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돌아오지 않은 밀사 이상설

야촌(1) 2009. 12. 26. 04:11

■ 이상설을 돌아오지 않은 밀사라고 하던데......?

 

godardian   2003.12.20 01:57

답변 1

조회 2,510

여기 보니까 이준열사에 관한 건 많이 있는데
이상설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의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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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입니다.

pallermo

답변채택률 79%

2003.12.20 03:16

 

질문자 인사

감사합니다.

 

이상설은 굉장한 천재입니다. 1870년 충북 진천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익혀서 이미 20대에 율곡 이이를 일찍 따라갈만할 학자라고 칭송받을 정도로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9세기 말 변화하는 정세를 보고 성리학을 과감히 포기한채 신학문에 매진하게 됩니다.

 

선교사인 헐버트에게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우고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에도 정통한 인물입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3개고시를 모두 패스하고도 남을만한 천재죠. 1894년 문과에 급제해서 비서감, 비서랑을 거쳐 정사부 의정부 참찬을 역임합니다.


점점 일본의 마각이 드러나는 1906년 초 부터 국내의 독립지사들은 3가지의 항일운동을 준비합니다. 1. 국내의 항일운동단체 설립 2. 국외의 항일기지 건설 3. 만국평화회의 참석 그 결과로 국내에는 비밀결사인 신민회가 만들어졌고 국외에는 이상설이 직접 만주의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이란 학교를 만듭니다. 초대 교장이 이상설이었습니다. (1906년)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가기 위해선 고종의 동의와 위임장이 필요했는데, 일본은 고종을 항시 밀착 감시해서 기회가 쉽지 않았으나 대원군의 둘째 사위인 조정구와 내관 안호영을 통해서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을 고종에게 알리고 고종의 동의와 위임장까지 받아내는 개가를 올립니다.


정사전 의정부 참찬의 자격으로 부사전 평리원 검사 이준, 주러시아 한국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과 함께 이상설은 1907년 6월 헤이그에 도착해서 시내의 융 호텔을 거점으로 삼고 활동을 개시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상실된 상태라 그들은 일국의 대표단으로의 자격을 얻지 못했고 회의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백작, 개최국 네덜란드의 외무대신 후온데스는 물론 미국, 프랑스, 중국, 독일 등 각국 대표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영국의 언론인인 스테드가 주관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어서 연설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즉석에서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만국평화회의를 이용해 외교권을 되찾으려는 이들의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죠.


헤이그 밀사가 실패하자 국내에서는 1907년 8월 궐석재판이 열려 이상설은 사형, 이준과 이위종은 종신형이 선고됩니다. 이상설은 국내에 입국하는것을 포기하고 영국과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갑니다.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승희등과 항카오 남쪽 봉밀산 부근의 땅 45방을 사서 1백여 가구의 교포를 이주시키고 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부탁을 받은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어 1년동안 러시아 감옥에 있었고 1911년 풀려난 이후 권업회등을 만들어서 신문과 잡지를 펴내 항일사상을 고취시켰습니다.


한흥동을 기반으로 1914년 이상설은 대한광복군 정부라는 망명정부를 세우고 외교전에 돌입합니다. 그는 고종을 비롯한 주요 황족들을 망명시켜서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거점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듬해 3월, 상해 여국 조계 내의 배달학원애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화, 유동열 등과 신한혁명단을 조직해서 본격적으로 일에 들어갑니다.


이상설은 신한혁명단 본부장이었는데, 외교부장인 성낙형을 국내에 잠입시켜서 고종과 가장 항일정신이 투철했던 의친왕을 비롯한 주요 황족들을 접촉합니다. 내관 염덕인을 통해 덕수궁 함덕전에서 이상설의 의견을 전해들은 고종은 성낙형을 비밀리에 친히 알현해서 도모하기로 합니다.

 

이후에 의친왕 이강까지 연락을 받았으나 고종을 알현하기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의친왕의 장인 김사준과 그 사촌 김사홍, 김승현등 다수의 관련자들이 잡히는 바람에 무산됩니다. 이후에도 의친왕은 대동단과 함께 1920년에도 망명을 시도합니다.


일제는 세계에 대한제국과의 합병은 평화적이었고 그들이 원해서 한거라고 선전했지만 만일 고종이나 의친왕이 국외의 망명정부로 가서 그게 아님을 밝히고 투쟁전선에 들어갔다면 아마 상황은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이 사건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건 일반 독립운동가들 뿐만 아니라 고종과 의친왕을 비롯한 다수의 황족까지 연루된 사건이라 일제는 아예 사건 자체를 극비로 만들었습니다. 이상설은 시대에 비해 매우 생각이 깨이고 서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국제정세에도 밝은편이었는데, 1차대전이 발발하자 그것을 기회로 삼아 고종을 국외로 탈출시켜 망명정부를 만들고 그것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보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를 비롯한 보황파들은 1차대전을 독일이 승리할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독일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서서 일본이 혼란해질것이라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결좌적으로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고 이상설의 유일한 한계는 이것이었죠. 나중에 그의 휘하에서 배출된 독립 운동가들은 외교 독립론과 보황주의를 극복하고 독립을 위한 무기로 다른 사상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회주의부터 아나키즘까지..)


이후 이상설은 교육사업을 하는데, 1917년 3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설은 희대의 천재답게 머리도 명석했지만 담력과 의지도 대단했던 인물 중의 인물입니다. 호(號)는 보재(溥齋) 본명은 순오라고 합니다.

 

 [네이브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