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이현일 선생 묘지명

야촌(1) 2017. 12. 3. 15:15

■갈암 이공 묘지명(葛庵李公墓誌銘)

 

권두경 찬(權斗經 撰)

 

대총재(大冢宰=이조판서) 갈암(葛庵) 이 선생(李先生)이 후학을 버리고 돌아가신 지 16년 되던 해에 셋째 아들 처사(處士) 재(栽)가 그 아들 인환(寅煥)에게 가전(家傳)과 행장(行狀)을 지녀 보내면서 두경(斗經)에게 명하기를, “선군자(先君子)께서 시대를 잘못 만나 폐고(廢錮)되신 채로 돌아가신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나 유당(幽堂 묘(墓)의 명(銘)은 아직 위촉한 바가 없었으니, 이는 기다리는 바가 있어서였다. 지난해에 성상께서 죄가 없음을 살피고 관작(官爵)과 품질(品秩)을 회복시키도록 명하셨으나, 곧 당인(黨人)들에게 저지당하였다.

 

지상(地上)의 신원(伸冤)이 이렇듯 기약하기 어려우니, 다만 지하에서나마 신원될 수 있도록 묘지명을 감히 그대에게 부탁하노니, 그대는 도모(圖謀)해 달라.” 하였다. 두경이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계속 부탁하여 끝내 사양할 수 없는 바가 있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의 휘는 현일(玄逸)이고, 자는 익승(翼昇)이다. 이씨는 계림(鷄林)에서 나왔으니, 신라(新羅) 시조(始祖) 때의 공신(功臣) 알평(謁平)의 후예이다. 

 

승국(勝國, 고려) 때에 우칭(禹偁)이라는 분이 재령군(載寧君)에 분봉(分封)되면서 재령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후에 밀양(密陽)에서 함안(咸安)으로 이거(移居)하였다.

 

맹현(孟賢)에 이르러 경학(經學)으로 드러났는데,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아들인 현령(縣令) 애(璦)가 영해(寧海)로 장가들어 살았으므로 자손들이 마침내 그곳에서 그대로 살게 되었다.

 

휘 은보(殷輔)를 낳으니, 부사직(副司直)을 지냈고 좌승지에 추증(追贈)되었다. 휘 함(涵)을 낳으니, 문과에 급제하여 의령 현감(宜寧縣監)을 지냈으며, 소재(小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휘 시명(時明)을 낳으니,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들이 선생에게는 위로 3세(世)가 된다.

 

판서공은 모두 두 번 장가를 들었는데, 김씨(金氏)와 장씨(張氏)는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장부인(張夫人)은 천계(天啓) 정묘년 1월 기묘에 선생을 낳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할 적에 문득 부엌 여종이 전날 밤에 숟가락을 잃어버린 곳을 가리켰다. 6세 때에 판서공에게 사람의 두 눈썹이 갈라진 것이 곤괘(坤卦)의 형상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팔괘(八卦)에 대해 물어보니 대답하는 것이 매우 분명하므로 판서공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9세 때에 화왕시(花王詩)를 읊었는데 “어느 꽃이 승상이 될까?[何花爲丞相]”라는 시구를 보고 사람들은 그가 공경(公卿)이 될 만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해에 중씨(仲氏) 존재(存齋) 선생이 장래의 뜻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원수(元帥)가 되어 요동(遼東)을 수복(收復)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이는 요동과 심양(瀋陽)이 금(金)나라에 함락당한 것을 분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10세 때쯤에는 태극(太極)ㆍ양의(兩儀)ㆍ사상(四象)이 차례로 생겨나는 그림을 그리고, 일원(一元)ㆍ십이회(十二會)의 수를 추연(推衍)하여 설을 만들어 내니, 식자(識者)들이 모두 경탄하여 기이하게 여겼다.

 

동년(童年)이 되어서는 경서(經書)를 상고하고 사서(史書)를 탐독하여 온축된 바가 날로 풍부해졌으며, 아울러 《손오병법(孫吳兵法)》과 《육도삼략(六韜三略)》을 즐겨 보았다. 그러나 곧 외면(外面)으로만 헛되이 내달린다고 여겨 오잠(五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판서 공을 따라 영양현(英陽縣) 수비(首比)의 산속으로 들어가 그 거처를 ‘갈암(葛庵)’이라고 편액(扁額)하였는데, 강습(講習)하고 존성(存省)하는 공부가 더욱 순수해졌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의 국상(國喪) 때 송시열(宋時烈)이 대왕대비(大王大妃)의 복제(服制)를 의정(議定)하면서 망녕되이 ‘체이부정(體而不正)의 서자(庶子)’라는 설을 끌어대어 기년복(朞年服)으로 단정하였다. 예송(禮訟)이 일어나면 곧 유배(流配)가 뒤따랐다. 영남(嶺南)의 유림(儒林)들이 장차 추론(追論)하고자 하여 선생에게 상소문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이에 송시열의 잘못된 의론을 조목조목 반박하여 단정하기를, “천자나 제후가 이미 차례를 계승하여 전중(傳重)하였으면, 다시 종지(宗支)나 적서(嫡庶)를 논하여 분분한 의심을 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목재(木齋) 홍공 여하(洪公汝河)가 그 문장을 보고 탄복하기를, “기왕의 잘못을 바로잡고 후대의 의혹을 해소하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갑인년(1674, 현종 15) 가을에 금상[今上=숙종(肅宗)]이 즉위한 뒤, 선왕(先王)의 유명(遺命)이라 하여 먼저나라의 예(禮)를 바로잡았다.

 

선생이 당시에 판서공의 상중(喪中)이었는데, 연달아 침랑(寢郞), 사직랑(社稷郞)에 제수하는 명이 있었다. 정사년(1677, 숙종3) 여름에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초수(超授)되자 비로소 나아가 명에 응하였다.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옮겨지자 정고(呈告)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이 상에게 아뢰기를, “근래에 이모(李某)를 보니, 참으로 유자(儒者)였습니다. 경연(經筵)에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겨울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아 다음 해 봄에 마침내 직임에 나아갔다. 공조 정랑에 옮겨졌다가 다시 지평이 되었다.

 

마침내 정학(正學)을 밝혀서 대본(大本)을 세우고, 기강(紀綱)을 진작시켜 풍속을 면려하고, 공도(公道)를 넓혀 왕법(王法)을 바루고, 충간(忠諫)을 받아들여 옹폐(壅蔽)를 제거하고, 민정(民情)을 살펴 실혜(實惠)를 행하는 것 등 다섯 조항을 적은 소(疏)를 올렸다.

 

또 상께서 새로 큰 병에 걸렸기 때문에 일욕(逸慾)을 경계하고 신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설을 말미에서 거듭 고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김익훈(金益勳)이라는 자가 후궁(後宮)의 친척이라는 인연으로 갑자기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제수되었는데, 선생께서 논박하여 바로잡으니 여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곧 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근친(覲親)하였다.

 

처음에 상께서 14세의 나이로 ‘임금이 배라면 백성은 물이다.[君舟民水]’라는 비유를 취하여 그림으로 그리도록 명하고 그에 대한 도설(圖說)을 지었는데, ‘학문을 좋아 한다’, ‘어진 인재를 등용 한다’, ‘간언(諫言)을 받아들인다.’,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듣는다.’, ‘재물을 천시하고 덕을 귀하게 여긴다.’ 등 다섯 조목으로 치국(治國)의 요체를 삼았다.

 

선생은 성상의 자질이 그러한데도 받들어 성취시켜 주고 바로잡아 구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여겨 마침내 경전(經傳)에서 가려 뽑아 《도설발휘(圖說發揮)》 6편을 만들었다. 그리고 상소를 기초(起草)하여 추명(推明)하였는데, 그 귀결은 학문을 좋아하라는 데에 있었다.

 

또 아뢰기를, “제왕(帝王)의 도는 반드시 다섯 가지를 바탕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란 것이 어찌 기송(記誦)하는 것을 뜻하겠으며, 어질다는 것이 어찌 자기의 사욕(私慾)을 따르는 것을 뜻하겠으며, 간언(諫言)을 받아들여 잘못을 고친다는 것이 어찌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면서 겉으로만 우선 따르는 것을 뜻하겠으며, 검소하고 덕을 존중한다는 것이 어찌 음성이나 웃음 따위의 겉모습으로만 하는 것을 뜻하겠습니까.

 

참으로 알고 실천하며 자신을 바로잡고 반성하여 예경(禮敬)의 실제를 극진히 갖추는 것을 귀하게 여길 따름입니다.” 하고, 끝에서 아뢰기를, “한쪽으로 쏠리면 배를 운행할 수 없고, 굳건하지 않으면 순조로이 시내를 건널 수 없습니다. 

 

배에 물이 새는데도 노가 없어 장차 가라앉을 형편이면 사공을 불러 깨워서 힘을 다해 함께 구제하는 것을 늦추어서는 특히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탄(嘉歎)하여 호피(虎皮) 1령(令)을 하사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에 허견(許堅)과 이남(李枏)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당인(黨人)들이 다시 기용되어 용사(用事)하니, 종실과 대신 이하가 잇달아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는 오상 시수(吳相始壽)가 하옥되어 사죄로 논죄(論罪)되었고, 또 다음 해에는 허새(許璽)의 옥사가 있는 등, 큰 옥사가 해마다 계속되어 사람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또 다음 해 봄에는 천재(天災) 때문에 직언(直言)을 구하였는데, 선생은 경신년 7월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한마디 말이 없으면 어떻게 신하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것인가.” 하면서, 즉시 유지(有旨)에 응하여 소(疏)를 기초하고 옛날에 재이(災異)에 응했던 사례를 인용하고 오늘날 당한 변고를 미루어서 아뢰기를, “전하의 총명이 이지러져 혹 막히고 가려진 근심이 있어서가 아닐는지요?

 

전하의 기강이 느슨해져 혹 사적인 관계에 연연함이 있어서가 아닐는지요? 외척의 세력이 혹 전단(專斷)하는 조짐이 있어서가 아닐는지요? 크고 작은 옥사(獄事)에 혹 잘못 걸려든 원통함이 있어서가 아닐는지요?

 

혹 시비(是非)가 전도되고 용사(用舍)가 불공정해서가 아닐는지요?” 하고, 끝에서 다시 ‘천명(天命)에 응할 때는 진실로써 하고 형식적으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아뢰었다. 친구와 자제들이 번갈아 가며 찾아와 그만둘 것을 청하였는데, 듣지 않았다.

 

소가 올라가고 나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역적을 두둔한 죄로 다스리기를 청하였는데, 마침 변호해 주는 이가 있어 무사하였다. 기사년(1689, 숙종15)에 환국(換局)되자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에 발탁되었는데,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이 모두 천거하였다.

 

상이 돈독히 유시하기를, “내가 경학(經學)에 뜻을 두어 날마다 강연(講筵)에 나아간다. 들으니 그대가 옛일에 해박하고 특히 경학에 정밀하다고 하니 만약 출입하여 토론한다면 반드시 보도(輔導)하는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나의 뜻을 헤아려서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이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유시하기를, “번연(幡然)히 생각을 바꾸기를 내 날마다 고대한다.” 하고, 곧 중신 권대재(權大載)의 말로 인하여 본도(本道)의 관찰사로 하여금 출사(出仕)하기를 권하게 하였다.

