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한수 묘지명(韓脩 墓誌銘)

야촌(1) 2018. 10. 14. 22:24

■ 한수 묘지명(韓脩 墓誌銘)

 

한 문경공 묘지명 병서(韓文敬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찬(撰)



내 나이 16ㆍ7세에 시승(詩僧)을 따라 놀기를 좋아하여, 한 번은 묘련사(妙蓮寺)에 이르러서 선비와 중들이 섞여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연구(聯句)의 시를 지었는데, 그때에 문경공(文敬公)이 아직 12ㆍ3세의 동자로서 매양 척척 대구(對句)가 되는 연구시(詩)를 불러서 좌중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으며, 비록 문묵(文墨)에 늙은 자라도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감히 같은 서열에 낄 생각을 못하므로 나는 벌써 마음속으로 보통 사람과는 달리 알고 있었다.

 

정해년(丁亥年=1347년 충목왕 3)에 나의 선군(先君)이 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를 관장하였는데, 문경공(文敬公)이 과연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였으니, 그때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낙제한 자들도 그의 재주에 굴복하여 이르기를, “한생(韓生)은 요행으로 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문벌에 의한 음직(蔭職)으로 두 번이나 진전직(眞殿直)과 별장이 되었기 때문에 벼슬을 구하지 않고, 고서(古書)의 토론을 좋아하였고 또 익재 선생(益齋先生)에게 가서 《좌전(左傳)》과 《사기(史記)》ㆍ《한서(漢書)》 등을 읽었으며, 글씨 쓰기를 익혀서 진서(眞書)와 초서(草書)가 다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었다.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고 공을 덕녕부 주부(德寧府注簿)에 보직하고, 정방(政房)에 불러다 두고서 비도적(秘闍赤)으로 삼았다. 신묘 년(辛卯年=1351년 忠定 3)에 왕이 왕위를 내놓고 강화도로 가서 공이 따라가 있었는데, 공민왕이 불러서 돌아왔으나 즉시 쓰지 않았다.

 

계사년(癸巳年=1353년 공민왕 2)에 이르러서 비로소 전의 주부(典儀注簿)에 제수되고 또 비도적(祕闍赤=政房의 書記)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전리좌랑 지제교가 되고, 또 다음해에 두 번 계급을 올려서 통직랑 성균직강 봉선대부 성균사예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예문응교를 겸임하게 하였다.

 

병신년(丙申年=1356년 공민왕 5)에 관제(官制)를 고쳐서 중산대부 비서소감 지제고가 되고, 다음해에 병부시랑 한림대제로 옮겼으며, 가을에는 직학사(直學士)에 승진하였고, 또 그 다음해에 중정대부 국자좨주 지제고에 올랐다.

 

신축년(辛丑年=1361년 공민왕 10)에 왕이 사적(沙賊)을 피하여 안동으로 가니 따라가서 전의령과 전교령에 두 번 전직되었는데, 다 중정의 품계였으며, 다음해 가을에 서울로 돌아와서 봉순대부 판사복시사 우문관직제학에 승진되었다.

 

겨울에 밀직사좌부대언 보문각직제학 지공부사에 임명하니, 이는 대개 공을 등용하여 인사의 전선(銓選)을 맡게 하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우부대언에 오르고, 또 좌대언에 올랐다.

 

을사년(乙巳年=1365년 공민왕 14) 봄에 신돈(辛旽)이 왕의 총애를 받아 그의 행동이 아주 은밀한 것이 있었다. 공이 이를 알고 비밀리에 왕에 고하기를, “신돈은 올바른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도 어지러운 일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옵소서. 신이 아니면 누가 감히 말하오리까.”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바야흐로 신돈을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 해 여름에는 판서 예의(判書禮儀)에 임명하고 가을에는 군부(軍簿)직에 제수해 보내니, 이것은 대개 공을 소외한 것이다.

 

10월에 부친의 상사를 당하고 3년의 상제를 마쳤으나, 왕은 전일 직언의 노여움으로 인하여 오히려 쓰려고 하지 않았다. 신해년(辛亥年=1371년 공민왕 20) 가을에 신돈의 죄상이 드러나자, 왕이 이르기를, “한 모(韓某)는 선견지명이 있으니 급히 불러오라.” 하고, 곧 영록대부 이부상서 수문전학사(榮祿大夫理部尙書修文殿學士)를 제수하고 수일이 지나서 왕이 이르기를, “전선(銓選)은 중요한 일이다.

