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김묘 처 민씨 묘지명(金昴妻閔氏墓誌銘)

야촌(1) 2018. 4. 9. 15:23

김묘 처 민씨 묘지명(金昴妻閔氏墓誌銘)

 

◇시대 : 고려

◇연대 : 1379년(우왕 5년)

◇찬자 : 이색(李穡)

 

[개관]

묘지명은 이색(李穡)의 문집인『목은문고(牧隱文藁)』권19와『동문선(東文選)』권128에 실려 있으며, 1379년(우왕5)에 이색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민씨(閔氏: 1324~1379)는 김묘(金昴)의 처이다.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에 봉해졌다. 증조부는 종유(宗儒),조부는 적(頔),아버지는 사평(思平)이다.

외조(外祖)는 김윤(金倫)이다.


아들이3명으로, 장남은구용(九容), 차남은 제안(齊顔), 구덕(九德)이다.

딸은 9명이다. 각각 김사안(金士安), 이창로(李彰路), 최유경(崔有慶), 허호(許顥), 허의(許誼), 이존사(李存斯), 김첨(金瞻)에게출가했다. 나머지둘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참고로 민씨의 증조부 종유(宗儒), 조부적(頔), 아버지사평(思平) 및 처 김씨의 묘지명이 있다.

 

[참고문헌]

논문)김보경,2003,「李穡의女性認識-女性墓主墓誌銘을중심으로-」,『漢文學報』8
(논문)金龍善,1989,「高麗支配層의埋葬地에대한考察」『東亞硏究』17;2004『고려금석문연구-돌에새겨진사회사』,일조각(단행본)민족문화추진회편,1966,『국역동문선』,민족문화추진회;1998,도서출판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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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군부인 민씨(驪興郡夫人 閔氏) 묘지명


 이색(李穡)  찬


 나의 벗 김구용(金九容)씨가 금년(우왕 5, 1379) 윤5월 갑진(甲辰)일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 민씨(閔氏)를 조모 김씨의 묘역에 장사하였다. 거리가 서로 십 수보였다. 그리고 아들 참군사(參軍事) 명선(明善)을 보내 묘지명을 부탁하였고,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행장을 살펴보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輸誠秉義協贊功臣 重大匡都僉議贊成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로 시호가 문온(文溫))인 급암(及菴)선생 사평(思平)이 부인의 아버지이다.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 密直司使)로 시호가 문순(文順)인 적(頔)이 부인의 할아버지이다.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시호가 충순(忠順)인 종유(宗儒)는 부인의 증조부이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시호가 정렬(貞烈)인 죽헌(竹軒) 김윤(金倫)은 부인의 외조(外祖)이다.

 

내외의 문벌이 혁혁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부인은 그러한 집안에서 태어나보고 듣는 것이 익숙하였다. 마땅히 할 일에는 한결같이 어머니의 규범을 근본으로 삼았다.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겼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드리는 일을 병이 들었어도 놓치지 않았다. 친척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길 때 어머니를 모시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기가 마치 집안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 뒤에 여흥(驪興 : 경기도 여주)에 살면서 10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니 부인의 아들과 사위가 매양 서울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으나,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무덤을 여기다 모셔두고 내가 가버리면 성묘를 못할 것인데, 내 어찌 차마 떠날고.”하였다.

 

5월 계사(癸巳)일 병으로 별세하셨다. 나이 56세였다. 구용(九容)이 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맑은 덕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시며 어두운데서 기르시기를 좋아하시더니, 이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어찌 할꼬.”하였다. 색(穡 : 묘지명 찬자 이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김(구용)의 어머니여, 문온공(민사평)이 비록 아들이 없으나, 이러한 딸이 있어서 구용씨를 낳았고, 외조카(宅相)이 사마천의 사전(史傳)을 완성했으니, 가히 어질다 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아들이 3인이다. 장남 구용(九容)은 전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前中正大夫 三司左尹 進賢館直提學 知製敎 充春秋館編修官)이다.

 

다음 제안(齊顔)은 중의대부 중서병부낭중 겸 첨서 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 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中議大夫 中書兵部郎中 兼 僉署 河南江北等處 行樞密院事 奉善大夫 典校副令 知製敎 兼 春秋館編修官)이다.

 

그 다음은 구덕(九德)으로 전좌우위 보승산원(前左右衛 保勝散員)이다.

딸이 9인이다.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사안(金士安), 전개성윤(前開城尹) 이창로(李彰路), 전종부령(前宗簿令) 최유경(崔有慶), 전낭장(前郎將) 허호(許顥), 전부령(前副令) 허의(許誼), 겸박사(兼博士) 이존사(李存斯),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첨(金瞻)에게 각각 출가했다. 나머지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명(銘)에 이르기를, 물건이 뿌리로 돌아갔으니 그 삶은 무궁하도다.

여흥민씨를 그 가운데 장사하니, 강물은 흘러 흘러 어찌 쉴 때가 있으리요.
그와 함께 길지어다. 영가(永嘉)의 풍(風)이요.

 

[原文]

驪興郡夫人閔氏墓誌銘


吾友金九容氏以今年閏五月甲辰葬其母驪興郡夫人閔氏于祖母金氏之塋直其西十數步旣而走其子叅軍事明善求銘予義不辭按其狀輪誠秉義協贊功臣重大匡都僉議贊成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諡文溫及菴先生諱思平其考也匡靖大夫密直司使諡文順諱迪其大父也僉議贊成事諡忠順諱宗儒其曾大父也都僉議政丞諡貞烈竹軒金公諱倫其外祖也內外赫然一國所慕而夫人生於其問習熟見聞凡所當爲壹是皆以母則爲本事父母甚孝朝昏定省不以疾病廢宗族稱之辛丑冬避賊南遷奉母以行母安焉如在室中其後居驪興十有餘年事之益勤母旣歿矣夫人之子壻每請還京夫人涕泣曰吾母葬於斯吾去矣拜掃闕矣吾何忍焉吾何忍焉五月癸巳以病歿年五十六九容氏又曰吾父淸德畏人之知喜於晦養母今亡焉嗚呼奈何穡曰賢哉金母也文溫公雖無子有是女以生九容氏宅相成遷史傳可不謂賢哉男三人長九容前中正大夫三司左尹進賢館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編脩官次齊顔中議大夫中書兵部郞中兼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奉善大夫典校副令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次九德前左右衛保勝散員女九人適密直副使金士安前開城尹李彰路前宗簿令崔有慶前郞將許顥前副令許誼兼博士李存斯門下注書金瞻次未適其銘曰物歸其根其生不窮驪興閔氏葬于其中江之沄沄曷其有終與之俱長永嘉之風

〔출전:『牧隱文藁』권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