 

이에 소명(召命)에 응하여 올라가다가 도중에 장령으로 옮겨지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곧바로 공조 참의에 발탁되었다. 마침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廢位)되어 사저(私邸)로 나가 살았는데, 대신(大臣) 이하가 조정에서 다투어 간언(諫言)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감히 폐인(廢人)을 위해 말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는 하교가 있었다. 선생은 “물러나기를 청했다가 도리어 승진하게 되었고, 또 나라에 변고(變故)가 있는 때에 어찌 금령(禁令)에 걸려 한마디 말도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에 교외(郊外)에서 소(疏)를 기초하여 새로운 관직을 사양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모든 정사(政事)를 일신하시고 부지런히 강학(講學)하시니, 장차 몸을 닦고 집안을 바르게 하며 간언을 받아들이고 허물을 보충하시려는 것입니다.

 

장차 이남(二南)의 교화가 일어나 조정에서 군신(君臣)이 화합하는 성대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저보(邸報)를 보니, 마침 주상(主上)의 마음이 편치 않으셔서 중궁(中宮)을 동요케 하시니, 전하께 바라던 바가 전혀 아닙니다.

 

배필(配匹)의 관계는 인륜(人倫)의 시작이며 풍화(風化)의 근원이니, 혹시라도 불행히 그런 변고에 처하게 되더라도 또한 마땅히 도리(道理)를 힘써 다하고 은의(恩義)를 곡진(曲盡)하게 다해야 하고, 갑자기 엄한 결단을 내려 거조(擧措)가 합당함을 잃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 인종(仁宗)의 지나친 거조를 예로 들어 경계로 삼았다. 또 아뢰기를, “기휘(忌諱)하는 바에 저촉되는 말을 한다고 곧바로 역률(逆律)로 다스리는 것은, 옛날에 비방목(誹謗木)을 세우고 감간고(敢諫鼓)를 설치하던 뜻이 아닙니다.

 

속히 명을 도로 거두시어 언로(言路)를 넓혀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는, 현(縣)과 도(道)를 통해 올리고 승정원(承政院)에 올렸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선생은 진언한 것이 바쳐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번 세 번 힘껏 사양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참의로 옮겨졌다. 두 차례나 간절히 사양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경신년의 무옥(誣獄)은 속히 신원(伸冤)해 주어야 합니다. 허견과 이남이 화란을 바라고 역심을 품은 것은 하늘의 주벌(誅伐)을 피할 수 없으나, 이연(李㮒), 이환(李煥), 이혁(李爀)의 경우는 왕손(王孫)과 왕증손(王曾孫)인 지친(至親)입니다.

 

인군(人君)이 죄가 있는 공족(公族)을 처리할 때는 연좌(緣坐)를 해서는 안 됩니다. 세 사람은 10년을 유배되어 있습니다. 만약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어찌 사변(事變)에 처하여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한을 남기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두인(吳斗寅)이 비록 망언(妄言)하는 죄를 범하기는 하였지만 그 자식과 사위, 형제와 숙질(叔姪)까지 금고(禁錮)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상진(李尙眞)도 비록 금령을 무릅쓰고 소를 올렸지만 대신이고 연로하기까지 하니 궁벽한 곳에 유배되어 죽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였다.

 

다만 사직하는 일과 이상진의 일은 윤허하지 않았는데, 후에 등대(登對)를 인하여 다시 청하여 이상진은 위리(圍籬)에서 풀려 부처(付處)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시탄(柴炭)과 미육(米肉)을 하사하고 특별히 사관을 보내 전유(傳諭)하게 하였으니, 모두 각별한 은수(恩數)였다고 한다.

 

세 번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재촉하는 명이 더욱 다급해졌으므로 마침내 명에 응하고 주강(晝講)의 입시(入侍)를 인하여 내용에 따라 경계를 진술하였다. 강이 끝나고 또 규회(規誨)를 드린 것이 매우 절실하니, 상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선생이 늦게 산야(山野)에서 나와 처음으로 임금을 뵐 적에, 동작이 법도에 맞고 대답하는 것이 분명하고 시원하여 온 조정이 서로 경하(慶賀)하였으며, 상도 멀리까지 눈길로 전송하였다.

 

6월에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로 옮겨 임명되었다. 

당시에 복더위로 인해 강연(講筵)을 중지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선생이 소(疏)를 올려 정 숙자(程叔子 정이(程頤)가 여름 동안 서늘한 곳에서 소강(召講)할 것을 청한 것과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이 야대(夜對)가 주강(晝講)보다 매우 유익하다고 한 말과 우리 성종(成宗)께서 일찍이 행하셨던 것을 인용하고 아뢰기를, “마땅히 명유(名儒)를 선발하여 권강(勸講)하는 인원을 채우고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으로 윤번(輪番)하게 하고, 낮에는 자문을 구하고 밤에는 소대(召對)하신다면 개발(開發)ㆍ훈도(薰陶)의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간간이 태학(太學)에 나아가 제생(諸生)들을 불러 상읍례(相揖禮)를 행하고,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강론하면서 궁리(窮理)ㆍ수신(修身)ㆍ명체(明體)ㆍ적용(適用)의 요체에 대해 추론(推論)하였다. 그리고 글을 지어 관학(館學)의 생도(生徒)들을 통유(通諭)하기도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예조 참판으로 승진하고,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을 겸하였는데, 조의(朝衣) 1습(襲)이 하사되었다. 선생께서는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8월에 대사헌으로 옮겨졌다. 잇달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인현왕후가 사제(私第)에 거처한 뒤로 조정에서는 엄한 유지(有旨)를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다시 언급하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육례(六禮)를 갖추어 맞이하여 중궁(中宮)으로 정해져 지존(至尊)을 받든 지 거의 10년이 되는데, 지금 비록 죄가 있어 폐출(廢黜)되기는 했지만 여항(閭巷)의 사가(私家)에 두고서 그 늠료(廩料)를 끊어 버리고 조금도 관대하게 돌봐 주는 뜻이 없다면 지나친 결과를 면치 못할 듯합니다.

 

한나라 광무제와 송나라 인종이 진 황후(陳皇后)와 곽 황후(郭皇后)를 대우했던 고사(故事)를 따라 이궁(離宮)의 별관에 거처하게 하고 방위(防衛)를 설치하여 규금(糾禁)을 근엄하게 하며 늠료를 헤아려 공급해 주소서. 그리하신다면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에 있어 거의 곡진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번 분황(焚黃)하고 개장(改葬)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마침내 윤허하여 말을 지급하고 관청에서 제수(祭需)를 공급하게 하였다. 마침내 소를 올려 세 가지 조목을 아뢰었는데, 첫째는 백성들을 보호하여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말하고, 둘째는 장수를 가려 군대를 훈련시킬 것을 말하고, 셋째는 현자를 얻어서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를 말하였다.

 

그리고 청하기를, “승보시(陞補試), 학제(學製), 공도회(公都會) 등 잡과(雜科)를 혁파하고 그 액수(額數)만큼 다시 과조(科條)를 정하되, 정자(程子)의 학교에 관한 제도와 주자(朱子)의 공거(貢擧)에 관한 의론을 대략 모방한다면, 실행을 귀하게 여기고 형식적인 것이 바뀔 것입니다.” 하였다.

 

상께서 매우 칭찬하여 받아들이시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또 추가로 별도의 유시를 내렸는데, 내용에, “경이 일을 마치고 조정에 나오기를 기다려 학자들을 초빙하여 더불어 강론하고 가려서 직사(職事)를 맡기기를 경이 진달한 것처럼 한다면, 인재가 성하게 배출되고 세도(世道)가 크게 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해에 이조 참판으로 불렀다. 4월에 영양현(英陽縣)에까지 나아가 병을 고하고 돌아왔다. 6월에 세자 책봉례(世子冊封禮)를 행하는데, 선생께서는 아직도 원자 보양관을 맡고 있다고 하여 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랐다. 또 새로이 시강원 찬선(侍講院贊善)에 임명하는 명을 받았다.

 

도성(都城) 밖에 도착하여 대본(大本)과 급무(急務)에 대한 소를 올렸는데, 학문하는 방도를 논함에 있어서는 곧바로 심술(心術)의 은미한 곳과 천리(天理), 인욕(人慾)의 근저(根底)를 지적하고, 사욕을 잘 다스리는 공부를 통렬히 하여 감히 자신에게 관대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상이 비답을 내려 후하게 격려하였다.

 

책봉례(冊封禮)가 이루어지고 나서 장차 진하(陳賀)하려고 하였는데, 선생은 효사전(孝思殿)의 궤연(几筵)이 아직도 모셔져 있다고 하여 소를 올려 아뢰기를, “3년의 상기(喪期) 내에는 하례하는 일을 위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고, 연달아 다섯 번 글을 올려 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즉시 소를 갖추어 마땅히 떠나야 하는 네 가지 이유를 아뢰고 비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나와 지름길로 하향(下鄕)하였다. 상이 사관(史官)을 뒤쫓아 보내었는데, “함께 큰일을 하기에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라는 하교가 있었다. 연달아 사직하여 비로소 본직(本職)에서 체직되었다.

 

겨울에 대사헌으로 옮겨졌는데,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에 영남(嶺南)에 크게 기근(饑饉)이 들었는데,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은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담명(李聃命)이 자기 마음대로 감면해 주었다고 하여 문비(問備)를 청하였다.

 

신미년(1691, 숙종17) 1월에 선생이 사직하는 소(疏)를 통해 급암(汲黯)이 거짓으로 황제의 명을 빙자하여 창고의 곡식을 푼 것과 한소(韓韶)가 창고를 열어 유민(流民)들을 구휼한 일 등을 들고 아뢰기를, “옛날의 신하들은 매양 인심을 수습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는데, 오늘날의 논자(論者)들은 재용(財用)이 부족하게 되는 것만 근심으로 여깁니다.

 

유약(有若)의 ‘어찌하여 철법(徹法)을 쓰지 않습니까?[盍徹]’라는 의론은 결과적으로 우활한 것이 되고, 왕홍(王鉷)ㆍ양신긍(楊愼矜) 따위와 같이 되고서야 나라에 충성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목상(睦相)이 이에 성 밖으로 나가 스스로 논열(論列)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다. 그 사의(辭意)에 민망한 바가 있었으므로, 선생이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권 영상(權領相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이모(李某)는 직책상 간언(諫言)의 책임이 있어 소회(所懷)가 있을 때면 반드시 아뢰었던 것이니, 평소에 예우하던 신하를 하루아침에 꺾어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후한 비답을 내려 마음을 풀어 주었다.

 

3월에 안동(安東)까지 나아갔다가 병을 고하고 돌아왔다. 여름에 이조 참판으로 옮겨지자 연달아 고사(固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윽고 목상(睦相)이 상에게 소환하기를 청하고 영상이 계속해서 진언해 주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돈독하게 유시하고 반드시 함께 올라오게 하였다.

 

9월에 부득이 소명(召命)에 응하였다. 그보다 앞서 상의 연(輦)이 사육신(死六臣)의 묘(墓)를 지나게 되었는데,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고 관작(官爵)을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조정의 의론이 결정되지 못하였으므로 예관을 보내 수의(收議)하였다.

