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조국 광복의 지도자 보재 이상설선생 사적비

야촌(1) 2010. 3. 16. 05:09

■조국 광복의 지도자 보재 이상설선생 사적비

 

조국을 찾아 민족의 정기를 세우려던 수많은 애국지사들 중에서도 광복의 최고 지도자는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이시다. 

이상설 선생은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를 에워쌌던 무렵인 1870년(고종 7년) 12월 7일 이곳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선비 이행우(李行雨)와 벽진 이씨(碧珍李氏)의 장남으로 탄생하시었다.

 

선생의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본관은 경주이씨(慶州李氏)이고,  고려 말의 명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22대 손이 되시며, 어려서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지내시던 이용우(李龍雨)에게 출계(出系=양자)하여 학문에 전심하시었다.

 

선생은 25세가 되던 해인 1894년 갑오문과(甲午文科)에 급제하시고, 이미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문을 조술(祖述)할 학자로 칭송되리만큼 학문이 숙성하시었다. 그 후 관계에 나가시어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 등을 거쳐 27세에는 성균관 관장(成均館館長)에 오르시었다.

 

그 후 관직이 더욱 승진하여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법부(法部)와 학부(學部)의 협판(協辦) 등을 두루 거쳐 36세가 되던 해인1905년에는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발탁되시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해 11월 소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라는 국가와 민족의 비운을 맞이하여 순국(殉國)의 결의로 그 조약 파기에 진력하시었지만,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다섯 차례에 걸친 사직소를 올리어 관직을 벗고, 저 유명한 해아사행(海牙使行)을 비롯한 국권수호와 그를 이은 조국독립운동에 온 생애를 바치어 조국광복의 지도자로 현신하시었다.

 

선생은 구학문을 수학한 왕조관인(王朝官人) 이시지만 누구보다 앞장서 근대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여 구미(歐美)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섭취하시었고 영, 러, 일어를 자습 득해하시었다.

 

또한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금을 올리고 옥을 깨는” 명문장으로 칭예되시었다.

 

더욱이 선생은 격변하는 세계정세와 국제정치를 탐구하시어 간난 한 국가와 민족의 진로를 밝힐 수 있는 당대의 동량(棟梁)으로 추앙되시었고, 또한 선생은 스스로 앞장서 그를 구현하기 위하여 형극에 찬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시었다.

 

선생의 그 같은 활동 중 두드러진 것을 들면, 우선 광무황제의 특명을 띠고 1906년 8월 헤이그에 가시는 도중에 북상한 한민족이 개척한 북간도 중심지 용정(龍井)에 근대적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개숙하시었다.

 

근 백만의 한민족이 교우(僑寓)하는 서북 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와 시베리아 연해주지방에 민족주의 교육을 펴고, 나아가 조국광복운동의 기지화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서전서숙은 그 다음해인 1907년 헤이그로 사행하는 이유에서 선생의 동지인 여준(呂準) 등에 맡겨져 잠시 더 운영되었으나, 곧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폐숙하였다.

 

그러나 그 건립의 목적과 이념은 가까이는 명동학교(明東學校)와 서간도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동북만의 대전학교(大甸學校)로 이어지고, 멀리는 국내의 각 지방마다의 한민족의 터전에는 어디에나 이와 같은 민족주의 교육이 확대되어 수많은 광복전선의 역군이 배출될 수 있었다.

 

다음 1907년 6월에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의 특사로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을 대동하고 참석하시어 한국의 주권수호를 위한 국제외교를 시도하시었다.

 

국망(國亡)을 저지하려던 최후의 구국외교인 이 비밀사행에 선생은 온갖 고초 끝에 회의장에 당도하시었으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협상의 성격을 지닌 이 회의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치 못하시었다.

 

그러나 선생으로서는 일제에게 짓밟히는 한국의 실정을 국제공의(公議)에 제기시키고자 최선을 다하시었다. 또한 그 길로 윤병구(尹炳球). 이위종(李瑋鍾). 송헌주(宋憲澍) 등을 대동하시고 영. 불. 독. 미. 러. 제국을 순방하시면서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關鍵)임을 주장하고 나아가 한국의 영세중립(永世中立)을 역설하시었다.

 

1909년 봄까지의 이와 같은 선생의 폭 넓은 국제적 활동이 민족수난에 접어든 한국민족의 독립 문제를 비로소 국제정치에 제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선생은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 두 의사의 샌프란시스코 의거 전후 미국 내에서 한인사회의 규모가 큰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하와이와 미주본토 및 멕시코를 포함하는 7천여 한인사회의 단합과 조국독립운동에의 헌신을 제창하시었다.

