아들 <다루(多婁)>를 낳았다. 漢의 <연>이 <왕망>의 딸을 처로 삼았다.

   <왕망 >은 또 ■■의 딸■을 불러들였다. ■는 둘째 처가 되었다.

 

●二十二年癸亥, 十月, 移居<尉那岩>, 是爲「北都」. 作新宮於<銀川岺>下. 十二月, 田于<質山>陰, 五日不

    返. <陜父>諫 :  “之畋在於鍊兵. 今, 風雪如此, 暴露獵騎而行樂, 可乎”. 上, 以<陜父>初附於<沸流>, 有

    蘊意, 至是, 罷之. <陜父>海入 <新羅>.

 

   22년[AD3] 계해,

   10월, 위나암(尉那岩)으로 이거하니, 이곳이 북도(北都)이다. 은천령(銀川岺) 아래에 주류신궁을 지었다.

   12월에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며 닷새가 되어도 돌아가지 않았다.

 

   <협보(陜父)>가

   “천자가 사냥을 함은 병사를 훈련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풍설에 사냥마를 심하게 내돌려서 행락하심이 가당하

   신지요?”라 아뢰었다. 상은, 비류(沸流)에서 <협보(陜父)>를 처음 만나고서부터 마음속에 쌓여 온 것이 있었는

   데,  이렇게 되자, 그를 파면하여 정원을 관리하는 소형으로 삼았다. <협보(陜父)>는 작은 배로 물을 건너 신라

   (新羅)로 들어갔다.

 

●二十三年甲子, 二月, 以<解明>爲東宮. 宝算十七. 母, <松>后, 夢鸞乘日, 而出. 性英明好勇, 形皃亦多肖

    上, 故以皇后女 <珍> 公主妻之, 大赦國中. <松>后生<無恤>于<銀川>新宮, 朱光炤室, 故名宮曰<朱留>,

    白鶴盤回岺上, 故名岺曰<鶴盤>. <鵲>太子浮海入<新羅>.

 

    23년[AD4] 갑자,

   2월, <해명(解明)>이 동궁이 되었다. 보령 열일곱이었고, 모친 <송(松)>후가 란새가 해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르

   는 꿈을 꾸고서 낳았다. 성품은 영명하며 씩씩하고, 얼굴도 상을 많이 닮았다. 

  이에 황후의 딸 <진(珍=유리와 아이후의 소생) 공주로 처를 삼아 주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널리 풀어 주었다.

 

 왕과 황후가 동궁(해명태자)과 동궁비(진공주)를 데리고 온탕에 가서 졸본척신(소서노 계열)과 비류척신(송양계

 열) 30명과 잔치를 열었다. <송(松)>후가 은천(銀川)의 새 궁전에서 <무휼(無恤)>을 낳았다.

‘붉은 빛이 실내를 비췄다.’하여 궁의 이름을 주류(朱留)궁이라 하였고, ‘흰 학이 고개 위를 선회하였다.’하여 고개

이름을 학반령(鶴盤嶺)이라 하였다.

 

 <작(鵲)>태자가 물을 건너서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해명>태자와 <진>공주의 결합으로 동궁이 강해져서 더 이

  상 <작>태자로서는 어떤 희망도 없게 되므로 신라로 떠나게 되는데 초기의 신라는 지금의 경주에 있지 않다는 것

  이고, 낙랑과 신라는 매우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13. <은천령(銀川岺)>이 <은산(銀山)>고개이고, 옛 <은산(銀山)>이 현금의 <은산>이라면, 그 <은산> 남쪽

 엔 행궁이 두 개가 있는데, 모두가 <고려영> 지근의 거리에 있다. 같은 지도의 <적봉>서방엔 <은천(銀川)>과 유사

  한 <은하천(銀河川)>도 있으며, 또 다른 군사지도상의 <고려영> 서11Km쯤엔 <소탕산>도 있다.

 

●二十四年乙丑, 九月, 田于<箕山>, 得<羽澤>, 妻以<鱒>公主. 有畜獸才.

 

   24년[AD5] 을축,

   9월, 기산(箕山)에서 사냥하다가, <우택(羽澤)>이라는 사람을 얻었고, <준(鱒)>공주를 처로 삼아 주었다.