 

선생이 도중에서 헌의(獻議)하였는데, 대략에,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을 거스를 수 없어 그런 부득이한 거조를 행하셨거니와 저 육신(六臣)들은 절의(節義)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여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니, 곧 백이(伯夷)가 무왕(武王)을 그르다고 여긴 마음입니다.

 

공자(孔子)는, 주(周)나라 사람인데도 오히려 정벌을 말리다가 굶어 죽은 것을 두고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세조께서는 육신을 두고 후세에는 충신일 것이라는 하교를 하셨으니, 참으로 은밀한 뜻을 후세 자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번의 조치는 참으로 선조의 뜻을 잇고 사업을 계승하는 큰일입니다.” 하였다.

 

교외(郊外)에 도착하자 연일 소명에 응하기를 재촉하고 흥정전(興政殿)에서 인대(引對)하였는데, 위로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당시에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고 있었는데, 인하여 아뢰기를, “고인(古人)들은 이 책을 치평(治平)의 요체라고 하였습니다. 진덕수(眞德秀)가 몇 년의 공을 들여 찬집(纂集)하였는데, 이종황제(理宗皇帝)는 기쁘게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였습니다.

 

또 이학(理學)을 높이 포장(褒奬)하고 주자(朱子)와 같은 시대에 살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였으니, 학문을 좋아한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도 치적은 도리어 지리멸렬하였으니, 어찌 형식만을 숭상하고 실제로 체득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겠습니까. 부디 전하께서는 이것을 거울삼아 경계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선묘조(宣廟朝) 때에 간신(諫臣) 김성일(金誠一)이, 대신(大臣)이 뇌물을 받은 일을 논척(論斥)하였는데, 영상 노수신(盧守愼)이 이를 받아들여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선묘께서는 그 둘이 다 훌륭하다고 하였으니, 그 역량과 기풍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랬기에 중간에 위란(危亂)을 겪었어도 끝내는 중흥(中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선묘를 본받으셔서 노상(盧相)의 사례로써 대신들을 책려(責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신다면 종사(宗社)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한 언관(言官)이 대신을 핍박(逼迫)한 일로 성상의 뜻을 거슬렀으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일찍이 야대(夜對)에서 세변(世變)을 논하였는데, 상이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중조(中朝)의 문물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 임진왜란 때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재조(再造)해 준 덕분이 아니었으면 국가의 오늘이 어찌 있겠는가.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정축년(1637, 인조 15) 연간에 조선(朝鮮)에 죄를 묻자고 청한 이가 있었는데, 황제께서 이르기를, ‘저들이 참으로 형세가 급박했을 것이니, 죄를 묻지 말라.’ 하셨으니, 작은 나라를 이해해 주는 것이 지극하였다.” 하였다.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성상의 하교를 받드니 신도 모르게 감격하여 눈물이 흐릅니다.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비록 종묘사직을 위해 굴복하셨으나, 매월 초하루와 보름의 망궐례(望闕禮) 때면 반드시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셨습니다.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는 깊은 통분을 품고서 원대한 계책을 세우셨습니다만, 불행히도 중도에 승하하시어 천고(千古)에 무궁한 한을 남기셨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선대왕(先大王)의 뜻을 추모하여 인재를 거두고 군대를 훈련하여 천하에 변고가 생기기를 기다려 전하께서 하고자 하시는 바를 하신다면 어찌 하늘과 사람이 돕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믿을 만한 형세라곤 하나도 없으니, 모름지기 민생을 후하게 하고 군정(軍政)을 닦아서 근본을 튼튼하게 만든 뒤에야 마침내 무언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감탄하면서 이르기를, “경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말을 듣겠는가.” 하였다.

 

당시에 상이 자주 경연(經筵)에 나아가 주강(晝講)과 야대(夜對)를 하게 되면서 연달아 소견(召見)하였다. 선생은 성의(誠意)를 쌓아 감오(感悟)시키기를 힘써서 본문의 내용을 인하여 경계를 아뢰었는데, 절실하고 핍진(逼眞)한 말이 많았다.

 

상이 그때마다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추론하는 것 외에도 민정(民情), 시무(時務)와 억울함과 폐단들을 반복해서 논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소(疏)를 올려 덕을 증진시킴〔進德〕, 뜻을 세움〔立志〕, 상황에 맞게 대처함〔通變〕, 인재를 가려 임용함〔擇任〕, 인재를 육성함〔育才〕, 시간을 아낌〔惜時〕 등 여섯 가지 일을 논하였는데, 상이 매우 칭찬하여 받아들였다.

 

하루는 전석(前席)에서 상이 손수 담비 갖옷을 하사하였는데, 선생이 사례하고 아뢰기를, “고인(古人)의 ‘의군사군(衣君死君)’이라는 말을 신은 공경히 외우며 성은에 보답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한 말[斗]의 명주(明珠)를 받고서 천서(天書)에 대해 간언(諫言)하지 못한 것을 신은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신년(1692, 숙종 18) 1월에 간절히 사직하여 본직(本職)에서 체직되었다. 당시에 청(淸)나라 사람들이 장백산(長白山) 남쪽을 순시하고자 하였는데, 조정의 의론은 장차 길을 닦아 영도(迎導)하게 해 주려고 하였다.

 

선생은 계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극도로 논하여 아뢰기를,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에 선우(單于)가 공경히 복종하면서 변방의 방비를 철폐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낭중(郞中) 후응(侯應)만이 반대하면서 말하기를, ‘북쪽 변방의 음산(陰山)이 동서(東西)로 천 리나 되어 효무제(孝武帝) 때에 이 땅을 빼앗아 둔진(屯陣)을 설치하였는데, 흉노(匈奴)들이 그곳을 지날 때면 반드시 곡(哭)을 하였습니다.

 

방비를 철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장백산이 웅장하게 솟아 나라의 보장(保障)과 척추(脊椎)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를 베고 산을 깎아 개도(開導)하여 우리의 울타리로 삼는 바를 남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높은 곳에서 돌을 굴리는 듯한 형세를 이루어 주게 된다면, 서북(西北)의 땅은 장차 우리나라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이는 나라의 존망이 걸린 일이니, 숙고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마침 청나라 사람들이 그 일을 취소하였다.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아뢰기를, “대간(臺諫)은 임금의 이목(耳目)이니, 체례(體例)로써 속박하고 위분(位分)으로 억제해서는 안 됩니다.

 

대간이 논사(論事)할 때에 반드시 먼저 재상에게 고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군주도 재상에게 자문하여 그의 의견에 따라 받아들이거나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혹자는 그중에 대신(大臣)을 흔들려고 하는 뜻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당시에 상이 막 뜸을 뜨고 장맛비가 내리는데도 장차 광릉(光陵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능)에 나아가려고 하였다. 선생은 조섭(調攝)에 해가 되고 농사에 방해가 될까 봐 임시로 중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노기 띤 하교를 내렸다가 곧 영상의 말을 따라 통렬히 스스로 인책(引責)하면서 위유(慰諭)하기를 매우 정성스럽게 하였다.

 

이에 경신년(1680, 숙종6)과 임술년(1682, 숙종8)의 무옥(誣獄)이 아직 완전히 신원(伸冤)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뢰었다. 곧 체직되어 그날로 협곡(峽谷)을 따라 지름길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상이 사관을 뒤쫓아 보내어 전유(傳諭)하니, 위로하고 기대하는 것이 더욱 융숭하고 극진하였다.

 

여름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이조 참판에 옮겨졌다. 겨울에 도로 대사헌이 되었다. 연달아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계유년(1693, 숙종 19) 1월에 사직 상소를 통해 상언(上言)하기를, “전하께서 치적을 이루고자 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으나, 변한 것이 없이 차츰 기회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번 성균관에 내리신 비망기(備忘記)에는 완연히 삼대(三代) 때의 유의(遺意)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조치하는 과정에 있어서 준수한 인재들을 등용하고 덕행 있는 선비들을 맞아들이는 실제는 없고, 다만 호당(湖堂)에서 시취(試取)하는 것과 반궁(泮宮)에서 절제(節製)하는 것을 가지고 격려하고 진작시키는 일로 삼고 있습니다.

 

대신(大臣)들과 주사(籌司 비변사)를 접견할 때에도 나라를 경영할 원대한 계획을 내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단지 관리의 승진하는 범례(凡例)나 사안(事案)의 일반적인 규례를 가지고 하나의 큰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직언(直言)이 아뢰어지지 않으며 염치가 땅에 떨어져 비방과 찬사가 실정을 흐리고 여러 가지 변괴가 일어나고 있지만 묘당(廟堂)에서 일일이 아뢰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그 나라를 걱정하는 간절한 마음은 멀리에 있더라도 잊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3월에 사관(史官)이 특별 유시를 전했는데, 사지(辭旨)가 더욱 간절하였다. 또 재이(災異)로 인해 직언을 구하였는데, 덕정(德政)을 닦고 편사(偏私)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으로 힘써 사직하는 글을 통해 아뢰니, 상이 가납(嘉納)하고 재촉하기를 더욱더 부지런히 하였다.

 

4월에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니, 은혜로운 유지를 거듭 내리고 인견(引見)하고 더욱 후하게 위유(慰諭)하였다. 선생이 이로 인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장성(壯盛)하시고 지려(志慮)도 두루 꿰뚫게 되시어, 몸을 닦고 집안을 바르게 하는 것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데까지 모두 성법(成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러 희로(喜怒)가 치우침으로 인해 지나친 거조가 있음을 면치 못하시니,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것이 큽니다. 옛날 태갑(太甲)이 그 덕(德)을 줄곧 닦았는데도 이윤(伊尹)이 오히려 ‘덕이 떳떳하지 않으면 구주(九州)가 망할 것〔厥德靡常 九有以亡〕’이며, ‘덕이 한결같지 않으면 동함에 흉하지 않음이 없을 것[德二三 動罔不凶]’이라고 경계하였습니다.

