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탁계 전치원선생 신도비명

야촌(1) 2009. 12. 8. 03:03

■탁계 전치원선생신도비명(濯溪 全致遠 先生 神道碑銘)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행 사포서별제 사근도찰방 탁계전선생신도비명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行 司圃署別提 沙斤道察訪 濯溪全先生神道碑銘)

 

초계(草溪)고장을 연고지(緣故地)로 한 유학자(儒學者)이신 선인(先人) 탁 계전선생(濯溪全先生)은 서기(西紀) 1596년(宣祖 29) 12月 13일에 별세(別世) 하시니 수(壽) 70세로 장수(長壽)하셨으며 명년(明年) 2월에 집에서 멀지않은 매 야산(梅野山) 감리(坎離)에 장례(葬禮)를 치르셨으며 동방(東邦) 제일의 전서체(篆書体) 대가(大家) 이신 영의정(領議政) 허목(許穆) 선생(號는 眉叟께서 그 무덤에 묘지명(墓誌銘)을 쓰시고 채유후(蔡裕後) 선생(號는 湖洲) 께서 뒤이어 비문(碑文)을 지어시니 고인(故人)의 덕행(德行)과 업적(業績)을 열어 그윽히 빛나게 하니 진실(眞實)로 평소 행적(行蹟)이 중엄(重儼) 하시고 후세(後世)에 끼침이 적지 않으시다.

 

그 뒤 조정(朝廷)으로부터 유림(儒林)에 토론(議論)하여 세 차례 증직(贈職)을 내려 재상(宰相)의 직분(職分)에 정당(正當)한 벼슬에 이러느니 귀부(龜扶)와 이수(螭首)를 갖춘 신도비(神道碑)를 세워야 함에도 결과(結果)를 얻지 못한지 이제 80여년이라 또 그간의 세대(世代)가 변천(変遷)하니 학문적 아취(學問的雅趣)가 줄어들어 다시 당시의 위치(位置)를 얻기 어렵고 바라는 바는 전일(前日)을 견주어보나 떳떳이 잡기가 같이 못한 바이다.

 

후손(後孫)과 사림(士林)이 다함께 크게 애써 근심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그 일을 도모(圖謀)하니 비록 그때를 얻지 못하나 모든 사람이 어질기를 옛 과 같이 못하다고 해서 마침내 탁계선생(濯溪先生)을 섬길 봐가 없을까보냐?

 

이때일의 절차를 밟아 그 큰일(濯溪先生의 碑文)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고요히 생각하니 선생(濯溪)은 저(榥)의 선조(先祖) 문정공(文貞公, 金宇웅 號는 東岡)과 교의(交誼가 있으셨고 후인(後人)이 세대(世代)로 같은 강학(講學)을하고 더불어 그 근심하는 바를 들어 면서 그 일을 시험(試驗)해보지도 않으면 크게 망령(妄靈)되지 않을지 알 수 없고 염려(念慮)되어 삼가 선생(先生)의 행장(行狀)을 상고(詳考)하니 휘(諱)는 치원(致遠)이요 자(字)는 사의(士毅)시고 탁계(濯溪)는 그 스스로 호(號)를 표(表)한 것이다.

 

전씨(全氏)의 본관(本貫)이 처음부터 전주(全州)인 것은 충정공(忠貞公) 휘(諱)에 집(潗)께서 고려 말(高麗末) 홍건적(紅巾賊)을 토벌(討伐)한 공로(功勞)로 인해 완산(完山)의 군(君)으로 봉(封)하셨으니 완산(完山)은 곧 전주(全州)의 옛 명칭(名稱)이라 중간세대(世代)로는 예부상서(禮部尙書) 휘(諱)에 사경(思敬)과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휘(諱)에 하민(夏民)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휘(諱)에 승덕(承德)이 계셨는데 선생은 절제사(節制使) 승덕(承德)의 현손(玄孫)이 되시고(濯溪先生의 高祖) 진산군수(珍山郡守) 휘(諱)에 수문(秀文)은 증조(曾祖)이시고 제령군수(載寧郡守) 휘(諱)에 영수(永綏)는 조(祖)이시고 종사랑(從仕郞) 휘(諱)에 인(絪)은 고(考)이시다.

