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구려(高句麗)

고구려 배신자 묘지명 중국서 발견

야촌(1) 2009. 10. 21. 23:12

고구려 배신자 묘지명 중국서 발견

 기사입력 2009-10-21 10:49

 

 

 

 

김영관 관장, '고요묘(高鐃苗)' 묘지명 소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나라가 망할 때는 배신자가 있기 마련이다. 고구려 또한 마찬가지였다.

668년 9월 12일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 700년 사직이 종막을 고할 때도 당군과 몰래 결탁해 제 발로 평양성문을 열어준 이가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 주모자로 신성(信誠)과 함께 소장(小將)들인 오사(烏沙) 및 요묘(饒苗) 등을 거론하면서 이들이 평양성문을 열어 당나라 군대를 성내로 맞아들였다.


고구려 멸망을 재촉한 이들 삼인방 중 한 명인 '요묘'의 묘지명이 중국에서 발견됐다.
이 묘지명에 의하면 고구려 '정복'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데 대한 보상 때문인지 요묘는 당나라 황제를 호위하고 궁정을 수비하는 종3품 고위 무관직인 좌령군(左領軍) 원외장군(員外將軍)에 오른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고대사 전공인 김영관 청계천문화관장은 2007년 12월 중국 샨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대당 고좌령군 원외장군 고요묘 묘지'(大唐故左領軍員外將軍 高鐃墓 墓誌)가 시안비림박물관에 입수됐으며, 이를 분석한 결과 묘지명에 보이는 "요동 사람(遼東人)"인 고요묘가 바로 삼국사기에 보이는 요묘(饒苗)임을 확인했다고 21일 말했다.


김 관장은 고구려인 가운데 요(饒)라는 성을 사용한 사례가 어디에도 없고, 삼국사기 인명표기 방식을 볼 때 성(姓)을 생략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며, 더구나 묘지명에 보이는 행적과 삼국사기 관련 기록을 비교할 때 고요묘(묘지명)와 요묘(삼국사기) 동일 인물임이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중국에서 발견된 20번째 고구려 유민 묘지명인 이번 고요묘 묘지명은 청석(靑石)으로 네모 반듯하게 만든 개석(蓋石.덮개돌. 가로 57×세로 57×두께 7.5㎝)과 지석(誌石. 본문을 쓴 몸돌. 가로 56.6×세로 56.4×두께 11.5㎝)이 세트를 이룬다.

지석(誌石)에는 해서체로 1행당 평균 15자씩 모두 173자를 음각했다.

 

지석에는 고요묘가 요동 사람으로 "창해(滄海)를 등지고 귀순해 와서 천자의 청정무위(淸靜無爲)한 교화를 우러러 벼슬길에 올랐"으며 "황제의 큰 은혜를 입어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다"가 "함형(咸亨.당나라 때 연호) 4년(673) 11월11일에 시저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고요묘(高鐃墓=高苗墓)가 역임한 좌령군원외장군(左領軍員外將軍)은 김 관장에 따르면 종3품 무관직이다. 

이에 의하면 고요묘는 당군에 투항해 당으로 가서 고위직에 임명된 뒤 5년 만에 사망한 셈이 된다. 

김 관장은 이 묘지명에서 고요묘가 "도문(桃門)의 귀신들이 드디어 재앙을 내리려고 엿보다 호리(蒿里)의 영혼(營魂. 靈魂과 같은 말)이 되게 하였도다"는 기술이 있어 그의 죽음이 비정상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도문의 귀신'이란 고요묘를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을 지칭하며, 호리란 죽은 사람들이 간다는 태산 남쪽에 있는 지하 세계다.


김 관장은 이런 묘지명 기록을 근거로 "당시 약 3만호(약 15∼20만명)에 달한 재당(在唐) 고구려 유민이나 부흥운동세력에 죽임을당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이런 연구성과를 오는 24일 오후 2시 서강대 다산관 209호에서 열리는 한국고대사탐구회(회장 이종욱 서강대 총장) 제6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