 

부디 전하께서는 덕을 떳떳이 하고 한결같이 하라는 경계에 대해 더욱 마음을 기울이소서.”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였다. 강이 끝나자 나아가 짧은 차자(箚子)를 읽었는데, 대략에, “신이 듣기로, 복(福)이 일어나는 것도 모두 집안에서 근본하며, 도(道)가 쇠하는 것도 모두 집안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그 임금에게 고하기를, ‘부부의 구별이 엄하고 적서(嫡庶)의 구분이 바르며, 뇌물이 이르지 않고 청탁(請託)이 행해지지 않는 것을 집안이 잘 다스려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마음을 바로잡고 몸을 닦아 행위가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나의 덕에 복종하고 나의 위엄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집안을 바로잡고 인척(姻戚)을 단속하여 화란(禍亂)을 방지하는 근본이 됩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은 선묘께 아뢰기를, ‘참소하여 이간질하는 화는 제왕(帝王)의 집안에 특히 많습니다. 환관이나 아녀자들이 간사함을 속에 품고서 화란을 일으키기를 즐기며 세(勢)를 나누어 대치하여 많고 적음을 다투고 따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정상(情狀)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므로 한 번이라도 귀를 기울이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였습니다. 양현(兩賢)의 말씀이 지극히 통절(痛切)합니다. 전하께서는 천하의 사변(事變)을 겪으신 지 이미 오래되었고 전세(前世)의 득실(得失)을 살피는 것이 매우 분명하시니,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신은 그래도 지나친 염려를 이길 수 없어 감히 사전에 미리 경계를 아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과 같은 우국(憂國)ㆍ애민(愛民)의 정성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내 가슴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이때에 사람들이 모두 의심과 두려움을 품고서 감히 왕실의 일과 관련되는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선생은 홀로 진언(進言)하면서 기휘(忌諱)하는 바가 없었다. 같은 반열의 신하들이 심지어 목을 움츠리고 식은땀을 흘리기까지 하였는데, 상이 온화한 낯빛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물러 나와서 칭하(稱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 번 사직하여 체직되었다가, 병조 참판으로 옮겨졌다. 또 세 번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6월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승진되었다. 선생은 물러나기를 구하였다가 승진하게 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덕을 진보시키고 인재를 기르고 풍속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조목별로 나열하여 세 통의 차자(箚子)를 올리고, 옛날에 선비를 선발하던 법과 주자가 증손(增損)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이전에도 여러 번 아뢰었던 것이지만 그 규모의 치밀함이 이때에 이르러 더욱 갖추어졌다. 상이 묘당(廟堂)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영상(領相 권대운(權大運))이 종백(宗伯 예조 판서)으로 하여금 대제학과 함께 유신(儒臣)에게 나아가 충분히 검토한 다음 시행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7월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세 번 소(疏)를 올려 사양하고 또 면대(面對)하여 사양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에 대사간 강세귀(姜世龜)와 대사헌 권해(權瑎)가 연달아 임금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다.

 

선생이 아뢰기를, “설사 두 신하의 말이 지나쳐 마땅함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후하게 용납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니, 어찌 격한 노여움으로 꺾어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이후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장차 간언하기를 꺼릴 것이니, 성덕(聖德)에 어떠하겠습니까. 왕자(王者)는 거처함에 예(禮)가 있고 진퇴(進退)에 법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령(號令)과 거조(擧措)가 선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궁궐 안의 일은 엄밀(嚴密)하니 전하께서 한가로이 지내실 때의 절목(節目)에 대해서 신은 참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성을 보존하고 기르는 공부가 깊으면 반드시 창졸간의 과실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이때에 왕자가 태어났는데, 인하여 아뢰기를, “예(禮)에 왕의 적자(嫡子)와 서자(庶子)는 그 탄생한 초기부터 이미 등위(等威)의 차이가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미 세자를 책봉하였으므로 만약 그 등급을 분명히 하고 적서(嫡庶)의 구분을 엄격히 한다면, 국가의 다행이 될 뿐만 아니라 왕자에게도 복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칭찬하였다.

 

또 2품 이상의 관원에게 각각 인재 3인을 천거하게 하되, 덕행(德行), 문예(文藝), 재지(才智)로써 하도록 하고, 천주법(薦主法)을 거듭 엄격히 할 것을 청하였다. 또 군문(軍門)의 대장(大將)으로 하여금 각각 장수가 될 만한 사람 1인을 천거하게 하여 훗날의 쓰임에 대비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모두 따랐다.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기르는 두 가지 일에 대해서는 유지(有旨)를 내려 속히 거행하게 하였으나, 좌상(左相)이 “인심(人心)이 선(善)하지 못한 상황에서 향약(鄕約)을 시행하기는 어렵습니다.” 하고, 종백(宗伯)도 “선비를 뽑는 법은 절목이 많아 갑작스럽게 거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일단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은 고훈(古訓)을 따라 양제(良制)를 강구하여 포부를 한번 펼쳐 보려고 하였으나, 걸핏하면 견제를 당하자 마침내 돌아갈 생각을 하였다. 갑술년(1694, 숙종20) 세수(歲首)에 진정(陳情)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어리석고 광소(狂疎)하여 일의 실정에 밝지 못합니다.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길러 세도를 회복시키려는 경우에는 옛것에만 집착하여 뜻이 통하지 않아 묘당(廟堂)에서 국사(國事)를 경영하고 임금을 보필하려는 은미한 뜻과 어긋나게 되고, 세금을 줄여 생활을 넉넉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주려는 경우에는 그저 너그럽게 빌려 줄 줄만 알아서 원망을 감수하고 국사에 몸 바치는 묘당의 지극한 뜻에 어긋나게 됩니다.

 

그리고 관인(官人)을 뽑을 때 청탁(請託)을 두절시키려는 경우에는 신이 아는 사람을 들어서 제 뜻만을 주장하고, 굽혀서 인사상의 규례를 따르지 못합니다. 보국(報國)하겠다는 마음이 도리어 허망한 결과를 낳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으면서 조정을 어지럽히는 죄를 거듭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일곱 번이나 글을 올려 고사(固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분황(焚黃)하기 위해 휴가를 세 번 청하고서야 비로소 허락하고 말과 제수(祭需)를 지급하게 하였다. 하직 인사를 올리자, 인견(引見)하여 선온(宣醞)하면서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뜻을 깊이 보였다.

 

선생이 배사(拜謝)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임금이 만약 외침(外侵)이 없으면 반드시 연안(宴安)과 성색(聲色)을 즐겨 심지(心志)를 방탕하게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바로잡고 덕을 닦아 기강을 확립하시며, 세세한 오락거리를 멀리하고 원대한 계획을 세우소서.” 하였다.

 

상이 가납(嘉納)하고는 세자에게 명하여 나와 보게 하였다. 당시에 여섯 살이었으므로, 상이 환관을 돌아보며 세자의 뜻으로 유시하였다. 또한 속히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으니, 그 총애하는 뜻이 더욱 융숭하였다고 한다.

 

3월에 집에 도착하였다. 장차 소(疏)를 올려 은퇴를 청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뜻을 얻지 못한 무리들이 은화(銀貨)를 모아서 음모를 꾸미던 일이 발각되었다. 실정이 드러나 장차 처벌하려고 하였는데, 김인(金寅)이라는 자가 급변(急變)을 아뢰었다. 이에 상이 노하여 옥사(獄事)를 맡았던 신하들이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되고 대신(大臣), 승지(承旨), 삼사(三司)가 한꺼번에 파출(罷黜)되는 등, 국면(局面)이 일신(一新)되었다.

 

선생은 조정에 돌아오기 쉽지 않다는 이유로 개차(改差)하라는 유지가 내렸으나, 곧 대간의 논계(論啓)로 인해 영북(嶺北)의 홍원현(洪原縣)으로 유배되었다. 대개 참의(參議) 조사기(趙嗣基)가 일찍이 소를 올려 선후(先后)를 언급하였는데, 이것이 망발이라고 하여 논죄되었다.

 

선생이 성현은 말 때문에 사람을 벌하지는 않았다고 하자 상께서도 마침내 용서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장차 극형에 처해지게 되자, 변호했던 자들까지도 아울러 논죄한 것이다. 이때는 해기(駭機)가 갑자기 격해져서 사람들이 동요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선생은 홀로 태연하게 유배길에 올랐다.

 

5월에 막 홍원현에 도착하였을 때 또 금부(禁府)의 관원이 이르렀다. 이는 전에 선생이 중전(中殿)을 위하여 이궁(離宮)에 처하게 해 주기를 청한 소에 있는 ‘스스로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自絶于天]’, ‘방위를 두고 규금을 엄격히 해야 한다[設防衛 謹糾禁]’는 등의 말을 가지고 장령 안세징(安世徵)이 화심(禍心)을 속에 숨겼다고 하면서 조사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고산역(高山驛)에 이르자 국청(鞫廳)을 열라는 명이 또 한밤중에 내려왔다. 전에 아뢰었던 적서의 구별을 엄격히 하라는 설이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아 궐내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는 내용이 또 김인의 공초(供招)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서문중(徐文重)은 그것이 날조한 말이라 심문할 것도 없다고 하였으나 문사랑(問事郞) 김시걸(金時傑)이 헐뜯으면서 장차 사죄(死罪)로 얽으려고 하니, 화(禍)를 장차 예측할 수 없었다. 아들 재(栽)가 곁에서 울부짖었는데, 선생께서 천천히 이르기를, “화복은 운명이니, 너는 당황하지 말거라.” 하면서,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치대(置對)하게 되어서는 안세징이 부끄러워하며 실상을 잘못 말했다고 하면서 스스로 인피(引避)하였다. 또한 김인은 말이 자주 바뀌고 그때마다 궁색하여 사죄(死罪)로 얽을 사유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종성부(鍾城府)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는 것으로 논죄(論罪)하였다.

 

대개 곤궁(坤宮)이 출궁(出宮)하던 초기에 선생은 도리(道理)를 다하고 은의(恩義)를 온전히 하라는 뜻으로 경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궁(離宮)에 처하게 하기를 청한 것은 임금의 노여움이 아직 걷히지 않은 상태에서 감히 무고(無故)하게 폐(廢)하였다고 말할 수 없어서 완곡한 말로 임금의 뜻을 돌려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방위를 두고 규금을 엄격히 하는 것은 예제(禮制)에 근거하여 체모(體貌)를 높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도리어 죄안(罪案)을 만들려고 하니, 도대체 무슨 마음인가?국옥(鞫獄)은 엄준(嚴峻)하여 사람이라면 누구나 망연자실하기 마련인데, 선생은 유독 행보(行步)가 안정되고 사기(辭氣)가 온화하니 위관(委官) 이하가 눈길을 떼지 못하고 속으로 감탄하였다. 

 

한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칠순(七旬)의 몸으로 구금되어 있었는데도 태연하기가 마치 집안에 있는 것 같았다. 유배 길에 오르게 되어서는 여정에 시달려 지치고 초췌해졌으나, 정신과 기력은 갈수록 청건(淸健)해졌다.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신명(神明)이 보우(保佑)하신 것일 뿐만 아니라, 평일의 정력(定力)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

 

뒤따르며 전송하는 제생(諸生)들에게 이르기를, “환난(患難)은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바가 있으니, 노부(老夫)의 경우를 보면서 스스로 좌절하지 말고 장부(丈夫)의 기상을 더욱 면려(勉勵)하라.” 하였다.

 

극변(極邊)의 적소(適所)에 이르러서는 처하기를 태연하게 하였으며, 강독(講讀)하고 논저(論著)하는 데에 날마다 일과(日課)를 두었다. 손수 《주역(周易)》 고경(古經)을 필사(筆寫)하여 송(宋)나라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만들었던 옛 체제를 되살렸다.

 

북쪽 사람들이 의리(義理)의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었는데, 선생이 그중에서 우수한 자를 나아오게 하여 사서(四書)와 《소학(小學)》, 《가례(家禮)》, 《주자서(朱子書)》 등의 책을 가르치고 장려하여 더러 흥기(興起)한 자도 있었다.

 

정축년(1697, 숙종 23) 여름에 호남(湖南)의 광양현(光陽縣)으로 양이(量移)되었다. 무더위 속에서 다닌 것이 수천 리였는데, 정신이 더욱 왕성하고 안색이 더욱 윤택해지니, 지구(知舊)들이 보고서 모두 기력과 모습이 옛날보다 낫다고 감탄하였다.