 

총명 민첩하고 정밀한 자가 아니면 그 권한을 줄 수 없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오직 한모(韓某)가 그에 적격한 사람이다.” 하고, 이에 공을 정의대부(正議大夫)로서 우승선(右承宣)에 임명하고, 겨울에는 좌승선에 승진시켜 전선(銓選)을 맡게 하였다.

 

을묘년(乙卯年=1375년 우왕 원년) 여름에 밀직제학 동지서연에 임명되고 가을에는 첨서로 승진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가서 부사(副使)로 고쳐 제수되고 조금 뒤에 동지로 올랐으며, 5월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지금 판서에 재직 중인 정총(鄭摠) 등 33명을 뽑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좋은 선비를 선발해 얻었다고 일컬었다.

 

그 해 가을에 지사(知司)에 오르고, 무오년(戊午年=1378년 우왕 4)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하였고 대광(大匡)의 품계에 오르니 관직은 진현(進賢)으로 고쳐주고, 수충찬화공신(輸忠化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다.

 

기미년(己未年=1379년 우왕 5) 겨울에 광암비(光巖碑)를 쓴 공로로 다시 첨서가 되고 다음해 봄에는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 중대광(重大匡)의 계급에 올랐으며, 임술년(壬戌年=1382년 우왕 8)에는 왕을 호종하여 남경(南京=오늘날의 서울)에 갔다 오니, 다음해 가을에 그 공으로 광정대부 판후덕부사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을 임명하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이 하였다.

 

갑자년(甲子年=1384년 우왕 10) 2월 28일에 병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마치니 나라 사람들이 다 탄식하고 애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나이 겨우 52세에 사망하니 천도의 어그러짐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하였다. 날을 택하여 임진현(臨津縣=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일대의 옛 고을) 서곡(瑞谷=파주 서곡리) 남쪽 기슭에 있는 선산 아래에 장사하니 예로써 한 것이다.

 

한(韓) 씨는 상당(上黨)의 대가(大家)이니, 난(闌)은 삼한공신(三韓功臣)이고, 사기(謝奇)는 첨의부 우간의대부 보문각제학 지제교이니, 공의 증조가 되며, 악(渥)은 벼슬이 선력 좌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당부원군이며, 시호는 사숙(思肅)으로 충숙왕을 도와서 관위가 총재에 이르고 공로가 국가에 있었으니, 이는 공의 조부이다.

 

사숙공(思肅公=韓渥)이 5명의 아들을 두어 모두 명철한 재상이 되었는데, 그 이름을 공의(公義)라 하는 분이 밀직의 관직을 거쳐 중대광 청성군(重大匡淸城君)에 봉하였고, 시호를 평간공(平簡公)이라 하여 밀직사좌대언 겸 감찰집의 경사만(慶斯萬)의 딸과 혼인하였으니, 공의 고비(考妣=돌아가신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것이다.

 

공이 검교문하시중 길창부원군(檢校門下侍中吉昌府院君) 권적(權適)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6녀를 낳았다. 장남 상환(尙桓)은 전 삼사우윤(前三司右尹)이요, 다음 상질(尙質)은 서북면도관찰출척사 겸 평양윤이요, 다음 상경(尙敬)은 공조총랑 지제교 겸 상서소윤이요, 그 다음 상덕(尙德)은 종부시승이다.

 

손자로 남녀 약간 명이 있으니, 우윤(右尹)은 문하평리 윤승순(尹承順)의 딸과 결혼하여 2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출척사(黜陟使)는 문하시중 이성림(李成林/慶州人 東菴 李瑱의 長 曾孫子)의 딸과 결혼하여 1녀를 낳았는데 전 종부시승 강책(姜策)에게 시집갔고, 다시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 송신의(宋臣義)의 딸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총랑(摠郞)은 전 판도판서 오준량(吳俊良)의 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시승(寺丞)은 전 대언(前 代言) 이귀생(李貴生)의 딸과 결혼하였다. 6녀 중에 맏딸은 삼사우윤(三司右尹) 안경검(安景儉)에 시집가서 5녀 1남을 낳았고, 다음 딸은 성균직강 이작(李作)에게 시집가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직 다 어리고, 다음 딸은 대호군 권방위(權邦緯)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전호군 임중선(任中善)에게 시집가서 4남을 낳았으며, 그 다음은 의덕부승(懿德府丞) 박등(朴登)에 시집갔고, 다음은 중랑장 전보(田甫)에 시집갔다.

