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 수로군 진린(陳璘)의 ‘갑질’과 반성
2018/02/14 10:57 등록 (2018/02/14 10:57 수정)245
김동철 기자 (youth@babytimes.co.kr)
명나라는 1596년 말, 명과 왜의 오랜 강화협상이 깨지고 1597년 2월 왜군이 재침(정유재란)하자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1597년 12월 22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양호와 권율의 연합군은 울산성을 공격했는데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명군은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이란 최후의 일격을 가할 비책을 마련했다.
조선과 명나라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1598년 8월 명나라 병부상서(국방장관) 겸 총독군무 형개(邢玠)는 조명연합군을 결성하여 남해안에 웅거하는 왜군을 일거에 섬멸할 방책으로 사로병진책을 구상했다. 육군을 전라도 방면의 서로(西路), 경상우도 방면의 중로(中路), 경상좌도 방면의 동로(東路) 세 갈래로 나누고 여기에 수로군을 편성하여 네 갈래로 총공격을 하는 작전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진린의 수로군에 소속되었다. 실제 조선의 총책은 경리 양호로 그는 한양에 부임하자마자 경리아문(經理衙門)을 설치하고 선조가 이양한 전시작전권을 행사했다.
‘천자(天子)’의 나라인 명나라를 극진히 섬기는 선조는 양호는 물론 명군 장수들을 접견할 때마다 먼저 절을 하는 등 굴종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니 조선군 수뇌부 앞에 선 명군의 기세는 등등했고 안하무인의 거만을 떨었다.
진린은 1598년 4월 요동에 도착했고 중순 한성에 들어왔다가 7월 16일 이순신의 진영이 있는 고금도에 도착하여 조선수군과 합류했다. 그리고 진린의 임무는 등자룡, 이순신과 함께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포악하고 사나운 성품의 진린에 대해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상(上)이 청파까지 나와서 진린을 전송하였다. 나는 진린의 군사가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함부로 하고 노끈으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역관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있던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장차 이순신의 군사가 안타깝게도 패하겠구나. 진린과 진중에 함께 있으면 행동을 견제당할 것이고 의견이 맞지 않아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기고 군사들이 학대당할 것이다.’
망해가는 나라를 다시 세워주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 진린에게서 가히 점령군과 같은 거만스런 위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런 진린이 원리원칙의 ‘깐깐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진영에서 작전을 수립한다면? 분명히 마찰이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자신을 버리고 대의를 따르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낮은 자세를 취했다.
선조 수정실록 1598년 8월의 기록이다.
“진린이 고금도에 내려온지 3일만인 7월 19일 절이도(折爾島 거금도) 해전이 벌어졌다.
18일 적 함대 100여 척이 금당도(고금도와 거금도 중간의 섬)로 침범해 온다는 급보에 접하고서 이순신 장군은 전함대에 출동 태세를 갖추도록 한 다음 그날 밤에 길목인 금당도로 전진 결진하여 그곳에서 철야했다.
그러나 이때 명나라 수군은 합세하지 않고 안전해역에서 후행하면서 관전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7월 19일 새벽에 일본함대가 절이도(거금도)와 녹도(소록도 근처) 사이로 뚫고서 금당도로 나올 때 이순신 함대는 이를 요격하여 적선 50여 척을 분멸시켰다.”
이때 진린은 구경만 하고 있다가 전과(戰果)에 욕심이 나서 이순신에게 협박을 함에 할 수 없이 적의 목 벤 것 40개를 진린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천군(天軍)’이라는 대국의 원군(援軍)이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고 소국의 전과를 탈취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심지어는 백성의 수급을 모아 전공으로 보고하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은 왜적의 수급(首級)은 주되 진린과 합동해서 왜의 퇴로를 막을 심산이었다.
허나 명군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자세로 남의 일보듯 했다.
이순신 군영은 고금도 덕동에, 진린은 묘당도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고금도와 묘당도 사이의 좁은 해협이 연육(聯陸)되어 걸어서 갈 수 있다.
그래서 고금도는 묘당도의 다른 이름이다.
명군이 주둔한 인근 조선수군 및 백성들은 명군의 약탈과 행패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갑(甲)의 농간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먹을 것을 빼앗는 것은 물론, 아녀자들이 겁탈당하고 은비녀, 은수저, 옷감 등 값나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빼앗겼다. 민폐가 심해지자 장군은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이충무공전서 기록이다.