 

어머니는 김해 허씨(金海許氏)로써 우후(虞侯) 휘(諱)에 성(誠)의 따님이시다. 제령공(載寧公=永綏)은 수리학(數理學)에 조예(造詣)가 있었으나 큰일에 당함이 없었고 종사랑 공(從仕郞公=絪)은 유림(儒林)의 행적(行績)으로 일찍 세상(世上)에 알려졌다. 허부인(許夫人=어머니)은 성품(性品)이 어질고 온화(溫和)하며 정숙(靜肅)하셔서 규방(閨房)의 모범(模範)이라 일컬어지다.

 

서기 1527년(中宗 22)10月 19日 선생은 초계(草溪)의 도방리(道方里) 누대(屢代)로 살던 집에서 출생(出生)하셨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의지(依支)할 곳을 잃으시어 슬프셨으나 능히 스스로 예절(禮節)의 법도(法度)에 어긋나지 않으시고 뭇사람과는 자리를 같이하지 않으시며 어린동생과 더불어 항상 침식(寢食)을 같이하니 그를 보는 사람들이 보통(普通) 아이 보듯 하지 않더라.

 

어른께서 타시던 말이 늙어서 병이 들어 곧 죽을 것 같으니 노비(奴婢)들이 모여서 잡아먹자고 하는 말을 듣고 즉시 가로 막아서서 그 말(馬)이 죽을 때 까지 기다렸다가 묻어 주게 하니 역시 천성(天性)이 다르다고 입을 모아 일어더라.

 

조부(祖父)님께서 제령군수(載寧郡守)로 계실 때는 선생(先生)의 연세(年歲) 15~16세(歲)때 곁에서 모시고 따르면서 가르치심에 따라하는 말이 만약 무공(武功)으로 업(業)을 삼으면 문전(門前)의 의장(儀仗)이 전부일 것이다.

 

조부(祖父)께서 또한 그 뜻을 헤아리시니 선생은 앞에 나아가 청(請)해 가로되 문(文)과 무(武)를 판단(判斷)해 헤아려보면 두 길을 다함께 공부(工夫)해서 가려하면 그 길은 멀고 힘들 것이므로 도리 혀 무공(武功)으로 이름을 얻는 것은 원(願)하는 바가 아니요.

 

학문(學問)을 쫓아 공부(工夫)하기를 원(願)하는 바입니다 하니 조부(祖父)께서 칭찬(稱讚)하시고 허락(許諾)하시다. 때마침 이 황강(李黃江/諱는 希顔) 선생은 그 고장에서 학도(道學)의 강좌(講座)를 개설(開設)했다.

 

선생(先生)은 조부(祖父)의 명(命)을 받들고 예의(禮儀)를 갖추어 강학(講學)을 청(請)하니 이 선생(李先生)께서 처음은 혹 격(格)에 넘쳐 과로(過勞)의 환난(患難)을 초래(招來)할까 염려(念慮)했고 수학(受學) 하고 저하는 자(者)가 불가할 것같이 보였으나 선생(先生)의 학문(學問)을 구(求)하는 모습이 지성(至誠) 서러웠다.

 

승낙(承諾)의 명(命)을 기다리는 5일째에 이 선생(李先生)은 깊이 생각할수록 가상(嘉尙) 서러움만 더해져 드디어 가르치기로 했다.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강(受講) 한지 4~5년에 사고(思考)가 정미(精美)롭고 폭넓은 학문(學問)을 익혀 조예(造詣)가 날로 높아갔다.

