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이승희씨에게 드리는 글 - 이상설

야촌(1) 2009. 12. 2. 02:54

[해설] 

 

이 글은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선생이 북만주 밀산부(密山府)에서 독립운동 기지(獨立運動基地) 선정에 앞장선 이승희(李承熙)에게 보낸 편지다. 1909년 여름 다시 미주(美洲)에서 연해주로 온 이상설선생은 그 곳에 망명온  강재 이승희(剛齋  李承熙)와 협력하여 북만주 흥개호(興凱湖=Xingkai Lake) 주변지인 밀산부(密山府)의 황무지를 구입하여 독립운동 기지로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편지는 한흥동 건설에 관련된 자금 문제와 그 외 독립운동에 관계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뒤가 훼손된 이 편지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오(伊藤博文)를 총살한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1909년 10월 26일 직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의 원본은 이글을 전기한 이규석(李葵錫-전 국민대 총장)님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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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강재 이승희 서(興剛齋  李承熙 書)

(이승희씨에게 드리는  글)

 

이상설(李相卨)

 

미주국민회(美洲國民會)에서 오천원(元)을 우편으로 부쳐 왔습니다.

김성무(金成武)가 대표로 들어갔으니 그 정상이 어떠한지 대강 알아챌수 있습니다.

정재관(鄭在寬)과 야인(也忍)이 두 회사를 합동시키고자 의논해 보았으나 합동이 안 된 것은 정세 때문 입니다.

 

상설(相卨)은 이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항해서의 경쟁이 장차 봉산(蜂山)에 미쳐 갈 것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엎더려 바라보건데 가만히 좋은 계책을 생각하여 우리에게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슬그머니 호상(胡上)에서 평당(平黨)의 미래세력(未來勢力)을 꺾어버리고 우리회사를 위하여 확고한 기초를 세우게 하는것이 어떠한지요?

이 일은 이미 성규(聖圭)에게 말해 두었으니 의논하여 그 처치 방법을 지도해 주시길 천만 부탁 합니다.

 

상설(相卨)이 정(鄭)과 김(金)에게 권하여 수북(水北)땅을 사 두라고 한 것은 우리의 호상경영에 저촉되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함에서이니 바라옵건데 선생께서도 거짓 권유하여 보십시요.

만약 이들로 하여금 호상에 발을 딛게 하면 몇일이 가지 않아서 우리네 사업은 위태로울 것입니다.

 

마문찬(馬文贊)의 땅과 팔포항지(八舖炕地) 이단(二段)을 함께  사기로 결정하였으니 팔포항지 값은 모름지기 얼마의 선금을 주고, 그 나머지 돈은  내년 봄에 주도록 약속해 두는것이 어떠 한지요?

 

이 두 땅은 요지이라 타인의(先占)을 용납할수 없으며, 또 평당이 반듯이 호상 평인(平人)과 더불어 비밀리에 결당(結黨)하여, 한갖 타인을 억압 함으로써 저들의 일생기량(一生技倆)을 삼고 있으니, 그를 삼가 방어하는 것은 오직 우리동지들이 단결하여 가만하 배제(排除)하는데 있다고 생각하여, 곧 성규와 한 농상계(農桑契)를 조직하여 백파자(白波子)와 봉산에 있는 의중인(意中人)을 단합하여 일체(一體)가 되고, 그 발기문과 좌목(座目)과 조례들은 될수록 간편하게 하여 한목에 선생께 아뢰오니 양해 하시길 복망 합니다.

 

이 일은 벌써부터 성규에게 부탁한바 성규 또한 허락 하였고, 이곳 입계인(入契人)의 성명도 또한 기록해 드립니다. 고본(股本) 모집은 마땅히 힘껏 주선하여 반듯이 성공하고야 말겠으며, 만약 고본(資本)이 넉넉히 들어오면, 올해 안으로 곧 한사람을 파견할 계획입니다.

 

또 낱낱이 고할일이 있으나 이곳 사람들의 관망이 매우 염려스럽다는 것은 이미 자유(子由)와 더불어 상의 하였습니다. 선생께서도 또한 약간의 자본을 증출하여 권장해 주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자유에게 편지하여 알려 드림이 어떠한지요. 자본금의 납부는 내년 봄에 하여도 늦지 않겠지만 고금 성낙서 만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습니다.

 

이또를 죽인 사람은 안중근입니다. 이제 또 러시아 신문을 보니, 이완용이 피살되었다는 소문이 있다고하나 아직 미상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항의 의연금(義捐金)은 1만원 가량인데, 최봉준(崔鳳俊), 차석보(車錫輔)가, 각각 1천여 원씩 내었다고 하니, 참으로 쾌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편 이 일이 두발(陡發)됨에서 평당세력이 따라 커져서 은연히 남인(南人)을 막 잡아먹을 기염(氣炎)을 갖게 되어 자유 또한 저들에게 무한한 곤욕을 당했습니다. 또 그 뿐만 아니라 저들이 날로 남인의 틈을 엿보아 욕설과 모함이 어디 이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 남인을  전부 박살하여, 한사람도 남겨두지 않을것 같습니다. 또 저희들이 학생을 선동하여, 그 음모가  자못 악랄합니다. 정말 참으로 두렵군요. 그러나 바야흐로 동지들과 흥수단(興修團)을 조직하고자 하나 짓 밟히고 모멸당하는 이 마당에 일이 바로 성사되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만 이미 8. 9할의 희망은 있습니다. 단 재력이 모자라고, 사람의 수가 적어서 불탄(不歎)에 탄(歎)이옵니다.