   짐승을 길들이고, 가두어 기르는 재주가 있었다.

 

●二十六年丁卯, 四月, <解邑朱>生. <溫祚>移居<漢山>. <帶素>兄弟八人爭立相殺. 遣兵及粮于<溫祚>, 以

     助伐<韓>. 三年継

 

   26년[AD7}] 정묘,

   4월, <송>후가 <해읍주(解邑朱)>를 낳았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 땅으로 이거하였다. <대소(帶素)>의

   형제 여덟이 보위를 다투며 서로를 죽였다. <준>공주가 아들 <진(眞)>을 낳았다. 병사와 식량을 보내서 <온조>

   의 한(韓) 정벌을 도왔다. 3년을 계속하였다.

 

 

[참고 2]

온조왕 24년(A.D.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

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

을 헐어버렸다.

 

◈온조왕 25년(A.D.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

  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

  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辰韓)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온조왕 26년(A.D.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

  을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

  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온조왕 27년(A.D.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는 남하하여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AD 6~9년까지 마한을 정벌한다.

 

●二十七年戊辰, 三月, 賜<觧明>死. 是年二十一. <黃龍王><烏伊>以宝弓授<觧明>. <解明>, 折之, 曰;“非我

    有力也. 弓勁.” <烏伊>大慙. 皇后奏, 曰;“<解明>, 不愛其妻, 而侮辱國老. 陛下, 何不責之.” 上, 乃召<

    觧明>責之, 曰;“不愛<珍 >女, 違父母也. 侮辱國老, 輕社稷也. 交通後宮, 淫亂之兆也. 寧其生, 不若死.” <

    觧明>, 悲憤, 立槍於<礪津>而死. 國人愛其好勇而死. <新羅 >, 以女妻<鵲>太子. <溫祚>遷都<漢山>. 七月,

   <都助>太子薨, 年二十四, <觧明>之胞兄也. 性肖其外祖<松讓>, 妄自誇張累被叱責. 見<觧明>之死, 慾爲

    東宮, 使其妻<曼>公主請于上. <曼>, 曰;“在自修, 而不在請.” 煩悶自焦, 觸暑而吐歐, 不起. 時, 人曰; “勇亦

    死, 懦亦死.”

 

  27년[AD8] 무진,

  3월, <해명(觧明)>을 자진하게 했다. 이때 21살이었다. 황룡왕 <오이(烏伊)>가 보궁(宝弓)을 <해명>에게 주었

  더니, <해명>이 이를 부러뜨리고서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고 활이 튼튼하질 못했소.”라고 하였더니, <오이>는

  엄참담하였다.

 

 황후가 “<해명>은 자기 처를 아끼지 않고, 나라의 노신을 모욕하였는데도, 폐하는 어찌 <해명>을 꾸짖지 않으십

 니까?”라 주청하니, 상은 <해명>을 불러서 “<진(珍)>녀를 아끼지 않음은 부모를 거역함이며, 나라의 노신을 모

 욕함은 사직을 가벼이 함이고, 후궁들과 교통함은 음란 할 징조이다. 정녕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겠다.”라고

 책망 하였더니, <해명>은 비참하고 억울했으나 려진(礪津)에서 창을 꽂아놓고 자진하였다.

 

 동원에서 장사를 지냈고 묘를 세웠는데 창원이라고 불렀다. 나라사람들이 슬퍼하여 용감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

 고 하였다.  신라(新羅)가 왕녀를 <협보>에게 처로 주었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 땅으로 천도하였다.

 

 7월, <도조(都助)> 태자가 죽었다. 24살이었다. <해명>의 동복형으로, 성품은 외조부 <송양(松讓)>을 닮아서, 

 자신을 과시하다 여러 번 질책을 받았다. <해명>이 죽은 것을 보더니 동궁이 되고자, 자기 처 <만(曼)>공주에게

 상께 청하라 하였더니, <만>공주 “동궁자리는 스스로를 닦아서 차지하는 것이지 달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

 다.”라 하자, 번민하여 스스로 달아오르더니온 몸이 불덩이가 되어 토악질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

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용감해도 역시 죽고, 나약해도 역시 죽음뿐이다.”라고 하였다.