 

이 선생(李先生)은 탁계선생(濯溪先生)의 학문(學問)이 날로 넉넉함을 자랑하고 다른 여러 제자(弟子)들과 같지 않게 특별히 보살펴 주셨고 목적(目的)을 두고 돌려보낼 때 이르러하신 말씀이 이자[濯溪]는 외질(外質)이 이미 수석(首席)의 위치(位置)를 얻었다고 하셨다. 선생(先生)은 집에 계시면서 어머님을 모실 때 거처(居處)가 따스한지? 차가운지? 써 계절(季節)의

 

기후(氣候)가 분 각(分刻)의 차이(差異)라도 혹 어긋나지 않을까 살펴서 정성을 다하시고 가난한 살림에도 항상(恒常) 어머니의 입맛에 맞추어 봉양(奉養)하시고 부드러운 미음 등은 항상 여유 있게 준비(準備)하셨다.

 

매일(每日)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세수(洗手)하고 빗질하고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먼저 사당(祠堂)에 나아가 알현(謁見)하고 그 다음에 자기 처소(處所)로 가서 엄숙(嚴肅)한 태도(態度)를 풀어 편히 하고 항상 화락(和樂)한 기분으로 서재(書齋=글방)에 나아가 좌우양편(左右兩便)에 게시(揭示)한 좌우명(座右銘) 등을 낭독(朗讀)하고 중구(衆口)하여 익히고 체험(体驗)하니 그날후의 행실(行實)이 나타나 그 일과(日課)를 행(行)함에 그것이 가장 효행(孝行)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다.

 

그 내우(內憂)를 만난그해 몸을 상(傷)하게 하지 아니하고도 오히려 제도(制度)를 지키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상복(喪服)을 벗지 아니하고 맛있는 음식(飮食)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여묘(廬墓)에서 3年상(喪)을 맞쳤다.

 

대저 뒷날에도 전(前)과 같이 삼가 재계(齊戒)하고 상예(喪禮)에 맞게 옷을 매고 심하게 통곡(痛哭)하고 아침과 저녁식사는 범벅 죽을 마시고 무릇 모든 절차를 사당제사(祠堂祭祀)와 같이 제수(祭需)에 힘쓰기를 경제적(經濟的) 여건이 있고 없는 데는 헤아리지 않았다.

 

평소(平所) 어머님께서 꿩고기를 즐기심으로 제사(祭祀)때는 반드시 갖추어 받치고, 혹 구하지 못해 제사(祭祀)에 올리지 못한 해는 그해 1년 동안은 자기(自己)도 먹지 않았다 하니 그 마음 쓰는 정성(精誠)이 대저(大抵)이와 같으니 스승을 섬기는데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라 하고 낳아서 기르는 은혜(恩惠)와 스승이 가르치는 뜻도 같은 것 이라했다.

 

황강 이선생(黃江 李先生)이 타계(他界)하셨다. 마음이 한없이 상(傷)하셨다. 옛 상례(喪禮)에 따라 지극(至極)한 예(禮)를 갖추었고, 또 사당(祠堂)을 세웠다. 이른바 청계서원(淸溪書院)이다. 여기에 뒷날 선생(先生)의 위패(位牌)를 모셔서 배향(配享)하니 이는 그 높은 과거(科擧)를 한 공(功)이 있음으로 인(因)한 연고(然故)이다.

 

선생은 또 일찍 조식(曺植/號 南冥) 선생의 문하(門下)에 왕래(往來)하셨다 학문(學問)을 깊이 얻고 도량(度量)이 중후(重厚)하셔서 같은 문하(門下)의 현인(賢人)들과 더불어 자질(資質)에서부터 그 강평해설(講評解說)에 이르기까지 심오(深奧)한 이치(理致)의 깊은 맛이 듣는 자(者) 모두가 탄복(歎服)하고 이르되 도산서원학문(陶山書院學問)과도 부합(符合)하여 가히 그 명도(明道)의 바른길을 향(向)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서기1574년(宣祖 7) 선생을 유일천거(遺逸薦擧)하여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의 관직(官職)을 내렸으나 사양(辭讓)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도백(道伯)은 순찰차(巡察次) 지나가다가 선생을 방문(訪問)했다. 방장(方丈)과 더불어 수행(隨行)하는 벗들과 모여 대화(對話)하는 자리가 우뚝하게 보였으며 말씀(文辭)이 끊어짐을 볼 수 없었다.

