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조건원릉신도비(太祖建元陵神道碑)
[시대] 조선
[연대] 1409년(태종9년)
[유형/재질] 비문/돌
[문화재지정] 사적 - 제 193호
[크기] 높이 315cm, 너비 108cm, 두께 21cm
[소재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권근(權近). 성석린(成石璘). 미상
● 개관
조선조(朝鮮朝)의건국자태조(太祖)이성계(李成桂:1335~1408년,재위7년)의 건원릉신도비는전형적인조선조왕릉의형식을갖추고이후왕릉신도비의모범이되고있다.북동서방면3면(面)의곡장(曲墻)안에단릉(單陵)의봉분(封墳)형식으로봉분앞중앙에상석과장명등(長明燈)을설치하고양옆에는한쌍의망주석(望柱石)을두었다.
그리고한단아래의좌우에문인석(文人石)이뒤에석마(石馬)를대동하고있고,그아래단에역시좌우로무인석(武人石)이석마(石馬)를뒤에거느리고있어왕릉의위엄을갖추었다.본래이와같은능의상설제도는고려(高麗)왕릉중에서가장웅장하고화려한공민왕(恭愍王)의현릉(玄陵)을기본으로삼아설치한것이다.
또한건원릉에는홍살문안쪽정자각우측비각(碑閣)안에태조의업적과명복을비는신도비(神道碑)를함께세우고있다.왕릉의신도비는태종의헌릉에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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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건원릉신도비(太祖建元陵神道碑)
유명 시호 강헌 조선국 태조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 건원릉 신도비명 병서
(有明 諡康 獻朝 鮮國國 太祖 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健元陵 神道碑銘 幷序)
추충익대좌명공신 숭정대부 길창군 집현전대제학 겸 판내섬사사 지경연춘추관사 세자이사(推忠翊戴佐命功臣崇政大夫吉昌君集賢殿大提學兼判內贍寺事知經筵春秋館事世子貳師) 신(臣) 권근(權近)이 왕명을 받들어 찬하다.
수충동덕익대좌명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수문전 대제학 영경연사 감춘추관사(輸忠同德翊戴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修文殿大提學領經筵事監春秋館事) 세자부 창녕부원군(世子傅昌寧府院君) 신(臣) 성석린(成石璘)이 교서(敎書)를 받들다.
자헌대부 지의정부사 집현전제학 지경연춘추관사(資憲大夫知議政府事集賢殿提學知經筵春秋館事) 신(臣) 정구(鄭矩)가 교서를 받들어 전(篆)을 쓰다.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봐 세상을 다스리는 운수를 열어 줄 때에는, 반드시 먼저 신이한 징조를 보여서 그가 천명에 부합한다는 부명(符命)으로써 이를 밝힌다.
하(夏) 나라 때에는 하늘이 현규(玄圭: 검은색 홀)를 준 일이 있었고, 주(周) 나라 때에는 무왕(武王)의 꿈이 점[卜]과 일치하는 일이 있었다. 한(漢) 나라 이후의 여러 왕조에서도 다 이러한 징조가 있었다. 이는 모두가 하늘이 주는 것이요. 사람들의 모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태조대왕께서는 임금이 되시기 이전의 시절에 공덕이 이미 높았으며 천명에 부합함[符命]이 또한 현저하였다. 태조대왕의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주면서 이르기를, "그대는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라."고 한 일이 있었다.
이는 하 나라 우왕의 현규와 주 나라 무왕의 꿈과 더불어 같은 하늘의 부명이라 하겠다. 또 신이한 사람[異人]이 문 앞에 와 글을 바치면서 이르기를, 『지리산(智異山) 바위 틈에서 얻은 것인데 '목자[木子 : 이성계의 성(姓) ‘이(李)’자를 파자한 것. 木 밑에 子를 붙이면 李자가 되는데, 곧 이성계(李成桂)를 가리키는 도참설(圖讖說)]가 삼한을 고쳐 바로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하였다.
사람을 시켜 나아가 맞으려 하니 이미 가버리고 없어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서운관(書雲觀 : 천문(天文)·역법(曆法)·누각(漏刻)·도참(圖讖) 등을 맡아보던 관청)에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던 비기(祕記) 가운데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 : 아홉번 변하는 진단의 그림, 일종의 도참서(圖讖書)]에는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말이 있다.
조선이 곧 진단(震檀)이라는 말은 수천 년 전부터 있어왔는데 지금에 이르러서야 징험(徵驗)되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고 도와준다는 것은 진실로 믿을 만한 것이다. 신(臣)이 삼가 왕실의 근원[璿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 있는 가문[望族]으로, 사공(司空) 휘(諱) 한(翰)은 신라(新羅)에서 관직 생활하였으며, 신라 종성[宗姓 : 김(金)]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6세(世) 휘(諱) 긍휴(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高麗)에 벼슬하였고, 13세(世)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세에 걸쳐 벼슬을 이어가며 모두 다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원 나라 정치가 쇠퇴해지자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을 섬기었다. 지정(至正 : 원 나라 순제(順帝)의 연호) 신축년(공민왕 10, 1361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왕경(王京)을 함락하여,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하였을 때, 환왕은 군사를 보내어 이를 물리쳤다.