 

●二十九年庚午, 六月, 赤蛙攻黑蛙于<茅川>, <鏖>之人以爲<帶素>敗亡之兆. <再思>公主來朝而去. <鵲>太

    子爲<新羅> 太輔.

 

     29년[AD10] 경오,

    6월, 모천(茅川)에서 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였더니, 오(鏖)땅의 사람이 <대소(帶素)>가 패망할 징

    조라 하였다.

   <재사>공주가 그 아들 <다루>와 더불어 조정에 와서 상이 무당에게 명하여 <다루>에게 복을 기원했다 5일후에

   돌아갔는데 왕이 손수 한남까지 배웅하였는데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협보>가 신라(新羅)의 태보가

   되었다.

 

●三十一年壬申, 七月, ※<漢>人<田譚>, 與<索頭>相爭, 請救於<勾鄒>. <勾鄒>, 使<延丕(召后侄子)>擊<譚

    >殺之, <嚴>來寇, 虜其將卒二千餘・馬仗無數・印顆十二, 拓地七百餘里. 十月, 以<昜>公主妻<乙豆智>.

 

   31년[AD12] 임신,

  7월, 한(漢)인 <전담(田譚)>이 색두(索頭)와 싸우다가 <구추(勾鄒)>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구추>가 <연비

  (延丕 =소후의 조카)>를 보내서 <전담>을 공격하여 죽였더니, <엄우(嚴尤)>가 쳐들어왔기에, <엄우>의 장졸 2천

  을 사로잡고 무수한 병마와 병장기 및 인과 12개를 노획하였으며 땅도 7백여 리를 빼앗았다.

 

 10월, <을두지>의 비 <고두>가 죽었다. 이 때문에 <양(昜)>공주를 <을두지(乙豆智)>의 비로 삼았다.

 자몽국왕 <섭신>은 딸 <고두>를 <을두지=추모와 화비의 소생)에게 주어 화친을 하였으나, <섭신>의 아들의 혼사

 로 유리에게 딸을 달라고 하였으나 딸이 어리다는 이유로 혼담을 거절하여 화친을 잃었으나 이 시기엔 공동의 적을

 물리치 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三十三年甲戌, 正月, 以<無恤>爲東宮, 敎以弓馬用兵之術. 七月, 以<豆>公主妻<高婁�>. 八月, <烏伊

    >, 領兵二萬, 伐<涉臣>, 拔<勾麗城>, 虜<涉臣>而歸. <紫蒙>十二國悉平. 十月, <摩離>, 亦引兵二萬, 拔

    <貊窟>・<貝沙>, 而還. <帶弗>殺<帶素>而自立(弗, 帶伯之子, 一作金蛙子).

 

 33년[AD14] 갑술,

 정월, <무휼(無恤)>을 동궁으로 삼고, 활쏘기 및 말 타기와 용병술을 가르쳤다.

 7월, <두(豆)>공주를 <고루(高婁)>에게 처로 주었다.

 8월, <오이(烏伊)>가 군사 2만을 이끌고 <섭신(涉臣)>을 쳐서 구리성(勾麗城)을 빼앗고, <섭신>을 사로잡아 돌

 아왔다. 자몽(紫蒙) 12국을 모두 평정한 것이었다.

 

 9월 상이 <람>공주=유리와 아이후의 소생)와 온탕에 갔다.

 10월, <마리(摩離)>가 군사 2만을 이끌고 맥굴(貊窟)과 패사(貝沙)를 쳐서 그 땅을 빼앗고 돌아왔다.

 <대불(帶弗)>이 <대소(帶素)>를 죽이고 보위에 올랐다.

 

●三十七年戊寅, 四月, <觧術>溺死<礪津>, <祭須>尋其尸, 葬<王骨岺>. 七月, <烏伊>薨. <宝得>子<毛獜>

     立. <伊>之婿也.

 

    37년[AD18] 무인,

   4월, <해술(觧術)>이 려진(礪津)에서 익사하였다. <제수>가 그 시신을 찾았으며, 왕골령(王骨岺)에 장사하였다.