 

만약 이 단체가 한번 서게 되면 저들의 광염노도도 꺾어 낼 수 있겠습니다. 단원은 이미 30명이나 됩니다. 선생과 자유의 이름도 다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유의암장(柳毅菴丈)은 올 겨울 안으로 한번 거의(擧義)할까 하여 한창 의병(義兵) 초안을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그 이면을 들어보면, 의병들의 발발(勃勃)한 움직임이 적을 무찌를 계획이 아니라 부자의 재물을 겁탈 취득함에 있다고 합니다.

 

평당이 의병을 종용하여 급히 일어나도록 하는것은 의병을 잘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일본 군인에게 피살되면, 저들의 회무(會務)확장에 장애가 없어 지리라는 것을 노리는 바입니다. 이러한 나찰세계(那刹世界)에 도께비들의 음모가 이와 같으니 한심스럽고 기가찹니다. 

 

박태암(朴泰菴)은 상설이 호상에 있을 때, 천천히 해볼 생각으로  해심(海深)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왔습니다. 정재관이 속여 이르기를 봉산은 절벽한 땅인데 이모(李某)의 경영하는 일은 다만 자기 몸을 위할 뿐이라고 헐떧어 마지 않으므로 박이 하염없이 돌아갔다고 합니다. 천하일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길림순무(吉林巡撫)는 상설의 부채로 인하여 한번도 교섭하지 못 하였습니다. 설령 상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교섭하여 과연 무엇을 얻었을  것인지 알수 없습니다. 이종갑(李鍾甲)은 요즘 보다소(寶多所)에 있으므로 곧 해항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해항의 일은 한 말로 따저보면 선생이 계실 때와는 다르기가 창상(滄桑)과 같습니다.

 

안의사(安義士)의 일거(一擧)로 인하여 충격의 원인이 된것이 첫 째요. 평당우모(平黨羽毛)가 점차 성장하여 날로 약진하는 것이 둘째요. 남인들이 가만히 세력의 발전을 시도해 보았으나 현연( 顯然)히 배격을 받은 것이 셋째 원인입니다.

 

저들은 재력이 넉넉하다 우리들은 텅텅빈 맨주먹이 아닙니까? 이 일은 벌써 선생과 더불어 여러번 말한 바이니 모름지기 자유에게 편지하여 남쪽으로 돌아 가는 날, 유지자(有志者)와 유력자를 많이 권유하여 우리들의 기반을 튼튼히 한 뒤에 큰 일을 이룩할 것입니다.

 

이곳 해심(海深)의 결단회(結團會) 역사(役事)는 맹세코 온갖 노력을 다하여 이룩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아니할 것입니다. 엎드려 깊이 통죽 하시길 바랍니다. 마문찬의 토지 가운데 채지(菜地) 6평은 이미 야인에게 말해 두었으니, 깊이 짐작 하시와 한목에 모두 사 두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만약 이로 인하여 20평을 잃을 염려가 있다면 이해를 따지지 않고 전부 다 사는 것이 좋겠습니다.

 

팔포땅은 값이 53원 이라도 또한 좋습니다. 단 소조환수(小照換受) 계약조건은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필환(必換)이 되도록 해둘 것이며 평수 측량은 청정(請田) 45일 경(耕)으로 단정하여 계약해 두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성주(聖主)와 덕홍(德洪)과 상의 하시와 여하한 사람을 막론 하고 평당 쪽에서 왔다 하거던 우리들의 내용을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지극히 온당한 일이라고 생각 되오니 바라옵건데 깊이 깊이 생각 하시옵소서. <끝>

 

옮긴이>野村 李在薰/ 2009.12.02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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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 이승희(剛齋 李承熙) 인물소개.

 

선생의 본관은 성산(星山)으로 1847년(헌종 13) 경북 성주에서 영남 주리론의 대통을 이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유학자인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 부터 성리학을 수학하여 영남 주리론의 대통을 계승하면서 위정척사론을 정립하고,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섰다.

 

개항시기에는 척사상소를 올려 무분별한 개국에 반대하고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옹호하였다. 나아가 1895년 명성황후 민씨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 등 문인들과 함께 포고문을 각국 공사관에 보내 일제의 침략만행을 규탄하고 열강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특히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수백여 명의 유생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와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주한 일본군사령부에 일본의 배신과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글을 보냈다. 이로 인해 대구경찰서에 피체되어 옥고를 겪고 이듬해 4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인 1907년 국권회복을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갔다. 자신의 향리인 경북 성주에서 국채보상단연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각지에 통문을 보내 담배를 끊고 국채를 보상하여 국권을 되찾자고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편지를 보내 일본의 침략 만행을 낱낱이 폭로하고, 한국이 독립주권국가임을 역설하였다. 나아가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인해 광무황제가 강제 폐위되자 그 부당성을 일본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1908년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되자 일본의 노예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김창숙 등, 문인들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이상설·유인석·안중근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제자를 국내로 보내 독립운동자금을 널리 모금하는 한편, 그 자금으로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나섰던 것이다. 만주와 노령의 국경지대인 밀산현 봉밀산에 황무지를 구입하고 100여 가구의 한인동포를 이주시켜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여 한흥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한민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독립군 양성의 기반을 닦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광복되기 전에는 결코 귀국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중국의 동지들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한인공교회를 창립하고, 상해의 박은식 등과 연락하여 언론기관의 설립과 국사교육을 논의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여 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1916년 2월 27일, 70세를 일기로 봉천성 북문 밖에서 광복의 날을 보지 못한 채 망국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