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그때 그시절

장세동 전 안기부장 이야기

야촌(1) 2008. 4. 19. 08:35

 

장세동 전 안기부장 이야기

 

1936년 9월27일 전남 고흥군 도양면 용정리 속칭 유쟁이(柳井)마을이라는 상유리에서
장정국 씨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 고흥읍에서 녹동을 잇는 국도 16km 지점에 위치한 장세동장군의 생가는 50여 호의 조용한 농촌부락이다.

 

3km로 떨어진 곳에 나환자병원이 있는 소록도가 위치해 있다. 장 장군이 태어난 생가는 30여평 되는 평범한 기와집이었다. 상유리는 타성 받지가 별로 없는 인동 장 씨의 집성촌이기는 하나 아버지가 독자였던 관계로 4촌 이내의 친족은 없다.

 

장 장군의 모친은 “모다 지 운명이제. 팔자여!.
우리 둘째는 나라에 바쳤어, 월남에서. 아웅산에서 이미 죽은 줄 알았어“ 라면서 착실하기는 한데 요령이 없어 큰일이다“고 한숨지었다.


장 장군이 네 살 때 아버지가 있던 서울로 전 가족이 이사했는데 아버지는 성북경찰서 순경
으로 잠시 있다가 그만두고 대한토건협회 근무했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잘 살았다.

 

세동군은 서울 신설동에서 당시 집 가까이 있던 창신 초등학교에 입학. 육사동기로 이종찬
부부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 광복되던 해 3학년이던 세 동군은 돈암동으로 이사, 돈암 국민학교를 1949년도에 졸업하고, 엔지니어가 되려는 꿈을 안고 성동공업중학교(현 성동기계공고) 기계과에 진학했다.

 

중학교 2학년재학 중 6.25로 세 동군의 가정에도 재앙이 몰아 닥쳤다.
6.25 하루 전인 24일 부친의 수술로 피난을 못한 세 동군가족은 그해 8월말 식량을 구하러
나간 아버지가 행방불명, 9.28 수복 때까지 적 치하에서 3개월을 지냈다.


세 동군은 9.28수복 후 2대독자인 아들을 찾으러 상경한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부산으로 내려갔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고흥으로 돌아갔다. 젖먹이 때 고향을 떠나 16세가 되어 돌아온 세 동군은 이곳 도양중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 학업을 계속 하면서 농촌 생활을 경험했다. 6촌인 지필 씨는 함께 공부를 했는데 “말수가 적은 세동 군은 영리하고 침착 했다고”고 회고 했다.


다시 어머니와 형은 서울로 돌아가고 동생과 고향에 있던 세 동군은 학업을 포기할 수가 없다고 결심, 5살 아래인 동생으로 하여금 할아버지를 모시게 하고 52년 단신 상경했다. 도강증이 없어 차 밑에 숨어 한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 왔다고 한다.


상경 후 부친의 유업(토건업)을 잇고자 원래의 기계과가 아닌 성동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복교했다. 학제가 변경 되는 바람에 중3학년 과정을 제대로 이수치 못해 중학교 종업장이 없어 7년 만에 중,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세 동군의 학업 성적은 뛰어났고 특히 수학에 재능을 보여 담임 선생은 공대 건축과로 진학할 것을 권유 했으나, 그의 길은 따로 있었다. 고3이던 세 동군은 아버지 친구한테 도움을 받으러 갔다가 “나는 정신적 도움을 줄 수 있어도 물질적 도움을 줄 수 없어....“라는 박정한 거절에 울면서 귀가 자력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1956년 육군사관학교에 응시, 30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함으로써 그의 운명이 새롭게 전개된다.

 

장 장군은 아버지 친구가 처음에는 야속하게 생각했으나 39살 되던 해 문득 자신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장 장군의 16기 동기생들은 2백16명이 입교 1백78명이 졸업했는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들어간 이기붕 씨의 아들 이강석, 부하를 구하고 숨진 강재구 소령, 이종찬(전 정무장관) 정순덕(전 민정당 사무총장, 최평욱(전 보안사사령관) 등이 있다.


-고향에서 할아버지 장례식 때 안 내려왔다고 평이 안 좋던데?.
“장례식 날이 바로 안기부장을 그만둔 날이다. 헬기를 타고 내려가려 했으나 비가 와서 가지 못했다. 국가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할아버님은 97세로 운명 하셨는데 서울에서 모시고 있다. 내려가실 때 하직인사를 했더니 평생 처음으로 내손을 잡으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서울 사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겠지.“


-고향에서 박종규 씨나 이후락 씨는 고향을 많이 발전 시켰는데 장부장께서는 높은 자리에 있어도 해놓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불평 하더라?. “고향에 가서 후배들에게 저녁을 함께 하면서 “나는 고흥의 안기부장, 경호실장이 아닙니다. 나라전체 일을 하라는 자리지 특정 지역을 발전시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했더니 수궁하더라.”


-호남 출신으로 경호실 장, 안기부장을 엮임 한 것은 해방이후 처음 있는 일인데 발탁된 이유는 무엇 이였나?.
“글세, 왜 저를 선택하셨는가 물어 볼 수 없고, 어르신은 한 번도 내 앞에서 지역감정으로 편견을 보인 적이 없었다.“


-5공화국의 경상도 편중 인사는 정치문제화 되지 않았는가?
“전 대통령께서는 본관이 전북 완산이다. 그분은 지역차별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바로 전남 출신인데 그것으로 증명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