   <해술>은  <화>씨의 자로 성품이 부녀자 같았으며, <해명>을 사모했던 <진>공주(해명의 처)도 따라 죽었다

 

  7월, <오이(烏伊)>가 죽고 <보득(宝得)>의 아들 <모린(毛獜)>이 섰다. <모린>은 <오이>의 사위이다.

 

  ※☞ 이하 <삼국사기>와 편년에 차이 있음.

  <오이>는 책성 욕살(태수) <오문>의 자이다. 동명의 으뜸공신으로 큰 뜻이 있어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슬퍼하고

  한탄하였는데,  이 때문에 <해명>의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이에 또 <해술>의 일을 보고 병을 얻었다. <해명>

  과 <양길>의 꿈이 누적되어 심하게 놀라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참고 3]

◈유리명왕 37년[A.D.18]

  여름 4월,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슬퍼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시체를 찾게 하였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

  하였다. 그 후, 비류사람 <제수>가 시체를 찾았다고 알려왔으므로, 곧 예식을 갖추어 왕골령에 장사지내고, 제수

  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주었다.

 

 가을 7월, 왕이 두곡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두곡 이궁에서 죽었다. 두곡 동원에 장사지내고, 호를 유리명

 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이 해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유리명왕이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온조>의 구데타로 <유리>와 <오이>,

 <해명>,<해술>죽은 것이다. 고구려는 온조의 반정을 숨기기 위하여 <해명>과 <해술>이 자살한 것으로 은폐

 히였다.

 

●三十八年乙卯, 正月, 「北都」大震, 移于「東都」. <黙居>太輔.

  38년[AD19] 을묘,

  정월, 북도(北都)에 큰 지진이 있었기에 동도(東都)로 이거했다. <묵거(黙居)>를 태보로 삼았다.

 

三十九年庚辰, 三月, <東明神廟><龍山>中岺. <再思>公主與<多婁>來朝, <><>兩公主妻<

     婁>, 而賜正胤冠釼, <汗南>傳國之璽. 九月, 田于<骨句川>, 東宮得神馬, 狀如<巨婁>. 上曰;“<東明>

     復興之兆. 十月, <扶余>獻赤烏一頭二.

 

 39년[AD20] 경진,

 3월, 용산(龍山)의 가운데 고개에 동명신묘(東明神廟)를 세웠다. 

 재사(再思) 공주와 다루(多婁)가 궁에 들어왔기에, <선(蘚)>・<백(苩)> 공주 둘을 <다루>의 처로 삼아 주고, 정윤

 관인(正胤冠釼)을 주어서, 한남(汗南)[국]의 전국옥새(傳國玉璽}로 삼게 했다.

 

 9월,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 동궁이 거루(巨婁)를 닮은 신마를 얻었더니, 상이 “동명(東明)이 부흥할 징조

 로구나.”라 하였다.

 

 10월, 부여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 달린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온조>의 반정을 축하하기 위하여 동부여가 머

 리하나에 몸이 둘 달린 붉은 까마귀를 보낸 것이다.

 

●四十年辛巳, 二月, <摩離>薨, 子<義鹿>立. 其母<素奴>女也.

 

 40년[AD21] 신사,

 2월, 비리왕인 <마리(摩離)>가 죽었는데 나이 84세다, 아들 <의록(義鹿)>이 섰다. <의록>의 어미는 <소노(素

 奴})>의 딸이었다.

 

●四十一年壬午, 七月, <劉秀>起兵{伐}<王莽><新>■■■從之. 九月, 戊申朔, 斬<王莽>於<浙臺>.

 

   41년[AD22] 임오,

   7월, <유수>가 군대를 일으켜 <왕망>의 <신>을 토벌하였다. ■■■가 그를 따랐다.

   9월, 무신일 초하루, <왕망>이 절(대)에서 참수 되었다.

 

●四十二年癸未, 十一月, <帶弗>來侵. 大破其軍於<鶴盤岺>下. 

※대불(帶弗)이 아니고, 대소(帶素)이다.

   42년[AD23] 계미,

   11월, <대불(帶弗)>이 쳐들어왔기에, 학반령(鶴盤岺) 아래에서 그 군대를 크게 쳐부쉈다.