 

최 수우(崔守愚/諱 永慶이요 徵士를 받은 德行이 높은 學者) 선생이 불행하게 잘못되어 기축반역옥사(己丑叛逆獄事) 사건(事件)에 연루(連累)되어 있을 때, 뜻이 같은 분들을 규합(糾合)하여 누명(陋名)을 벗기 위한 상소(上疏)를 올린바 있다,

 

조정(朝廷)에서 새로 일본(日本)과 더불어 통신(通信)하고 그로인(因)하여 군사교육(軍事敎育)이 있을 때 감개(感慨)하여 쓴 시(詩)가 있다. 시국(時局)이 위태(危殆)로 울 때 위기(危機)를 바로잡을 계책(計策)을 시험(試驗)해 보지 않고 세상(世上)이 요란(搖亂)한데도 공연히 감추려고 민심(民心)만 달래네.

 

그때 스스로 시대상황(時代狀況)을 가히 보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얼마 못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이란 외침(外侵)을 당(當)했다. 나라의 국경전역(國境全域)이 진탕(震蕩)이 되니 수례를 탄 무리가 다라나 흩어졌다. 김성일(金誠一/號는 鶴峯)은 각 고을에 알리고 의병(義兵)을 일어 켰다.

 

이때 선생은 본인이 늙었다고 스스로 편안히 계시지 않고 곧 나라의 위급(危急)함에 응(應)했다. 고을에 건장(健壯)한 남자(男子)들을 모집(募集)하니 수 천 명이 모였다. 이대기(李大期/號는 雪壑) 공과 더불어 본 면(本面)을 안팎으로 방어(防禦) 하도록 각각 나누어 관장(管掌)하고 위의 동지(同志)와 또 명사(名士) 10여명과 함께 군사(軍事)를 배불리 먹이고 대중(大衆)과 서약(誓約)을 했다.

 

위험(危險)한 요소(要所) 마다 나누어 지키고 계획(計劃)을 도모(圖謀)하고 기회(機會)에 힘써서 고령(高靈), 합천(陜川), 거창(居昌), 성주(星州)의 모든 의병(義兵)과 더불어 합세(合勢)하여 전진(前進)하니 마침내 무계(茂溪)와 마수원전투(馬首院戰鬪)에서 2次에 걸쳐 크게 승리(勝利)하니 왜적(倭賊)은 넋을 잃고 감히 방자(芳姿)하게 날뛰지 못하니 낙동강좌우(洛東江左右)로 통(通)하는 길이 비로소 자유(自由)로와 졌다.

 

다음해 서기1593年(宣祖 26) 선생에게는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의 벼슬이 내려졌다. 그때 김성일(金誠一/號는 鶴峯)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선생을 치하(致賀)했으며 동강(東岡/諱는 金宇웅) 선생도 서찰(書札)을 보내와 일어서기를 권(勸)했으나 선생은 굳이 사양(辭讓)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선생은 스스로를 비유(比喩)하기로 시집가기 때늦은 노처녀(老處女)에게 시집가라는 것과 같다고 하니 그 절개(節介)와 지조(志操)는 가히 뺏을 자(者)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비유하여 전하는 시(詩)가 있다. 동(東)쪽 바다에서 서(西)쪽의 정상(頂上)에 사냥하는 것을 만날 수 없듯이 또한 한(漢)나라 장막(帳幕)안에서 왕(王)의 계획(計劃)을 누가 헤아릴 것인가? 그 스스로의 뜻을 가히 알 수 있었다.