 

큰 아들 우윤 상환은 총명 민첩하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병으로 과거 공부를 폐지하였고, 둘째 아들 출척 상질은 경신년(庚申年=1360년 우왕 6) 과거에 제3위로 급제하였으며, 총랑 상경은 임술년(壬戌年=1382년 우왕 8) 과거에 제3위이며, 막내아들 시승 상덕은 을축년(乙丑年=1385년 우왕 11) 과거에 제9위로 급제하였는데, 우리나라 제도에 세 아들이 과거에 오르면 어머니에게는 종신토록 나라 창고의 곡식을 주도록 되어 있어 지금 권 씨 부인이 그 영광스러운 효양(孝養)을 받고 있으니, 공도 지하에서 웃음을 머금고 있을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공이 선화(仙化=신선으로 변했다는 뜻)하여 가신지도 벌써 9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성음과 용모가 언제나 나의 마음속과 눈앞을 떠나지 않고 있으니, 어느 날인들 잊겠는가. 출척공(黜陟公)이 그 여러 형제와 더불어 묘소에 명을 묻으려는 뜻이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여, 나를 찾아 명(銘)을 청하는 것이다.

 

아, 슬프다. 내가 문경공(文敬公)의 청으로 일찍이 그의 아버지 평간공(平簡公)의 묘소에 명한 바 있었는데 이제 또 문경공의 묘소에 명하게 되다니, 그 역시 슬픈 일이로다. 명에 이르기를,

옥병 속에 얼음을 담아둠과 같은 것은 / 玉壺置冰(옥호치빙)
오직 공의 맑은 지조요 / 惟公之淸(유공지청)
티끌 갑 속에서 거울을 연 것과 같은 것이 / 塵匣開鏡(진갑개경)
오직 공의 밝은 마음 이외다 / 惟公之明(유공지명)


부귀 속에서 자라났건만 / 長于紈綺(장우환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일이 없었으며 / 無華靡事(무화미사)
시문과 서예에 노닐고 / 游於詩書(유어시서)
털끝만큼의 재리를 추구한 바 없었습니다 / 絶絲毫利(절사호리)


효도하고 우애하며 충성하고 신의 있었고 / 孝友忠信(효우충신)
또 청렴하고 고요하며 너그럽고 화평하셨으니 / 廉靜寬和(렴정관화)
장수를 누리셔야 마땅하거늘 / 宜至眉壽(의지미수)
하늘이 빼앗아 가는데 어찌 하오리까 / 天奪奈何(천탈내하)


오직 자녀를 많이 두시어 / 惟其多子(유기다자)
재주 있고 아름다우니 / 有才有美(유재유미)
공의 명성이 전함은 / 公名之傳(공명지전)
생시와 같을 것입니다 / 如在于世(여재우세)


내가 공의 부자의 분묘에 명을 지으니 / 我銘父子(아명부자)
이 마음 어찌 상하지 않으오리까 / 心胡不傷(심호불상)
바라옵건대 많은 복을 내리시어 / 庶其垂裕(서기수유)
자손들을 창성하게 하시옵소서 / 子孫其昌(자손기창)
하였다.

 

고려 말의 문신인 유항 한수(柳巷 韓脩, 1333~1384)의 묘이다.진동면 서곡리 산 87

 

재료 출처 : 목은고>牧隱文藁卷之十五>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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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韓文敬公墓誌銘 幷序

 