 

●43년[AD24] 갑신

    2월 왕과 왕후가 태후의 장수를 빌러 동도로 가서 동명의 큰 제사를 지냈다. 묵거가 죽었는데 나이가 82세였다.

 

●四十四年乙酉, 二月, <高婁>太輔, <松義>左輔, <乙豆智>右輔・主兵.

    44년[AD25] 을유,

    2월, <고루(高婁)>를 태보로, <송의(松義)>를 좌보로, <을두지(乙豆智)>는 우보 겸 주병대가로 삼았다.

 

●四十七年戊子, 八月, 太后崩, 春秋八十五. 葬於<豆谷>東原. 十月, 上, 與皇后, 崩于<豆谷>離宮. 上春

     秋六十八, 皇后八三. 皆葬于太后陵內. 東宮卽位於<豆谷>離宮.

 

  47년[AD28] 무자,

  8월, <예태후>가 춘추 여든다섯에 죽어, 두곡(豆谷) 동쪽 언덕에 장사했다.

 

 10월, 상과 황후가 두곡 별궁에서 죽었다. 상은 춘추 예순 여덟이었고, 황후는 춘추 여든 셋이었다. 

 둘 다 태후 릉 경내에 장사했다. 동궁(東宮)이 두곡리궁(豆谷離宮)에서 즉위(卽位) 하였다

 

◈論曰 “光明嚴毅 少許謹於守成 勸於擢才 治天下四十年 兵精粮足 可謂賢矣 陜父解明召后之事 皆有欠

焉” 론(論) 하길,

 “광명(光明)은 엄숙하고 굳세어 수성(守成)함에 삼가 함이 적었으며, 인재 발탁을 권장하여 천하를 40년간 다

 스렸다.  군사는 날래고 양식은 풍족했으니 가히 현명하다 할 만하였다. 협부(陜父), 해명(解明), 소후(召后)의

 일에는 모두 흠(欠)이 있었다.”  

 

[참고 4]

◇유류기에서는 유리왕은 65살. 왕후는 83살로 기록되었으나

  유리왕은 55살 사망, 왕후는 73살 사망일 듯으로 여겨짐.

 

◇유리왕의 황후(皇后)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지 않으나, 추모경에 나와 있는 소서노의 나이와 같고, 

     백제왕기와 삼국사기 백제본기 소서노의 사망시기와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 해에 온조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남당유고 저자 소개

    저자 : 박창화(朴昌和)

 

 박창화(朴昌和.1889 ~ 1962)는 화랑세기 필사본을 남긴 재야 사학자다. 호는 남당(南堂)이다.

 1930년~1940년대 일본 궁내성 왕실도서관(도서료.오늘날의 서릉부)에서 사무 촉탁으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0대 후반~1950년대 초반 충북 괴산에 머물며 김종진.김준웅 형제를 가르칠 때 화랑세기 필사본을 언급한 것으로전해진다.

 

◇1989년 부산에서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화랑세기》가 발견됐다. 그 후 역사학계는 격렬한 '화랑세기 진위논

    쟁'을 벌인다. 

 

     한쪽에서는 역사학에 조예가 깊었던 박창화라는 사람이 뛰어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낸 소설적 창작

     품이라고 한 반면, 다른 쪽에서는 1300년 전 신라 사람 김대문(金大問)이 쓴 바로 그 《화랑세기》라고 했다.

 

  ◇수 십 책에 달하는 각종 저술을 남겼는데 이 중에 《화랑세기》 필사본 두 종류가 끼여 있었다. 

      이것이 공개되자 역사학계는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다.

 

◇2003년에 1927-1928년 일본에서 발간된 유명 역사학잡지인〈중앙사단〉(中央史壇)에 박창화가 기고한

    역사 논문 3편이 발굴,  개되면서 비로소 '역사학자 박창화'가 조명되기 시작했다.

 

◇박창화의 손자 박인규(朴仁圭)씨가 남당의 역사학 논저 중에서 우리나라의 강역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5편

    을 묶 《우리나라강역고》(彊域考, 민속원)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자료 : 위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