“명나라 군사들이 자못 약탈을 일삼기 때문에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몹시 고통스러워한다.
참다못한 이순신은 부하 장졸들에게 모든 가옥을 한꺼번에 헐어버리라고 명령하고 자신의 옷과 이부자리도 배로 끌어내어 싣게 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진린이 부하를 시켜 그 연유를 물었다.
이순신이 답하기를 ‘우리 작은 나라 군사와 백성들은 명나라 장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마치 부모를 기다리듯 하였는데 오히려 귀국의 군사들은 행패와 약탈을 일삼고 있으니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피해서 달아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대장으로서 혼자 여기 남을 수 없어 같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것이다.’고 했다.”
부하의 보고를 받은 진린은 깜짝 놀라 달려와서 이순신의 손을 잡고 만류를 청했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대인이 내 말을 들어준다면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하니 도독이 “어찌 내가 안 들을 리가 있겠소.”라고 했다.
이순신은 “귀국의 군사들이 나를 속국의 장수라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소.
그러니 만일 내게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준다면 서로 보존할 도리가 있겠소이다.”하니 진린이 쾌히 승낙했다. 그 이후로부터 이순신은 명군의 처벌권을 가지게 됐고 범법자는 가차없이 처벌하니 명나라 군사들도 이순신을 도독보다 더 무섭게 알게 돼 백성들이 편해졌다.
이 와중에 전공(戰功)을 두고 명나라 장수들 사이에 견제가 심하였다.
1598년 9월 10일 선조실록이다.
“진 도독이 신을 불러 ‘육군은 유정 제독이 총괄하여 통제하고 수군은 내가 당연히 총괄하여 통제해야 하는데 지금 듣건대 유 제독이 주사(舟師 수군)를 관장하려한다 하니 사실인가?’ 하기에 신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신이 주사를 정돈하여 바다로 내려가서 기회를 틈타 왜적을 섬멸하려 하여도 매번 도독에게 중지당하니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렇듯 이순신 장군은 유정과 진린 사이에 끼어 운신의 폭이 아주 좁았다.
그런데다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하들을 시켜 금과 비단, 술과 고기, 장검 등 선물을 가져와서 진린에게 안기고 갔다. 그러면서 “이순신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철군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전했다.
진린 입장에서는 왜군의 선물도 듬뿍 받고 이순신이 바치는 적의 수급도 받아 꿩 먹고 알 먹는 재미를 보는 게 최상이었다. 전투는 어차피 지역사정을 잘 아는 승전(勝戰)의 장수인 이순신에게 맡겨놓아도 된다는 심산이었다.
이순신은 명실상부한 연합작전의 수행을 위해서 진린의 마음을 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진린을 위해 술자리를 자주 베풀었다.
진린의 마음이 점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군의 우국충정에 감동을 한 것이다.
진린은 이순신을 부를 때도 존칭인 ‘이야(李爺)’라고 불렀다. 야(爺)는 남자의 존칭으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야(李爺)같은 장수가 조선에 있는 게 아깝소. 명나라에 가서 장수를 해야하는데...”라고 아쉬워했다.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을 때 진린은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과 선조에게 이순신의 뛰어난 전공을 알렸다.
진린의 건의에 따라 이순신은 전쟁이 끝난 뒤 여진족을 막는 요동의 명나라 도독이 될 뻔 했다.
신종은 이순신에게 도독(都督)의 직함을 내리고 명조팔사품(明朝八謝品)을 하사했다.
이 팔사품은 도독인(都督印), 영패, 귀도, 곡나팔, 참도, 남소령기, 홍소령기, 독진기 등인데 현재는 모두 통영 충렬사에 보관되어 있다.
장군에게는 이렇듯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진실된 우국충정의 성심(誠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 역사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부사 이성곤에 대한 추고(推考) (0) | 2019.09.01 |
---|---|
당나라 깬 양만춘은 가공인물..연개소문 '밀사 외교' 먹혔다 (0) | 2018.09.30 |
통일혁명당사건 (0) | 2018.02.11 |
연좌 3족 멸문지화(緣坐 三族 滅門之禍) (0) | 2017.12.24 |
2008년 12월 19일 "위장 귀순 이중간첩 이수근씨 무죄판결" (0) | 2017.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