 

배소(配所)에 도착한 뒤에는 다른 사람의 장서(藏書)를 빌려 밤낮으로 침잠(沈潛)하니, 근심을 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敬)을 지키고 이치를 살피는 공부가 더욱 정밀해졌다. 기묘년(1699, 숙종25) 2월에 방면(放免)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명이 있었다. 

 

그러나 곧 대간(臺諫)들의 반대가 있었으므로 마침내 진양(晉陽)에서 대명(待命)하였다. 다음 해 봄에 비로소 정계(停啓)하였으므로,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금양(錦陽)으로 돌아와 우거하면서 옛날에 익힌 것을 다시 새기면서 그 궁핍하고 노쇠한 것을 잊었다.

 

신사년(1701, 숙종  27) 가을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니, 무술(巫術)로써 저주(詛呪)하였다는 옥사(獄事)가 일어나 갑술년(1694)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에게 크게 벌이 가해졌다. 논자들이 다시 선생을 위리안치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행장(行裝)을 꾸려 놓고 대명하였다.

 

그래도 문하(門下)의 사람들과 날마다 명리(名理)를 강론하면서 근심하고 탄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해를 넘겨서 대간이 정계하였다. 이때부터 두문불출한 채 응접하는 일을 줄이고 오직 학자가 배우기를 청하면 문득 나아오게 하여 가르쳐 주니, 원근에서 문하에 들어 학업을 배우려는 자들이 날로 많아졌다.

 

그 재주의 고하(高下)에 따라 인도하고 깨우쳐 주니, 점차 감발(感發)되고 진작되는 효과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병이 위중해져서 갑신년(1704, 숙종30) 10월 3일에 우사(寓舍)에서 고종(考終)하셨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원근에서 탄식하면서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모두 도(道)가 무너지고 학문이 끊어지게 된 것을 애통해하였다. 서울의 인사들은 서로 도성(都城) 남쪽의 옛집에 자리를 만들고 모여서 조곡(弔哭)하였다.

 

다음 해 1월에 금양의 북쪽 산기슭에 장사 지냈다. 여러 고을의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에서 글을 지어 치제(致祭)하였으며, 장사 때에 모인 선비들이 300여 인이나 되었다.

 

병술년(1706) 9월에 복인(卜人)의 말에 따라 안동부(安東府) 남쪽 신석동(申石洞) 부건(負乾)의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선생의 외조(外祖)인 장경당(張敬堂) 선생(先生) 흥효(興孝)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두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독실하게 배우고 힘써 행하면서 후진(後進)을 교회(敎誨)하였다.

 

판서공이 그 문하에 들어 입신행기(立身行己)의 요체를 강구(講究)하였다. 장 부인(張夫人)은 규범(閨範)이 장중(莊重)하고 정숙(貞淑)하여 ‘여중학자(女中學者)’로 칭해졌다.

 

가정에서 직접 훈도(薰陶)시켜 많은 현인을 잉육(孕育)하였으니, 존재(存齋) 선생 휘일(徽逸)의 경우는 자임(自任)한 것이 중하고 조예가 깊어서 가학(家學)의 전통을 크게 천명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자품(資稟)이 탁이(卓異)하고 총명과 식견이 남보다 뛰어난 데다가, 훈도되고 배양되어 기본이 일찍 완성되었다. 조금 자라서는 중씨(仲氏)를 따라 강마(講磨)하여 기미(幾微)를 살펴 통하는 것이 무리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중씨 선생이 감탄하기를, “우리 아우는 인품이 높고 재주와 식견이 겸비되었으니, 필경 진흙으로 빚어 놓은 듯한 사람은 아니다.” 하였다. 초기에는 여러 책들을 널리 섭렵하여 경전(經傳)ㆍ자(子)ㆍ사(史)로부터 율려(律呂), 성력(星曆), 대연력(大衍曆), 참동계(參同契), 백가서(百家書)에 이르기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요처(要處)라도 모두 능숙하게 풀어 버리니, 중씨가 “어려운 책을 쉽게 읽는 것은 계통(季通)에게 뒤지지 않는다.”라고 칭찬하였다.

 

이미 지기(志氣)가 웅호(雄豪)하고 온축된 것이 경기(經奇)하여 기정(奇正) 등 병법(兵法)에 마음을 다하였다. 무후(武侯)의 유법(遺法)을 추연(推衍)하고 주(朱)ㆍ채(蔡) 선생의 설을 참고하여 〈신편팔진도(新編八陣圖)〉를 만들었으며, 융갈(戎羯)의 정형(情形)과 관방(關防)의 요해(要害)에 대해 넓고 자세하게 강구하였다.

 

이는 대개 장차 오랑캐를 물리쳐 치욕을 씻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도(吾道)에서 돌이켜 구하여 얻은 바가 있게 되어서는 외부에 대해서 참으로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학문은 주경(主敬)에 근본 하였는데, 강구(講究)하여 밝히고 복습(服習)하여 체득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들이 전한 것은 이 한 길뿐이니, 기울거나 치우치면 곧 학문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학자의 공부는 그저 장구(章句)를 외우는 것에 있을 뿐만이 아니다. 일용(日用)에서 거처할 적에는 공손히 하며, 일을 집행할 적에는 공경하며, 말은 성실하고 미덥게 하며, 행동은 돈독하고 공경하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참으로 공문(孔門)의 가법(家法)이다.” 하였으니, 그 종신토록 수용(受用)한 것이 오직 참으로 보고 실제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완색(玩索)하고 지순(持循)하기를 오래하여 황연(怳然)하게 지(知)와 행(行) 두 가지가 참전의형(參前倚衡)하는 듯하였다. 이에 학자(學者)들을 훈도할 때나 어전(御前)에서 아뢸 적의 말의 요지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에 보존하는 바가 날이 갈수록 완전해지고 아는 바가 날이 갈수록 투철하게 되니, 그 때문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 더욱 성실하여 소략(疏略)한 바가 없어져서 도가 완성되고 덕이 수립되었다.

 

흉금(胸襟)이 확 트이고 윤택이 얼굴과 등에 충만하여 거칠게 성내는 기상이 창졸간(倉卒間)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욕하고 꾸짖는 말이 노복(奴僕)들에게 미치지 않았다. 영총(榮寵)을 입었어도 더욱 겸손하였으며 험난한 일을 당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뚝하기가 높은 산악 같았으며, 온화하기가 봄바람과 같았다. 비록 평소에 위해(危害)를 가하면서 헐뜯던 자라고 하더라도 그 안색(顔色)을 보고 그 사기(辭氣)를 접하게 되면 모두들 물러나 자책하면서 “덕인(德人) 군자(君子)이다.” 하였다.

 

언행(言行)이 가정에서 믿음을 주고 은의(恩義)가 규문(閨門)에서 극진하였으며, 자제를 가르치고 남녀의 구별을 엄격히 하였다. 상제(喪祭)를 경건하게 행하였으며 친척 간의 친목을 돈독히 하였다.

 

재난과 곤궁을 구휼할 때에는 부지런히 하고 정성껏 하였다. 평생 주자(朱子)를 존신(尊信)하여 이미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꿰뚫었으며, 특히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라는 책에 힘을 써서 조정에서의 언론과 붕우 간의 문답이 대부분 여기에 바탕을 두었다.

 

학자들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아 줄 때에는 경문(經文)을 인용하고 현인(賢人)의 가르침을 들어서 논하였는데, 마치 자신의 말을 읊조리듯 하였다.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할 때에는 쓸데없이 번다한 말로써 범범하게 풀이하지 않았으며, 옛일을 상고하여 논사(論事)할 때에는 통절(痛切)하고 적당하여 인주(人主)에게 귀결되도록 하고자 하니, 동료들이 한결같은 말로 칭찬하기를, “진정한 강관(講官)이다.” 하였다.

 

만년에 성명(聖明)을 모시게 되면서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임금을 바른 도로 인도하고자 학문을 강론하고 자신을 살피라는 경계를 간절히 아뢰었고 세도를 만회(挽回)하여 순박하게 되돌리고자 인재를 육성하고 풍속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을 정성껏 아뢰었으나, 상황이 어긋나고 견제가 심해 끝내 효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의리상 온당치 못한 바가 있으면 진퇴(進退)를 구차히 하지 않았으나, 매번 정 백자(程伯子)의 ‘군신(君臣)의 의리는 크게 무도(無道)함을 당한 경우가 아니라면 끊어 버릴 수 없다’는 가르침을 외우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잠시라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학문과 도가 쇠해져서 이단(異端)의 말이 횡행하는 것을 깊이 근심하여 일찍이 이르기를, “퇴도(退陶 이황(李滉)) 선생이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글은 백세 뒤에라도 의혹이 없을 만한 것이다.

 

그런데 율곡(栗谷)은 곧바로 의리가 분명하지 않다고 배척하고 그 무리들은 전하여 조술(祖述)하면서, 공공연히 기(氣)를 이(理)로 인식하고 이를 공허(空虛)하고 명적(冥寂)한 물건으로 인식하니, 그 화를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을 바탕으로 하여 〈율곡사단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을 지었다.

 

지구(知舊)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모두 도산(陶山 이황)의 가르침을 발휘하고 추성(鄒聖 맹자(孟子))의 본지(本旨)를 천명하니, 도술(道術)이 그 때문에 밝아졌다.

 

존재(存齋) 선생께서 일찍이 “홍범구주(洪範九疇)에는 실로 성왕(聖王)이 수신(修身)ㆍ경세(經世)ㆍ재물(宰物)하는 대법(大法)이 들어 있다. 더구나 부사(父師 기자(箕子)의 가르침은 동방(東方) 만세(萬世)의 표준을 세운 것이니, 그 전(傳)을 달아 천명(闡明)하고 발휘(發揮)할 수 있다면 어찌 전대에 없던 큰 보전(寶典)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한창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수집하였는데, 책이 아직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그 조목(條目)을 그대로 따라 널리 채집하여 유별(類別)로 분류하고 강목(綱目)을 세웠으며, 실제 증거가 될 만한 일을 드러내고 의론을 밝히니, 책이 모두 20편이었다. 장차 성상께 올려 을람(乙覽)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하니, 식자(識者)들이 한으로 여겼다.

 

그전에 선생이 적소(適所)에 있을 때 사림(士林)이 존재(存齋)를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祭享)하였는데, 후에 선생을 받들어 함께 배향(配享)하였다. 부인(夫人) 박씨(朴氏)는 경력(經歷) 륵(玏)의 따님이고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증(贈) 호조 판서(戶曹判書) 의장(毅長)의 손녀이다.

 

숙덕(淑德)과 정조(貞操)가 있었으며, 선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영양현(英陽縣) 수비(首比)의 부진(負震)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4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천(梴), 의(檥), 재(栽), 심(杺)인데, 의는 존재 선생의 후사로 갔다.

 

딸은 김이현(金以鉉), 홍억(洪億), 김대(金岱)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사인(士人)이다. 여남(餘男 서자(庶子)이 또 셋이었으니, 전(槇), 련(槤), 반(槃)이다. 

