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조선(古朝鮮)

최씨낙랑국, 최리의 낙랑(略)

야촌(1) 2017. 5. 15. 00:58


2014.10.17. 20:03

 

최씨낙랑국, 최리의 낙랑(略)

 

서기 54년 호동왕자가 멸망시킨 낙랑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윤내현 교수는 이를 [최씨낙랑국]이라 이름 짓고,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과는 별개의 나라이며,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낙랑이 두 개의 지역에 별도로 존재한다는 주장은,사서에 기록된 낙랑이 한반도 대동강 유역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다만 대동강 유역에 존재하는 낙랑의 흔적은, 낙랑의 유민들이 남긴 흔적일 수는 있을 것이나, 최리의 낙랑 혹은 [최씨낙랑국]이라 하는 존재는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에 존재하였고, 대륙 내에서 낙랑이 이동한 결과로 형성된 것이다.
 
오늘은 윤내현 교수도 궁금해 하던 [최씨낙랑국]의 건국연대와, 그 존재가 어떠하였는지를, [남당유고(南堂遺稿]를 통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二十七年甲寅, 四月, <好童>太子, 将兵東巡獵, 微行至<崔理>新都(鴨口), 與<理>女交好. {其}女, 為之, 破鼓角, 而迎王師大軍. 自<沃沮>浮海而入拔其都, 虜<崔理>夫妻而皈, 以其地為<竹岺郡>. <樂浪>, 自<柴吉>, 四世八十餘年, 而國除.  七月, <大解>太子薨.

◇박창화 필사본 [대무신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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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내현 교수가 이름붙인 [최씨낙랑국]은 서기 300년이 아니라,
서기 54년, 대무신제에 의해 멸망당한다.
 
그 [최씨낙랑국]의 시작은 시길(柴吉)로 부터였다고 [남당유고]는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시길(柴吉)은 언제 낙랑을 건국하였을까?

末曷侵奧万 斗辰往救之
柴吉稱樂浪 卒本幷鯤淵
松讓與奧犍 相爭故國原       

◇박창화 필사본 [추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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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은 하북성 일대에 존재하던 땅 이름이다.
그 땅에 위만조선이 있었으며,
그 위만조선이 패망하자 [옥저] 등의 나라로 나뉘었으며,
북부여를 섬기며 나라를 유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북부여 연맹이 해체될 즈음,
옥저가 순노와의 전쟁으로 쇠락하여 북쪽으로 이동하고,
말갈이 그 땅으로 내려오는 혼란을 틈타,
시길이 옥저의 남쪽을 차지하고 [시길의 낙랑]을 건국한 것이다. 
이때가 서기전 54년이었다.

소위 [최씨낙랑국]의 건국은 서기전 54년이다.
즉, 옥저에서 분리되어 시길(柴吉)이 낙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다.
사실 시조인 시길(柴吉)이 성씨를 쓰지 않았으므로 [최씨낙랑국]이라는 용어도 문제가 있다.

漢初 燕亡人衛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沃沮還屬樂浪。                 

◇三國志 卷30

이 기록은 위만의 조선이 [낙랑]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낙랑에 옥저가 속해있었으며,
위만조선이 멸망하자 옥저성을 현토군이라 하였다가,
이맥에게 그 땅을 빼앗겨 현토를 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는 다시 낙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낙랑은 위만조선 전체를 지칭하기도 하였다는 뜻이다.
 
산해경을 주석한 곽박(郭璞, 227~324) 또한 같은 주장을 하였으니,
낙랑이 조선이라 하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 낙랑이 해체되어 개마, 구다, 옥저, 낙랑 등의 나라로 나뉘었는데,
북부여 말기 옥저가 순노와의 전쟁으로 약해지자,
그 땅으로 북 갈이 내려와 장악하였고,
그 중 일부가 개사수(盖斯水)를 중심으로 [남옥저]라 칭하게 된다.

末曷漸南下 蔓延盖斯水 自稱南沃沮

◇박창화 필사본 [추모경] 

이 [남옥저]가 바로 시길의 낙랑이다.
서기전 54년에 [낙랑]을 칭하였던 시길이,
서기전 48년 옥저의 땅 남쪽을 차지하며 [남옥저]를 칭한 것이다. 
 
따라서 시길의 낙랑은 원래의 낙랑을 구성하던 조선족과는 다른 말갈족이다.
이들의 일부가 동부여를 구성하고,
다시 나중에 신라 구성원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khtsnv/5014950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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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중국대륙의 주인이었던 금(金, 1115년~1234년)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완안아골타라 불린 여진족 출신의 사람이 세워 서기1115년에서 1234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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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樂浪王柴吉定界 柴吉欲得奄東盖斯之地曰  "我本南沃沮也 願得沃沮故地" 上許之.....                

박창화 필사본 [추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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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옥저가 바로 시길의 낙랑이고 최리(崔理)의 낙랑이다.

땅의 주인은 바뀌었어도,

땅의 이름은 여전히 낙랑의 땅이기에,

둘 다 낙랑이라 하는 것이다. 

 

평양의 낙랑과 요동의 낙랑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또한 난하의 동쪽에 낙랑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곳의 땅은 낙랑이라 불리지 않았다. 

 

땅은 움직이지 않는다.

낙랑은 땅의 이름으로 지어진 나라이다. 

 

서기전 54년에서 서기 54년까지 108년,

서기전 48년에서 서기 54년까지 102년,

 

1대 시길,

2대 자술,

3대 자룡,

4대 최리로 내려온 시길의 낙랑,

 

남옥저의 낙랑은 4대로,

기록에서는 나라를 세운지 8십여 년이라 하였고,

실제 그들이 그곳에 정착한지 백여 년 만에 그 종말을 고한 것이다. 

 

낙랑은 크게는 위만조선의 땅을,

작게는 남옥저의 땅을 일컫는 명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