 

그 결과 태평양연안의 한인사회는 물론, 멀리 중국 본토와 서북 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 그리고 연해주의 한인사회까지 호응. 동서에서 조국독립운동의 의기(義氣)를 떨치게 되는 해외 한인사회의 민족주의가 성장하였다.

 

이 무렵 선생은 샌프란시스코공립회관에 머물면서 각지 한인사회의 자치와 조국독립운동을 주도한 중추기관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건설에 “은연히 고문이 되어 대사를 협찬”하고 계시었다.

 

그 후 1909년 여름 러시아 시베리아 연해주(沿海州)에 망명지를 정한 선생은 13도의군(十三道義軍)과 성명회(聲明會). 권업회(勸業會).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 등을 조직지도하여 일제와의 일관된 항일운동을 계속하시었다.

 

그 중 십삼도의군에서는 연해주를 근거지로 1910년 전후 국외의병을 통합, 최후의 구국항일전을 결행하려던 것이다. 

또한 이 13도 의군에서는 광무황제의 러시아 연해주 망명을 기획. 망명정부를 세우려고도 하였다.

 

더욱이 성명회에서는 1910년 8월 일제의 소위 한일합병조약 반대와 무효화운동을 전개하고 미국, 러시아, 중국 등 대한제국과 수교하였던 모든 나라에 대하여 일제의 침략규탄과 한민족독립의 정당성을 밝히는 선언서(宣言書)를 보내기도 하시었다.

 

선생은 유인석(柳麟錫). 이범윤(李範允) 등 8,624명에 달하는 조국광복운동자의 서명이 붙은 이 선언서에서 “우리는 세계 속에서 대한국(大韓國)의 국호를 지키고, 한 국민은 대한국인민(大韓國人民)이란 지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기필코 광복에 도달할 때까지 일본침략자와 혈전(血戰)하기로 한 것이다”라고 조국의 광복의지를 표명하시었다.

 

선생은 이 같은 활동을 기반으로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정재관(鄭在寬). 이종호(李鍾浩) 등과 함께 시베리아 연해주와 압록. 두만강 너머의 서북간도. 멀리 하와이와 미주본토에 교우하는 모든 해외한민족을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의 터전으로 삼고, 1914년에는 연해주에 국권상실 후 최초의 망명정부의 이름을 전할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세워 그 정통령(正統領)에 추대되어 국내외 민족운동을 총령하시었다.

 

그러나 대한광복군정부는 수립 후 곧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 틈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일제와 러시아의 합동 탄압으로 표면적 활동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도 조국광복을 위한 혈전의 준비는 멈추지 않고 신한혁명당의 조직과 활동을 통하여 국내와 연계하며 중국과 러시아 영내에서 은밀히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상설선생은 조국광복을 못 보시고 1917년 3월 2일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48세의 한창나이로 천추의 한을 품으신 채 영서(永逝) 하시었다. 젊어서도 병약하여 몇 차례 요양하시던 선생은 10여 년 동안 해외에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조국광복에 심신을 다 바친 까닭에 1916년부터는 피를 토하는 중병으로 병석에 누우시었다.

 

그리고 1년을 두고 투병하시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임종에 가까워지자

 

“동지들을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문고(文稿)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기시었다.

 

이상설선생의 유업은 컸다. 선생이 영서한 2년 뒤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3.1운동이라는 거족적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선생의 가ᄁᆞ운 동지인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회영(李會榮). 조성환(曺成煥). 이시영(李始榮) 등은 선생의 유지를 계승하여 중국 상하이에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워 국내외 독립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선생이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시베리아 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성립되어 조국독립을 새로 다짐하면서 일제와의 혈전을 선언하였다. 또한 서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에서는 그동안 양성된 광복군을 바탕으로 대한군정부가 세워지고 여러 독립군단도 항전체제로 정비되어 1920년대 독립군의 강인한 항일전이 펼쳐졌다.

 

미주의 한인들은 독립대회를 열어 세계여론에 한국의 독립을 외치고 군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새로운 각성과 민족역량의 향상을 꾀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선생의 유업인 한국민족의 광복은 보다 밝게 비쳐진 것이다.

 

광복을 맞아 대한민국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고 각급학교국사교과서에 선생의 독립운동의 사적이 수록되어 자라나는 학생이 배우고 있다. 또한 향리에 숭렬사(崇烈祠)를 비롯하여 북간도용정에 이상설선생역사전람관(李相卨先生歷史展覽館)과 연해주 우스리스크 유허지(遺墟地)의 유허비와 최근 숭렬사 옆에 기념관 건립 등의 숭모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비록 혈육은 부인 달성서씨(達城徐氏)와의 사이에 장남 정희(庭熙)와 갑희(甲熙). 가희(家熙)의 2녀를 두는데 그쳤으나 민족정기의 후계자는 만대에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2010년 3월 일

李在薰 삼가짓고

OOO 쓰고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