 

손자가 12인이 있었는데, 지후(之㷞), 부환(復煥), 지료(之炓)는 천의 소생이고, 지익(之熤), 지확(之?)은 의의 소생이고, 지훤(之烜), 지번(之燔), 인환(寅煥), 지온(之熅)은 재의 소생이고, 두환(斗煥), 규환(奎煥), 성환(星煥)은 심의 소생이다. 손녀는 9인이다.

 

선생은 먼 후대에 궁벽한 고을에서 태어나 멀리 법문(法門)을 거슬러 올라 마음으로 체득하고 몸으로 실천하여 덕이 높고 학문이 넓었으며, 묻혀 버린 성현의 말씀을 천명(闡明)하고 실추된 정맥(正脈)을 부지(扶持)하였다. 세상을 울릴 만한 재주와 임금을 보필할 만한 학문이 비록 당시에 행해지지 못하였으나 또한 후세에 전해질 만하다.

 

어리석은 두경(斗經)으로서도 일찍이 선생께서 평상시에 처하거나 환난을 입었을 때에 덕을 살피고 범절을 받들면서 어떤 환경에서도 한결같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게 되었으며, 그 수양(修養)이 깊고 두터운 것에 탄복했다.

 

그러니 이제 광지(壙誌)를 써 달라는 부탁에 대해 감히 천학(淺學)하다고 사양할 수 없거니와, 부끄럽게도 문장이나 덕행의 실제가 부족하니 어떻게 제대로 기술하여 후대에 미덥게 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도옹의 고제로는 학봉(鶴峯)과 서애(西厓)를 치는데 / 陶翁高弟推鶴厓
경당이 뒤를 잇고 존재가 우뚝이 났네 / 敬堂繼微挺存齋
선생이 발휘하여 성현의 맥을 이었으니 / 先生發揮泝聖涯
밝으신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보필하였네 / 昭融契合弼方諧
요상한 무리들이 정숙한 미인을 질투하여 / 淫妖謠諑妒淑娃
빙설처럼 연무(煙霧)처럼 매섭게 몰아쳤네 / 氷雪霧嵐徧擠排
옥안(玉顔)이 쇠하지 않고 기운이 왕성하니 / 渥丹不瘁神氣佳
시원한 기상이 흉금에 충만하였네 / 光風霽月充襟懷
성현을 받들고 도를 수호하여 부정함을 물리쳤네 / 承聖衛道觝詖哇
하늘이 데려가 우리들을 탄식하게 하나 / 天不憖遺嗟吾儕
큰 가르침은 세상에 드러나 끝내 묻히지 않으리라 / 大訓揭世終無埋

 

46년 경자년(1720, 숙종 46) 5월 일에 후학(後學) 통훈대부(通訓大夫) 전(前) 행 사간원 정언(行司諫院正言) 영가(永嘉) 권두경(權斗經)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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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일원(一元)ㆍ십이회(十二會)의 수 : 일원은 세상이 열린 뒤부터 소멸되기까지의 한 주기를 말하는 것으로, 일원은 십이회(會)이고 일회는 삼십운(雲), 일운은 십이세(世), 일세는 삼십년(年)이니, 일원은 12만 9600년이 된다. 《皇極經世書 觀物》

 

[주02] 임금이 …… 물이다 : 임금이 정사를 함에 있어서 백성들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순자(荀子)》 〈왕제(王制)〉에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하였다.

 

[주03] 학문이란 …… 뜻하겠습니까 : 맹자(孟子)가 “공손한 사람은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검소한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남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빼앗는 임금은 오직 남이 나의 뜻을 따라 주지 않을까 걱정하니, 어찌 공손함과 검소함을 할 수 있으리요. 공손함과 검소함을 어찌 음성이나 웃음과 모습으로써 꾸며서 할 수 있으리요.” 하였다. 《孟子 離婁上》

 

[주04] 이남(二南)의 교화 : 이남은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인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으로, 모두 성군(聖君)이었던 문왕(文王)의 교화를 노래하였다.

 

[주05] 효사전 : 조선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의 혼전(魂殿)이다.

 

[주06] 유약(有若)의 …… 의론 : 춘추(春秋) 시대 노(魯)나라에 흉년이 들자 국가의 재용이 부족한 것을 걱정한 애공(哀公)이 유약(有若)에게 그 대책을 물었는데, 유약은 “어찌하여 철법을 쓰지 않으십니까.[盍徹]”라고 답하였다.

 

철법은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걷는 제도로서, 애공이 “10분의 2를 걷는 지금도 오히려 부족한데 어떻게 철법을 쓰겠는가.” 하자 유약이 이렇게 말하여 군주와 백성은 일체이므로 즐거움과 고통을 항상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 《論語 顔淵》

 

[주07] 왕홍(王鉷)ㆍ양신긍(楊愼矜) : 모두 당나라 때의 권신(權臣)들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새로운 명목의 세금을 거두자는 의론을 내어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 왕홍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 사람으로, 혹독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여 조야(朝野)에 해독을 끼쳤다.

 

양신긍은 당나라 현종 때의 사람으로 현종이 대부(大府)의 출납(出納)을 맡기자, “여러 고을에서 바친 포백(布帛)이 찌들어서 파손된 것이 있으니, 본 고을에 돌려보내어 절고전(折估錢)을 받고 저자로 보내어야 한다.”라는 의견을 내어 징수하고 조달하는 것을 번거롭게 만들었다.

 

[주08] 의군사군(衣君死君) : 유세가인 괴통(蒯通)이 한신(韓信)에게 한왕(漢王)인 유방(劉邦)을 배신하도록 설득하니, 한신이 “한왕이 나를 매우 후대하여 자신의 옷을 내게 입히고 자신의 음식을 내게 먹였다.

 

내가 듣기로 ‘남의 옷을 얻어 입은 자는 그 사람의 근심을 생각하고 남의 음식을 얻어 먹은 자는 그 사람의 일에 목숨을 바친다〔衣人之衣者 懷人之憂 食人之食者 死人之事〕’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이익 때문에 의리를 저버릴 수 있으랴.”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09] 한 말〔斗〕의 …… 간언(諫言) : 송(宋)나라 진종(眞宗)이 거란의 침공을 받아 전연(澶淵)에서 금품을 주고 맹약(盟約)을 맺었던 일을 부끄러워하여, 봉선(封禪)하여 사해(四海)를 진압하고자 꿈에서 신인(神人)이 천서를 내려 주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는데, 실제로 천서를 승천문(承天門)과 태산(泰山)에서 얻게 되자 군신들과 함께 미친 듯이 기뻐한 일을 가리킨다. 《宋史 卷6 眞宗本紀》

 

[주10] 조사기(趙嗣基)가 …… 언급하였는데 : 참의 조사기가 경신년(1680, 숙종6) 대출척(大黜斥) 때 유배당했다가 풀려나 돌아올 때, 도중에서 스스로 해명하는 소를 올리면서 송시열(宋時烈)이 찬한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지문(誌文) 중에 “태후가 밤에 임금과 함께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임금은 동쪽으로 향해 앉게 하고 태후는 문을 닫고 합내(閤內)에 계시면서 대신들을 불러 놓고 목 놓아 통곡했다.”라는 등의 말을 인용하고는, “시열의 당에서 무고하고 망극한 말로써 태후를 놀라게 한 것이 이와 같으니, 만일 성상께서 받들어 주선(周旋)하여 태후의 성심(聖心)을 깨우치게 하지 않았다면 당일의 여러 신하들은 이미 주륙(誅戮)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주11] 어려운 …… 않는다 : 계통(季通)은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 채원정(蔡元定)의 자로, 《성리대전(性理大全)》 권42에 “주자가 일찍이 이르기를, ‘다른 사람은 쉬운 책〔易書〕도 읽기 어려워하는데 계통은 어려운 책〔難書〕도 쉽게 읽어 낸다.’ 하였다.” 하였다.

 

[주12] 기정(奇正) : 병법(兵法)의 용어로서, 정면으로 접전을 벌이는 것을 ‘정(正)’이라 하고 매복(埋伏)이나 기습(奇襲) 등의 방법을 쓰는 것을 ‘기(奇)’라고 한다.

 

[주013] 주(朱)ㆍ채(蔡) 선생의 설 : 주희(朱熹)의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36에 보이는 제갈량(諸葛亮) 관련 기록과 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가리킨다.

 

[주14] 참전의형(參前倚衡) : 언제나 잊지 않고 항시 생각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늘 나타난다는 것을 말한다.

 

권경열 (역) | 2004

 

문헌 출처 : 갈암집 부록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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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葛庵李公墓誌銘 - 權斗經

 