 

우국지심(憂國之心)의 발로(發露)는 몸을 아끼지 않는데 있으니 대저 선생의 재량(才量)과 학식(學識)은 세상(世上)이 찾고 기다림에 맞추어 나셨도다. 마땅히 써서 나라의 줄기[기둥]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百姓)을 교화(敎化)하는데 도움이 되고 이에 나아가 스스로를 다스리고 뜻을 이행하기에 권욕(權慾)을 취(取)해 나아가는 일은 구(求)하지 아니하니 공(功)과 업(業)의 경우 향토(鄕土)의 명성(名聲)에 그치고 종묘(宗廟)의 높은 사당(祠堂)에 오르지 않으시더라도 선생께서는 진실(眞實)로 자기 분(分)에 만족(滿足)하시고 후회(後悔)가 없으시니 그 기관에 얽혀 세도(世道)를 부리는 자(者)들은 어찌 선생의 위치(位置)를 돌아 볼 수 있으리오.

 

문정공(文貞公)은 나를 은거(隱居)해 있지 말고 벼슬길에 나가라고 권(勸)하는 요점(要點)은 역시 깊이 알고 깊이 사랑한 나머지 나온 말인데 이는 대개 이러한 조짐(兆朕)에 말미암은 것이라 하겠다.

 

선생은 또 일찍 문정공(文貞公)께서 손수 쓰신 글씨를 받아 병풍(屛風)을 만들어서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게 하는 것도 평상시(平常時) 성실(誠實)한 자세(姿勢)에서 기인(基因)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 참으로 세상에 드문 일이로다. 선생의 가르침을 배운 자들은 먼저 소학(小學)으로부터 근사록(近思錄)을 읽고 그 다음으로 모든 경서(經書)에 미치는 것이니 이는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정밀(精密)히 연구(硏究)하고 힘써 행(行) 하는 것이니 다만 헛되이 외우고 읽는 것만 으로는 불가(不可) 한 것이라 했다.

 

또 질병(疾病)을 당(當)해서도 일러 가로되 반드시 굳건히 힘써 공부(工夫)를 해서 바야흐로 한 걸음 이라도 진보 처(進步處)로 옮겨라 하니 그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學問)하는 절도(節度)가 이와 같았다.

 

또한 필법(筆法)이 좋아서 남명선생(南冥先生)과 황강선생(黃江先生)같은 대가(大家)의 비문(碑文)이 다 선생(先生)의 필적(筆跡)이며 지금까지도 전(傳)하는 각자(刻字)의 책판(冊板)과 금석문(金石文)이 많아 그 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 또한 명필(名筆)이 많이 나서 예원(藝苑)을 이루니 이 또한 세상(世上)에 가문(家門)을 일으키는 자(者) 선생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배필(配匹)은 두 분이였으니 선취(先娶)에는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전(士詮/忠順衛)의 여(女)요 정무공(靖務公)인 이호성(李好誠)의 증손(曾孫)이기도 하다. 또 한분은 강 양 이씨(江陽李氏)로 정(精/訓練奉事)의 여(女)이시다.

 

슬하(膝下)에 아들이 여섯 분 딸이 세분이 있었으니 내외 손(內外孫)이 심히 많고 또한 공적(功績)과 관직(官職)이 있으나 지금 와서 일일이 능(能)이 다 살필 수 없다. 선생(先生)이 남기신 저서(著書)와 시문(詩文)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흩어졌다.

 

사적(事蹟)은 김학봉(金鶴峯)의 행장(行狀)과 연보(年譜) 및 임진왜란(壬辰倭亂)때의 일기(日記/龍蛇日記)등에서 증명(證明)되고 있고 문인(門人)인 윤형(尹泂/號는 退村)의 제문(祭文)에서 본말(本末)이 상세(詳細)하고 임진 부(林眞怤/林谷) 허희(許熙)의 찬(撰)한 행장(行狀)과 행록(行錄)에서 가(可)히 갖출 수 있었다.

 

선생이 작고(作故)하심에 사림(士林)이 연곡사(淵谷祠)를 창건(創建)하고 향사(享祀)를 치르다가 얼마 못가서 화재(火災)로 훼손(毁損)되고 뒤이어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이 설학(李雪壑)과 더불어 배향(配享)되다. 순조왕(純祖王)의 계유년(癸酉年)때 영남(嶺南)의 유림(儒林)이 나라에 상소(上疏)를 올려 벼슬과 시호(諡號)를 청(請)했다.