이 때 우리 태조께서 맨 먼저 승첩(勝捷)의 보고를 올렸다. 이듬해 임인년에는 오랑캐 납합출(納哈出)을 격퇴하였고, 또 이듬해 계묘년에는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아내자 공민왕의 신임이 더욱 두터웠다. 여러 번 벼슬이 승진되어 장상(將相)으로서 도성과 변방을 드나들게 되었다.
태조께서는 유교 경전과 역사 관련 책 읽기를 즐겨하여 시간이 날 때 틈틈이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을 구제할 도량과 살리기 좋아하는 덕은 지극한 성품[至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민왕이 죽고 다른 성(姓)을 가진 자가 몰래 왕위를 빼앗고, 권력 있는 간신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조정을 어지럽히고, 해구(海寇)가 나라 깊이 침입하여 군현(郡縣)을 불태우고 약탈하였는데, 홍무[洪武 :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경신년(우왕 6, 1380년)에 우리 태조가 운봉(雲峯)에서 싸워 이기므로 동남쪽 지역이 편안하게 되었다.
무진년(창왕 1, 1388년)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세있는 간신들을 죽일 때에 지나치게 참혹하였는데, 우리 태조에게 의지하여 생명을 보전한 자가 대단히 많았다. 이에 최영은 태조를 우시중(右侍中)으로 삼고 곧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의 절월(節鉞)을 주어서 억지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러 있을 때 앞장서 모든 장수를 거느리고 바른 의리를 지켜 깃발을 되돌렸는데, 군사들이 언덕에 오르자 큰물이 섬을 삼켜버리므로 사람들은 모두 신기하게 여기었다. 정권을 잡고서는 최영을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대신 이름 높은 유학자 이색(李穡)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삼았다.
바로 이 시기야말로 권력을 지닌 간신들은 국정을 어지럽히고, 지나치게 패려한 자들은 모함을 일삼아, 나라가 망할 위기에 점점 이르러서 화란을 예측할 수 없었다. 실로 우리 태조가 이를 바꾸어 놓은 공로가 아니었다면, 이 나라는 위태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색이 말하기를, 『지금 공(公)이 의리를 일으켜 중국을 높였으니, 집정대신(執政大臣)이 친히 조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하고, 날을 가려 중국의 서울[京師]로 갔다. 태조는 여러 아들 중에서 지금의 우리 주상전하를 택해서 이색과 함께 중국 조정에 조현(朝見)하게 하니, 고황제(高皇帝)가 칭찬하여 돌려보냈다.
기사년(창왕 1, 1389년)가을에 중국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왕(王)씨가 아닌 다른 성(姓)을 가진 사람이 임금으로 된 것을 문책하여 오므로, 태조는 여러 장상(將相)과 더불어 왕씨(王氏)의 종친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임금으로 세우고 마음을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였다.
사전(私田)의 제도를 혁파하고 쓸데없는 관원을 도태하므로 민중의 마음은 서로 기뻐하였다. 그러나 공로가 높아지므로 시기하는 자가 생겨서 참소와 간악한 모함이 번갈아 일어나니 정창군이 자못 이에 현혹되었다.
태조는 높은 벼슬에 오래 있었으므로 나이가 들었음을 이유로 퇴직하기를 청 하였으나 그 사양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서쪽 지역으로 행차하였다가 인하여 병을 얻어 돌아오니 모함하는 자들의 음모가 더욱 심하여졌다. 우리 전하(태종을 가리킴)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고를 제압 함으로써 온갖 모의가 와해되고 말았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임신년(태조 1, 1392년) 가을 7월 16일에, 전하(태종)께서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ㆍ조준(趙浚) 등 52명과 더불어 의리를 내세워 태조를 임금으로 추대하니, 신료(臣僚)와 부로(父老)들도 모의한 일 없이 모두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태조는 정변을 듣고 놀라 일어나 두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어찌할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 가만히 앉은 채 한 국가가 저절로 이루어졌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계도하는 도움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胖)을 중국에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삼한의 백성이 이미 이씨(李氏)를 높였으며, 백성은 병화(兵禍)가 없이 사람마다 제각기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바로 상제의 명이라 하겠다.』하고, 이어 또 칙명에 이르기를, 『나라가 바뀌었으니 나라 이름은 무었인가?』하므로, 즉시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중국에 보내어 나라 이름을 정하여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바탕으로 옛날의 조선을 잇도록 하라.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길러서 길이 후세의 자손에게 이르도록 창성하게 하라.』하였다.
이 모두는 우리 태조의 위엄과 명성 그리고 의롭고 곧은 성품이 위로 황제에게 들려, 황제의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태조가 청명(請命)하자 곧 윤허를 얻게 된 것이다.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3년이 지난 갑술년(태조 3, 1394년) 여름에 우리나라를 황제에게 무고(誣告)한 자가 있어서, 임금의 친 아들을 입조(入朝)시키라는 황제의 명령이 있었다.
