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구려(高句麗)

고구려의 건국

야촌(1) 2010. 8. 9. 17:54

작성일 : 2010. 08. 09

 

■ 갑신년 마한, 신라 시조 21년,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고주몽(高朱蒙) 원년

    이해에는 신국(新國)이 둘이다(한 원제 건 소(建昭) 2, B.C. 37)

 

부여인(扶餘人) 해주몽(解朱蒙)이 졸본(卒本)으로 도망해 와 도읍하고 고구려라고 칭하니, 왕의 성이 고씨(高氏)이다

처음에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모수(解慕潄)가 하백(河伯) 하백은 곧 군장(君長)이란 칭호이고, 반드시 옛 기록에 이른바와 같이 하수(河水)의 신(神)은 아니다. 의 딸 유화(柳花)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골격과 풍신이 영특했다.

 

나이 겨우 7세에 우뚝하여 보통 사람과 달랐고,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되 백번 쏘면 백번 다 맞히었다. 부여의 속어(俗語)에 활쏘기 잘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하므로 따라서 주몽이라고 이름하였다.

 

주몽은 곧 부루(夫婁)의 배다른[異母] 아우이다. 부루가 훙(薨)하매 금와(金蛙)가 계승하였다.

금와가 아들 7인을 두었으나 기능이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그 장자(長子) 대소(帶素)가 제거하여 후환(後患)이 없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금와가 듣지 아니하고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이 사사로이 시험하여 말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아 두고서, 준마(駿馬)는 먹이를 감하여 여위도록 하고 노마(駑馬)는 잘 길러 살찌도록 했는데, 금와가 살찐 것은 자기가 타고 여윈 것은 주몽에게 주었다. 뒤에 사냥 갈 적에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는데도 짐승을 잡은 것은 많으니, 왕자와 신하들이 또 죽이기를 음모하였다.

 

그 어머니가 이것을 알고서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략(才略)으로 어디를 간들 안 되겠느냐? 지체하고 있다가 욕을 당하게 되느니 보다는 멀리 떠나가 유위(有爲)한 일을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주몽이 그제야 친하게 믿는 오이(烏伊)ㆍ마리(摩離)ㆍ협보(陜父) 등 세사람과 함께 동남쪽으로 도망을 쳐 엄사수(淹淲水)를 건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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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후한서》 주(註)에 ‘고려에 개사수(蓋斯水)가 있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 강인 듯하고, 김부식(金富軾)은 말하기를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압록강 상류의 근원이 되는 곳을 말한 것이며, 《여지승람(輿地勝覽)》의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주석에는 지금의 박천강(博川江)을, 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이루었던 강물이라 하였는데, 틀린 것이다. 대개 지금의 오랑캐 땅[胡地]에 있었을 것인데 미상이다.

 

그러나 다리가 없어 빌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백(河伯)의 외손으로 지금 난을 피하는 중인데, 추격하는 사람들이 곧 올 것이니 어쩌면 좋습니까?” 하니, 이에 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고, 건너고 나자 다리가 흩어져 쫓아오는 기마(騎馬)가 미치지 못하였다.

 

모둔곡(毛屯谷)《위서(魏書) 북사(北史)에는 보술수(普述水)로 되었는데, 미상이다. 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마의(麻衣)를 입은 사람은 이름이 재사(再思),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무골(武骨), 수조의(水藻衣)를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묵거(黙居)인데 성은 말하지 아니했다.

 

주몽이 재사(再思)에게는 극씨(克氏)로, 무골에게는 중실씨(仲室氏)로, 묵거에게는 소실씨(少室氏)로 각기 성(姓)을 주고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큰 명[景命]을 받아 기초를 닦으려고 하는데, 이 세 어진 사람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랴!” 하고, 드디어 재능(才能)을 헤아려 일을 맡기고 졸본천(卒本川) 《위서》ㆍ북사(北史)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되어 있다 에 이르렀다.

 

그 토질이 비옥하고 산천(山川)이 험한 요새(要塞)인 것을 보고서 드디어 기초를 세우려 하였으나 미처 궁실은 짓지 못하고, 단지 비류수(沸流水) 위에다가 집을 짖고 살았었다. 국호(國號)를 고구려, 또는 졸본부여(卒本扶餘)라고 하고, 따라서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이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인데 이때 나이 22세이었으며, 사방에서 듣고 와서 소속되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靺鞨)과 잇닿았으므로 드디어 물리쳐 내몰았으나, 말갈은 범접하지 못하였다.

 

○사로(斯盧)가 경성(京城)을 쌓았다.
    명칭이 금성(金城) 지금의 경주부(慶州府)에서 동쪽으로 4리에 있다 인데 길이는 3천 75보(步)이고 너비는 3

   18보로서 35리데, 육부(部)를 통할하였다.

 

  [자료문헌] : 동사강목 >동사강목 제1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