 

그 뒤 9년을 지나 신사년(辛巳年)에 비로소 선생의 충절(忠節)이 높음을 인정(認定) 받고 증 호조참판(戶曹參判)의 벼슬을 내렸으며 홍능 임진년(洪陵壬辰年)에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이 추가(追加)로 내렸다. 그러나 충절(忠節)의 혜은(惠恩)에 미치지 못함은 개탄(慨嘆) 할 일이로다.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 중(配享中) 조정(朝廷)의 명(命)으로 서원(書院)이 훼철(毁撤)되고 이제 서당(書堂)에서 해마다 모여 행사(行事)를 수행(修行)하고 있던 중 후손(後孫) 석무(錫武) 상림(相霖)은 나에게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청(請)해왔다. 명왈(銘曰)

 

선비의 숭상(崇尙)하는 것은 체용(体用)을 밝게 하는 바라

큰 포부(抱負)를 몸에 간직하고 때를 기다려 움직이나니

오직 장신(長身)하고 있는 것은 곧 나아가서 큰일을 하 기위함이라

군자(君子)가 이것을 적용(適用)하여 안자(顔子)와 이윤(伊允)을 뜻하고 배웠도다.

아름답다 선생이여 법문(法門)의 전통(傳統)이 있도다.

 

바르게 이어가고 널리 구(求)하나니 모두가 정의(正義)에 돈독(敦篤)하도다.

타고난 분수(分守)를 지키니 거룩하고 호매(豪邁)하도다.

무(武)를 사양(辭讓)하고 문(文)에 나아가니 공명(功名)을 돌보지 않도다.

돌아가 고훈(古訓)을 본받아서 몸소 실천하니 일용범절(日用凡節)에 조금도 결함(缺陷)이 없도다.

큰 벼슬을 맡겼더라면 어진임금을 만들고 백성(百姓)에게 혜택(惠澤)이 많았으리라

 

모든 이치(理致)가 한 테 융합(融合)하여 큰 경륜(經綸)을 펴리로다.

누가 유학자(儒學者)가 때에 맞지 않다 하느냐

내가 갖추고 있으니 어찌 근심하고 슬퍼 하리요.

오직 위급(危急)한 것은 임금이 피난(避難)가신 일이라

눈물을 씻고 힘을 다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할 책임(責任)이라

 

이때에 분기(奮起)하여 군중(群衆)을 소집(召集)하고 동지(同志)를 규합(糾合)하니

누구와 같이 주장(主張)했느냐

문충공(文忠公/金誠一)과 충익공(忠翼公/郭再祐)과 김송암(金松菴/金沔)과 박대암(朴大庵/朴惺)과 아들 전수족당(全睡足堂/諱는 雨)이로다.

합심(合心)하여 막아내어 큰 공(功)을 이루었도다.

 

누가 서생(書生)이 군사(軍事)에 익숙하지 않다하느냐.

나는 행(行)했으니 나를 감히 막지 못하리라

충분(忠憤)이 격동(激動)하니 지용(智勇)이 겸비(兼備)하도다

위란(危亂)을 구제(救濟)하니 말과 뜻을 어찌 속이리오.

원리(原理)와 응용(應用)이 두 가지가 아니며

 

동(動)과 정(靜)이 매일 반이로다.

자취를 감추고 초지(初志)로 돌아오니

나의 낙(樂)이 여기에 있도다.

아직까지 풍교(風敎)가 일방(一方)에 진흥(振興)하니

당시나 후세(後世)에 공(功)을 들어 추앙(推昻)하도다.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配享)하고

매야산(梅野山)에 산소(山所)가 있도다.

높은 산과 큰길을 모두가 추모(追慕)하도다.

광채(光彩)가 비석(碑石)을 뚫고 명(銘)이 종이(宗彛/宗廟祭器등)에 짝 하도다.

세상(世上)의 군자(君子)들아 이 신필(信筆)을 상고(詳考) 하소서

 

문소 후학 김황 찬(聞昭 後學 金榥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