予年十六七。喜從詩僧游。至妙蓮寺。儒釋雜坐。啜茶聯句。文敬公年才十二三。每有的對。衆皆驚歎。雖老於文墨者。推讓不敢齒。予固心異之。歲丁亥。吾先君知貢擧。文敬果中高第。時年十五歲也。落第者服其才。皆曰。韓生非僥倖也。先是。以門蔭再爲眞殿直別將。以故不永仕。討論墳典。從益齋先生讀左傳,史,漢。作字。眞草皆入妙。聰陵襲位。補德寧府注簿。召置政房。爲秘闍赤。歲辛卯。遜于江都。公從之居。玄陵召還。不卽用。歲癸巳。始授典儀注簿。又爲秘闍赤。明年。遷典理佐郞,知製敎。又明年。再加通直郞,成均直講,奉善大夫成均司藝。皆帶藝文應敎。歲丙申。改官制。爲中散大夫秘書少監知製誥。明年。遷兵部侍郞,翰林待製。秋。陞直學士。又明年。進中大夫國子祭酒。知製誥。歲辛丑。國家避沙賊于安東。再轉典儀,典校二令。皆中正。明年秋。還京。加奉順大夫判司僕寺事,右文館直提學。冬。拜密直司左副代言,寶文閣直提學,知工部事。蓋用公知銓選也。明年。進右副代言。又進左代言。歲乙巳春。辛旽得幸於上。其迹甚秘。公知之。密告曰。旽非正人也。恐致亂。願上思之。非臣誰敢言。上方愛倖旽。夏。判書禮儀。秋。進軍簿。蓋疏之也。冬十月。丁父憂。終三年制。上以前言猶不用。歲辛亥秋。旽敗。上曰。韓某有先見之明。可急召來。乃授榮祿大夫理部尙書,修文殿學士。居數日。上念銓選重事也。非聰敏精密。不足以授其柄。吾思唯韓某其人也。於是。以正議大夫。拜右承宣。冬。進左承宣。知銓選。歲乙卯夏。進拜密直提學,同知書筵。秋。陞簽書。明年正月。改副使。俄進同知。夏五月。同知貢擧。取今判書鄭摠等三十三人。時稱得士。秋。進知司。歲戊午。封上黨君。階大匡。館職改進賢。錫輸忠贊化功臣之號。己未冬。以書光巖碑功。復簽書。明年春。封淸城君。階重大匡。歲壬戌。扈從南京。明年秋。錄功拜匡靖大夫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功臣號如故。歲甲子二月廿八日。以病卒于第。國人皆歎悼曰。斯人也年才五十二而亡。天道奚爲至此也。卜日葬于臨津縣瑞谷南麓先塋。禮也。韓氏上黨大家。曰蘭。三韓功臣也。曰謝奇。僉議府右司議大夫寶文閣提學,知製敎。於公爲曾祖。曰渥。宣力佐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上黨府院君。諡思肅。佐忠肅王。位冢宰。功在社稷。於公爲祖。思肅生子五人。皆爲明宰相。其諱公義者。由密直封重大匡淸城君。諡平簡。娶密直司左代言兼監察執義慶公諱斯萬之女。於公爲考妣。公娶檢校門下侍中,吉昌府院君權公諱適之女。生四男六女。長尙桓。前三司右尹。次尙質。西北面都觀察黜陟使兼平壤尹。次尙敬。工曺摠郞,知製敎兼尙瑞少尹。次尙德。宗簿寺丞。孫男女若干人。右尹娶門下評理尹承順之女。生二女。幼。黜陟娶門下侍中李成林之女。生一女。適前宗簿寺丞姜策。再娶知淸風郡事宋臣義之女。生女。幼。摠郞娶前版圖判書吳俊良之女。生一女。幼。寺丞娶前代言李貴生之女。女長適三司右尹安景儉。生五女一男。次適成均直講李作。生二男一女。皆幼。次適大護軍權邦緯。次適前護軍任中善。生四男。次適懿德府丞朴登。次適中郞將田甫長。聰敏好讀書。以病廢業。黜陟。庚申科第三名。摠郞。壬戌科第三名。季寺丞。乙丑年科第九名。以國制三子登科。廩其母終身。今權氏夫人享其榮養。公之含笑地下。可知已。公之仙居。今已九年矣。而聲音容貌。在吾心目。何日而忘之耶。默陟公與昆季。謀銘幽堂。日遠而志愈懃。來請銘。嗚呼。吾以文敬之請。嘗銘其考平簡公矣。今又銘文敬。其亦可悲也已。銘曰。玉壺置氷。惟公之淸。塵匣開鏡。惟公之明。長于紈綺。無華靡事。游於詩書。絶絲毫利。孝友忠信。廉靜寬和。宜至眉壽。天奪奈何。惟其多子。有才有美。公名之傳。如在于世。我銘父子。心胡不傷。庶其垂裕。子孫其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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