大冢宰葛庵李先生棄後學之十有六年。叔子處士栽。使其子寅煥持家傳及行狀以命斗經曰。先君子遭遇不卒。擯廢以終。已歷年紀。而幽堂之銘。未有所屬。蓋有所待也。往歲 聖上察其無罪。 命復爵秩。而旋尼於黨人。地上之伸。若是乎難期。惟其伸於地下者。敢托於吾子。惟吾子圖之。斗經謝不敢當。要責不已。有不容終辭。謹按先生諱玄逸。字翼昇。李氏出鷄林。羅祖功臣謁平之後。勝國時有禹偁。分封載寧。爲載寧人。後自密陽移咸安。至孟賢用經學顯。官長玉署。子知縣璦。贅居寧海。子孫因家焉。生諱殷輔。副司直。 贈左承旨。生諱涵。文科宜寧縣監。 贈小宰。生諱時明。 康陵參奉。 贈吏曹判書。爲先生以上三世。判書公凡再聘金氏張氏。俱 贈貞夫人。張夫人以天啓丁卯正月己卯。擧先生。生有異質。未能言。輒指示廚婢前夕失匙處。六歲。言於判書公。人兩眉坼。象坤卦。因問八卦。對甚晢。判書公大奇之。九歲。賦花王詩。有何花爲丞相語。人識其爲公輔器。是歲。仲氏存齋先生問其志。對以願爲元帥。收復遼東。蓋憤遼瀋陷於金也。十許歲。作太極儀象奇偶生出之圖。推一元十二會年數。著爲成說。識者咸歎異之。旣成童。稽經探史。所畜日富。兼喜孫吳韜略。已而以向外浮泛。作五箴以自警。從判書公英陽首比山中。扁居曰葛庵。講習存省之功。益醇如也。 孝廟之喪。宋時烈議定 大王大妃服制。妄引體而不正之庶。斷爲朞制。禮訟起。動遭竄廢。嶺儒將追論。屬先生構疏。乃條駁時烈謬議。斷之曰。天子諸侯旣承序傳重。不當復論宗支嫡庶。致紛紜之疑。木齋洪公汝河見之歎曰。足以訂旣往之失。開後來之惑。甲寅秋。今 上嗣位。以 先王末命。首正邦禮。先生時居判書公憂。連有寢郞,社稷郞之除。丁巳夏。超授掌樂主簿。始起應 命。遷工曹佐郞。告歸。許文正公穆白 上曰。近觀李某。眞儒者。經席不可無此人。冬。拜司憲府持平。屢辭不允。翼年春。遂就職。轉工曹正郞。還持平。遂上明正學,振紀綱,恢公道,納忠諫,察民情五條疏。以 上新經大病。又以戒逸慾保身體之說。申告于終。 上嘉納。有金益勳者戚聯椒掖。驟除廣州府尹。先生駁正之。輿論稱快。俄遞職歸覲。始 上年十四。取君舟民水之喩。命繪事製圖說。以好學用賢納諫聞過賤貨而貴德五目。爲治國之要。先生以 聖質如許。而無人將順匡救。遂採經傳。爲圖說發揮六篇。草疏推明。歸宿於好問學。又言帝王之道必資五者。然學豈記誦之謂。賢豈順適之謂。納諫改過。豈內不然而外姑從之謂。儉而貴德。豈聲音笑貌爲之謂。貴乎眞知實踐。正己省躬。盡禮敬之實而已。終言偏重則無以行舟。非健則不利涉川。漏船亡楫。勢將昏墊。則喚醒梢工。畢力共濟。尤不可緩也。 上嘉歎。錫虎皮一令。庚申。堅,柟獄事起。黨人等復起而用事。宗室大臣以下。誅竄相繼。明年。吳相始壽下獄論死。又明年。有璽獄。大獄連年。人不自保。又明年春。以天變求言。先生以庚申七月。遭內艱。至是歎曰。吾而無一言。何以塞臣子之責。卽應 旨草疏。引古者災異之應。推今日所値之變。有曰毋乃 离明虧。而或有蔽塞之患。乾綱弛。而或有係攣之私歟。戚里之勢。或有專輒之漸。小大之獄。或有橫枉之冤歟。或是非顚倒。用舍有不公歟。終言應天以實不以文之意。親舊子弟交謁請寢而不聽。章旣上。首揆金壽恒請論以護逆。會有救者。事得已。己巳改紀。擢國子司業。大臣重臣僉薦。 上敦諭曰。予留心經學。日御講筵。聞爾博古。尤精經學。若出入討論。必有輔益。須體予意。從速上來。先生懇辭不允。諭以幡然改圖。予日望之。尋因重臣權大載言。 命本道勸駕。乃赴召在道。轉拜掌令。辭不就。俄擢工曹參議。會 仁顯王后廢處私第。大臣以下。廷爭不能得。有敢爲廢人言。論以逆律之敎。先生以求退得陞。且國有變故。豈可格禁令無一言。乃從郊外草疏辭新命。因言 殿下一新庶政。孜孜講學。蓋將修身正家。納諫補過。將興二南之化。庶見都兪之盛。伏見邸報。屬因 天心未豫。動搖中壼。殊非所望於 殿下者。配匹之際。人倫之始。風化之原。脫有不幸而處其變。亦宜務盡道理。曲全恩義。不宜遽用威斷。使擧措失當。遂擧漢光武,宋仁宗之過擧以爲戒。又言言涉忌諱。治以逆律。非古設謗木陳諫鼓之意。宜亟反汗。以廣言路。呈縣道投喉司。幷見寢。先生以進言不徹。力辭再三。終不許。遷吏曹參議。懇辭至再。因言庚申誣獄速宜伸雪。堅,柟幸禍將心。難逭天誅。至於㮒,煥,爀王孫若王曾孫。人君待宗族有罪。不緣坐。三人者十年投荒。如不終其天年。豈不貽處變不盡道之恨哉。又言吳斗寅雖坐妄言。不宜禁錮其子壻同生叔姪。李尙眞雖冒禁陳疏。大臣年老。不宜竄死窮荒。 上優批採許。惟不允辭職與李尙眞事。後因登對。更請李得徹棘付處。尋賜米肉柴炭。特遣史官傳諭。蓋異數云。三辭不允。促召愈急。遂拜 命。因入侍晝講。臨文陳戒。講訖。又規誨深切。 上皆嘉納。先生晩起山野。初見 君父。周旋中禮。敷對明暢。擧朝相慶。 上亦目送之。六月。移拜成均館祭酒。時以伏熱。久停講筵。先生陳疏。引程叔子暑月淸涼處召講之請。眞西山夜對之益深於晝講之語。及我 成宗所嘗行者。以爲宜選名儒充講員。輪番上下。晝訪夜對。庶有開發薰陶之益。間詣大學。招諸生行相揖禮。講大學章句。推言窮理修身明體適用之要。爲文通諭館學生徒。未幾。陞禮曹參判。兼 元子輔養官。頒朝衣一襲。先生辭不就。八月。遷大司憲。連辭不允。自 仁顯居私第。朝廷畏嚴旨。莫敢復言。先生疏言六禮所聘。正位中壼。奉承至尊。殆將十年。今雖罪廢。至於置閭家絶廩食。略無毫分假借。未免過當之歸。請依漢光武宋仁宗待陳郭故事。處以離宮別館。設防衛謹糾禁。量給廩料。則處變之道。庶幾曲盡。 上優批而不許。累以焚黃改葬乞歸。乃許給馬。官給祭需。遂疏進三條。一言保民固本。二言選將訓戎。三言得賢養才之方。而請罷升補學製都會雜科。就其額數。更定科條。略倣程子學校之制。朱子貢擧之議。貴實行而革文具。 上深奬納。令廟堂稟處。又追降別諭。有曰待卿完事登朝。招延學者。相與講論。擇差職事。如卿所陳。人才可以蔚興。世道可以丕變。旣還鄕翼年。 召以吏曹參判。四月。進至英陽。告病還。六月。有 東宮冊禮。以尙帶輔養官。力疾登途。又被贊善新命。至城外。上大本急務疏。其論爲學之方。直指心術隱微理慾根柢。欲其痛加克治。不敢自恕。 上下批優奬。冊禮成。將陳賀。先生以孝思殿 几筵未撤。疏言受賀非三年內改賀爲慰之意。連五章乞遞。不許。卽具疏言四當去。不待批徑出。便道下鄕。 上追遣史官。有無乃不足與有爲之敎。連辭。始遞本職。冬。移都憲辭。不允。時嶺南大饑。睦左相以方伯李聃命擅便蠲給。請問備。辛未正月。先生因辭疏擧汲黯矯制發粟。韓韶開倉活民等事而曰。古之人臣。每以收拾人心爲務。今之議者。徒以經用闕乏爲憂。是則有若盍徹之論。果然迂闊。而如王鉷,楊愼矜之徒。可謂忠於國矣。睦相於是出城自列。 上遣承旨慰諭。辭旨有未安者。先生上章自劾。權領相言李某職在言責。有懷必達。平日禮遇之臣。不宜一朝摧折。 上優批開釋。三月。進至安東。告病歸。夏。移亞銓連辭。不允。旣而睦相請 上召還。領相繼以爲言。 上遣史官敦諭。令必偕還。九月。僶俛赴召。先是 上輦過六臣墓。遣官致祭。命復官。廷議不決。遣官收議。先生在途獻議。略曰。 世祖大王迫於天命人心。爲此不得已之擧。彼六臣者抗節致忠。至死不變其心。卽伯夷非武王之心也。孔子周人。猶以諫伐而餓。爲求仁而得仁。況 世祖以六臣爲後世忠臣之敎。實示微意於後世子孫。今茲之擧。實繼志述事之大者。旣至郊外。連日促召。引對興政殿。勞問甚厚。時講大學衍義。因言古人以此書爲治平之要道。眞德秀積功纂集。理皇欣然進講經筵。旣又崇奬理學。恨不與朱子同時。可謂嗜學好賢。而治效反滅裂。豈非尙虛文無實得故耶。惟 殿下鑑此爲戒。又言在 宣廟朝。諫臣金誠一斥大臣受賕。領相盧守愼受以爲過。 宣廟稱其兩得之。其力量風采如是。故中經傾圮。卒能光復。願 殿下以 宣廟爲法。以盧相事責大臣。則 宗社幸甚。時言官以語逼大臣忤 上旨故及之。嘗夜對論世變。 上歎曰。中朝文物。今不可復見矣。壬辰之亂。微 神皇再造之力。國家安得有今日。崇禎丁丑間。有請問罪朝鮮者。 皇帝曰。彼誠迫於勢。勿問也。其體念小邦至矣。先生進曰。臣承 聖敎。不覺感涕。 仁祖大王雖爲宗社屈。每朔望望闕時。必西向慟哭。 孝宗大王抱深痛恢遠略。中途不幸。遺恨千古。 殿下能聿追先志。收人才鍊戎兵。俟天下有變。爲 殿下所欲爲。豈不爲天人所助。顧今無一可恃之勢。必須厚民生修軍政。以壯根本。乃可爲也。 上嗟歎曰。非卿安得聞此言。是時 上頻御經筵。晝講夜對。連次召見。先生務積誠意以冀感悟。因文陳戒。語多切逼。 上輒稱善。文義推說之外。物情時務。庶冤積弊。靡不反復論列。又上疏論進德立志通變擇任育才惜時六事。 上深加奬納。一日前席。 上手賜貂裘。先生謝曰。古人衣君死君之語。臣當秖誦圖報。受一斗明珠。不諫天書。臣實恥之。壬申正月。懇辭遞本職。時淸人將巡視長白以南。朝議且除道迎導。先生極言失計曰。漢元時。單于稽服請罷邊鄙。郞中侯應不可曰。北邊陰山東西千里。孝武斥地設屯。匈奴過之必哭。罷之不可。今長白雄峙爲障脊。而刊鑿開導。使我藩蔽入人包括。以成其臨高轉石之勢。西北之地。將非國家之有。存亡所關。不可不熟慮。會淸人寢其事。復拜都憲。言臺諫人主耳目。不可束以體例。抑以位分。非惟臺諫言事。不當先白宰相。人君亦不可咨宰相而爲之從違。或疑其有震撼大臣之意。時 上甫受灸。有雨潦而將詣 光陵。先生憂其愆攝妨農。請權停。 上有不豫語。尋因首揆言。痛自引咎。慰諭殊勤。迺以庚壬誣獄未盡雪爲言。俄遞職。卽日溯峽徑歸。 上遣史官追諭。所以慰藉而虛佇之者。尤極隆摯。夏。復拜憲長。秋。轉亞銓。冬。還都憲。連辭不起。癸酉正月。因辭疏上言 殿下願治多年。因循寢失。前日下成均館備忘記。宛然有三代遺意。及其施措。未有登良延德之實。只以湖堂泮宮試製。爲聳動振作之擧。大臣籌司延訪。未聞經國遠謀。只以遷進事面常規。將做一大事。直言蔑聞。廉恥道喪。毀譽亂眞。變異種種。未聞廟堂一二陳列云云。其憂國惓惓。處遠不忘如此。三月。史官齎別諭。辭旨愈懇。又以災異求言。以修德政祛偏私之意。力陳於辭章。 上嘉納。促召愈勤。四月。勉起趨朝。恩旨遄降。引見慰諭之加厚。先生因言 殿下春秋鼎盛。志慮周徧。自修身正家。以至治國御世。皆當有成法。或因喜怒偏私。不免過擧。則其累 聖德大矣。昔太甲克終厥德。伊尹猶戒以厥德靡常。九有以亡。德二三。動罔不凶。惟 殿下加意於常厥德不二三之戒。尋入侍晝講。講畢。進讀小箚。略曰。臣聞福之興。莫不本乎室家。道之喪。莫不始乎梱內。昔朱子之告其君。以夫婦之別嚴。嫡庶之分正。苞苴不達。請托不行。爲家之齊。而又以正心修身。動由禮義。使之服吾德而畏吾威。爲正宮梱檢姻戚防禍亂之本。先正臣李滉之告 宣廟曰。讒間之禍。帝王之家尤多。無非宦寺婦人挾姦樂禍。分勢角立。爭多較少。情狀萬端。一或傾耳。必至陷溺。兩賢之言。至爲痛切。 殿下閱事變旣久。鑑得失甚明則豈有是哉。而臣猶過慮。敢陳先事之戒。 上曰。非卿憂愛。何以及此。予當服膺焉。是時人懷疑畏。莫敢語涉宮闈。先生獨進言不諱。同列至縮頸汗下。及 上溫顏虛受。莫不退而相賀。三辭遞職。遷兵曹參判。又三辭而遞。六月。陞議政府右參贊。以求退得進。累辭不獲命。迺以進德育材正俗之意。條陳三箚。請行古者選士之法及朱子增損呂氏鄕約。蓋前此累以爲言。而其規模之密。至是尤備。 上下廟堂議。首相請令宗伯同大提學就儒臣熟講行之。七月。拜吏曹判書。三疏辭。又面辭。皆不允。時大司諫姜世龜,大司憲權瑎連以忤旨斥罷。先生言設令二臣言過中失當。猶當優容虛受。豈宜以威怒摧折之。自此廷臣將以言爲戒。其於 聖德何如。王者居處有禮。進退有度。故號令擧措。罔有不臧。宮省事禁。 殿下燕處之節。臣不得以知。然持養工深。則必無倉卒急遽之失。 上嘉納。時擧 王子。因言禮王之嫡子庶子誕生之初。等威已分。今旣冊  世子。若明等級嚴嫡庶之分。非但國家之幸。亦 王子之福。 上稱善。又請令二品以上。各薦人才三人。以德行文藝才諝。申嚴薦主法。又請令軍門大將。各薦堪爲將帥者一人。以擬他日之用。 上皆從之。正俗育才兩事。有 旨速擧行。左相謂人心不淑。鄕約難行。宗伯亦言選士節目多。似難猝擧。遂命姑停。先生沿古訓講良制。欲一展布。而動遭撓掣。遂決歸計。甲戌歲首。陳情乞退。略曰。臣愚戇狂疏。闊於事情。欲正俗育才。挽回世道。則泥古不通。有違廟堂彌綸輔贊之微意。欲薄斂裕下。少紓民力。則徒知容貸。有違廟堂任怨奉公之至意。欲爲官擇人。杜絶請托。則擧所知用己意。不能曲循人事上規例。報國之心。反歸虛妄。豈敢仍冒。以重迷誤之罪。章七上固辭。不許。又以焚黃乞假三請。始許。給馬庀祭需。陛辭。引見宣醞。深示惜去之意。先生拜謝因言人主若無外患。必有宴安聲色之玩。以蕩心志。願 殿下正心修德。立經陳紀。遠細娛而圖大計。 上嘉納。命 世子出見。時年六歲。顧侍璫諭 世子意。亦令速還。其傾注之意。蓋益隆云。三月抵家。將陳疏爲告老計。會有失志輩聚銀貨陰謀事覺。情輸行置辟。有金寅者上急變。 上於是怒。按獄諸臣。皆安置絶島。大臣承旨三司一倂罷黜。局面一新。先生以還朝未易。有 旨改差。尋以臺啓。有嶺北洪原之責。蓋參議趙嗣基嘗陳疏語引 先后。以妄發獲罪。先生言聖賢不以言語罪人。 上遂原之。至是將處極刑。並罪營救人也。時駭機猝激。人情震惴。先生獨夷然就道。五月。甫抵洪原。又有錦衣逮。蓋前此先生爲 坤宮請處離宮疏。有自絶于天及設防衛謹糾禁等語。掌令安世徵以爲藏禍心而請勘問也。行至高山驛。鞫廳之 命。又以夜半至。以前所陳嚴嫡庶之云。爲受指嗾探試者。出金寅招也。知事徐文重謂搆捏之言不足問。問事郞金時傑詆訐將甘心。禍且不測。男栽在側啼號。先生徐言禍福有命。爾無庸惶遽。神色不變。及置對。世徵懣然。以言事爽實自訟。金寅辭屢變輒窮。無以比極罪。乃論鍾城府圍籬安置。夫 坤聖出宮之初。先生以盡道理全恩義進戒而不徹。其請處離宮。以 天威未霽。不敢言無故而廢。欲以婉辭回天。防衛糾禁。所以據禮制尊體貌。而反欲搆成罪案。抑何心哉。鞫獄嚴峻。人靡不自失。先生獨行步安重。辭氣雍容。委官以下。屬目潛歎。盛夏蒸潦。七旬拘繫。晏然如處齋閤。及就長途。撼頓勞悴。精力愈淸健。人咸謂不惟神明扶佑。可占平日定力云。語諸生追送者曰。患難固有不虞。勿以老夫事自創。益勵丈夫之氣。旣至絶塞。處之怡然。講讀論著。日有程課。手書周易古經。存朱呂之舊。以北人不聞義理之學。進其秀者。授以四書小學家禮朱子書。誘掖奬進。間有興起者。丁丑夏。量移湖南之光陽。冒溽暑行數千里。神益茂色愈澤。知舊見者。咸歎氣貌勝昔。旣至。借人藏書。日夕沈潛。不但念絶牢愁。持敬觀理之工。益精以密。己卯二月。有 命放歸。旋有臺繳。遂待命晉陽。翼年春。始停 啓。歸寓永嘉之錦陽。溫理舊業。忘其窮且老。辛巳秋。 仁顯上賓。巫蠱獄起。大加罪甲戌人。論者復請處以栫棘。先生束裝待命。猶日與門徒講名理。憂歎不形。逾年而言者止。自是杜門簡應接。惟學者請業。則輒進而語之。遠近摳趨者日衆。因其高下。接引警誨。漸有感發振作之效。不幸病彌留。甲申十月三日。考終于寓舍。訃聞。遠近莫不咨嗟相弔。咸致道喪學絶之痛。京中人士爲位聚哭於城南舊館。明年正月。葬錦陽北麓。列邑校院操文致祭。會葬者三百餘人。丙戌九月。以卜人言。遷窆於安東府。南申石負乾之原。蓋先生外祖張敬堂先生興孝遊鶴,厓兩先生之門。篤學力行。敎誨後進。判書公從之講問立身行己之要。張夫人閨範莊淑。稱女中學者。家庭埏鑄。孕育多賢。如存齋先生徽逸任重造深。大闡家學之傳。先生天資超卓。聰識絶人。薰陶培壅。基本夙成。稍長。從仲氏講磨。硏幾徹微。迥出曹輩。仲氏先生歎曰。吾弟人品高才識備。畢竟非泥塗人也。始博極群書。經傳子史。以及律呂星曆大衍參同百家之語。刃迎縷解。於肯綮鉤棘處。仲氏稱其讀難書易。不下季通。旣氣豪志雄。蘊蓄經奇。究心於奇正戎機。推演武侯遺法。參考朱,蔡先生說。爲新編八陣圖。於戎羯情形關防要害。講討周悉。蓋將以攘夷湔恥者。迨其反求諸吾道而有得焉。則於外務固有所不遑矣。其學本之主敬而講究以明之。服習以體之。嘗言千聖相傳。只此塗轍。或倚一偏。便非善學。又曰。學者工夫。不但在誦說章句。日用之間。用力於居處恭執事敬言忠信行篤敬。此眞孔門家法。蓋其終身受用。只要眞見得實踐履。旣玩索持循之久。而怳然若知行二者參前倚衡。于以詔學者陳 王前話柄。不外乎此。以之所存日益完全。所知日益通透。反諸身者。益誠實無闕漏而道成德立矣。襟懷洞朗。面背睟盎。粗厲不形於倉卒。罵詈不及於僕隷。處榮寵而彌謙。履險難而不懾。嶷如山峙。溫若春噓。雖素忮害相訾謷者。苟承顏接辭。莫不退而自失曰。德人君子也。言行孚於家庭。恩義盡於閨門。敎子弟嚴男女。謹喪祭敦姻睦。救災卹窮。勤勤誠恪。平生尊信朱子。旣貫穿大全語類。而尤用力於節要書。立朝言議。朋遊問答。多本於此。訂學者疑誤。引經文擧賢訓。如誦己言。經筵進講。未嘗蔓語泛解。而證古論事。痛切的當。要歸之人主。班列一辭稱眞講官。蓋晩契 聖明。感激知遇。欲引君當道。則懇懇於講學省躬之戒。欲挽世還淳。則惓惓乎育才正俗之說。而鑿圜肘掣。卒無成效。於義所未安。進退不苟。而每誦程伯子君臣之義非大橫不可絶之訓。係心邦國。一飯不忘。深憂學微道衰。異言喧豗。嘗言退陶先生論四端七情書。可以俟百世不惑。而栗谷直斥以義理不明。其徒傳述。公然認氣爲理。認理爲空虛冥寂物事。其禍不可勝言。乃本程,朱定論。著栗谷四端七情書辨。及與知舊書。皆發揮陶山之訓。闡鄒聖本旨而道術以明。存齋先生嘗以洪範九疇。實聖王修身經世宰物之大法。況父師之敎。立東方萬世之極。有能闡發其傳。豈非曠世鴻典。方蒐輯洪範衍義。書未成而沒。先生因條貫廣採摭。彙分類編。立綱張紀。著事證而明議論。書凡二十編。將以上備 乙覽而不果。識者恨之。先是先生在謫時。士林祀存齋於仁山書院。後奉先生幷享焉。夫人朴氏。經歷玏之女。兵馬節度 贈大司農毅長之孫女。有淑德貞操。先沒。葬英陽縣首比負震原。有四男三女。男梴,檥,栽,杺。檥出後存齋先生。女適金以鉉,洪億,金岱。皆士人。餘男三。槙,槤,槃。孫男十二人。之㷞,復煥,之炓梴出。之熤,之?檥出。之烜,之燔,寅煥,之熅栽出。斗煥,奎煥,星煥杺出。孫女九人。先生晩出窮鄕。遠溯法門。心得躬行。德崇業廣。闡微言於旣晦。扶正脈於垂墜。命世之才。佐王之學。雖不得行諸當時。而亦可以垂之後世。斗經之愚。蓋嘗考德承範於處常蒙難之際而心識乎夷險一致者。竊歎所養之深厚。今於壙誌之托。不敢以膚淺辭。而愧乏能言德行之實。其何能模狀而傳信於後。是可懼也。銘曰。

陶翁高弟推鶴厓。敬堂繼微挺存齋。先生發揮泝聖涯。昭融契合弼方諧。淫妖謠諑妬淑娃。氷雪霧嵐徧擠排。渥丹不瘁神氣佳。光風霽月充襟懷。承聖衛道觝詖哇。天不憖遺嗟吾儕。大訓揭世終無埋。

四十有六年庚子五月日。後學通訓大夫前行司諫院正言永嘉權斗經撰。 <끝> 

 

갈암집 > 葛庵先生文集附錄卷之三 / [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