태조께서는 지금의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사리에 밝아 여러 아들 중에 제일 현명하다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다. 전하께서는 중국의 서울에 도착하여 진술하는 의견이 황제의 뜻에 맞으므로 황제는 예로써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그해 겨울 11월에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과 종묘를 세우고, 일찍이 4대를 추존하여 황고조(皇高祖)를 목왕(穆王), 배위(配位)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라 하고,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 배위 최씨(崔氏)를 정비(貞妃)라 하고, 황조(皇祖)를 도왕(度王), 배위 박씨(朴氏)를 경비(敬妃)라 하고, 황고(皇考)를 환왕(桓王), 배위 최씨(崔氏)를 의비(懿妃)라 하였다.
예악(禮樂)을 정리하여 제사를 정비하고, 복장을 정하여 등급과 위엄을 분변하고,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육성하고, 녹봉을 후하게 하여 선비를 권장하였다. 송사를 밝게 분변하여 바르게 판단하고 수령(守令)을 뽑는데 신중하였으며, 나쁜 정치를 모두 고치므로 여러 가지 공적이 함께 빛났으며, 해구(海寇)가 와서 복종하므로 온 나라가 편안하게 되었다.
우리 태조의 높고 큰 덕(德)은 진실로 이른바 하늘이 주신 용기와 지혜로서 총명하고 신무(神武)하며 영웅스럽고 위대한 임금이라 말할 수 있다. 간신 정도전(鄭道傳)이 표전(表箋) 때문에 황제의 조정으로부터 견책을 받게 되자,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려는 음모를 꾸며, 무인년(태조 7, 1398년) 가을 8월에 우리 태조가 병중인 틈을 타서 어린 서얼(庶孼)를 끼고 제 뜻을 펴려고 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그 기미를 살펴 모조리 제거하고 적장자(嫡長子)인 지금의 상왕(上王 : 정종(定宗))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의 병이 낫지 아니하므로 지금의 상왕에게 선위하였다. 상왕은 후사가 없고 또한 나라를 열고 사직을 안정한 것은 모두가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 하여 전하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경진년(정종 2, 1400년) 가을 7월 기사일에 태조께 계운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의 존호를 올리고, 겨울 11월 계유일에 상왕 또한 병으로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였다.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승낙의 명을 청하니, 영락(永樂 :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원년(태종 3, 1403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에게 조서(詔書)와 인장(印章)을 보내주어 우리 전하를 국왕으로 책봉하였다.
이어 한림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전하에게 구장(九章)의 곤면(袞冕)을 하사하니, 그 품수가 친왕(親王)에 비등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두 임금을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영락 무자년(태종 8, 1408년) 5월 24일 임신일에 태조가 승하하시니 춘추는 74세이었다. 왕으로 재위한 연수는 7년이요,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은 것이 11년인데, 활과 칼을 갑자기 버리시니 참으로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는 슬피 사모함이 망극하며 거상의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조에게 지인계운 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존호를 올리고, 이해 9월 초9일 갑인일에 도성 동쪽 양주(楊州) 검암산(儉巖山)에 안장하고 건원릉(健元陵)이라 하였다.
황제는 부고를 듣자 매우 슬퍼하며 조회를 파하고 곧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太牢)로써 제사를 지냈다. 그 제문의 대략에,『오직 왕은 밝고 통달하며 선(善)을 좋아하는 것이 천성에서 나왔으며, 천도(天道)를 공경하여 따르고 충의를 다하며, 근신한 마음으로 대국을 섬기고 한 나라의 백성을 잘 보휼(保恤) 하였으므로,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 충성을 가상히 여기어 나라 이름을 다시 '조선'이라고 내렸다.
이처럼 드러난 왕의 공덕은 비록 옛날 조선의 어떤 임금이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하고,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강헌(康憲)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조칙을 내려 부의(賻儀) 내리기를 특별히 후하게 하였으니,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유감 없이 지극히 갖추어졌다.
대체로 우리 태조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과 전하의 그 뜻을 계승하는 효성이 전후에 서로 이어져서 하늘의 마음을 잘 받들었다. 그러므로 한 왕조가 끝나고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는 시기에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사람의 도움을 크게 얻음이 이와 같이 지극한 것이다. 아! 성대하도다.
첫 번째 왕비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의 세가(世家)로서 증 영문하부사 안천부원군(贈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 휘(諱) 경(卿)의 딸인데 태조보다 먼저 죽었다. 처음의 시호는 절비(節妃)로 하였다가 뒤에 승인순성 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시호를 올렸다. 6남 2녀를 낳았는데 상왕이 둘째이며 우리 전하가 다섯째다.
장남 방우(芳雨)는 진안군(鎭安君)이며 먼저 죽었다.
셋째 방의(芳毅)는 익안대군(益安大君)이며 역시 먼저 죽었다.
넷째 방간(芳幹)은 회안대군(懷安大君)이다.
여섯째 방연(芳衍)은 등과하였으나 벼슬하지 않았으며 원윤(元尹)에 추증되었다. 장녀는 경신궁주(慶愼宮主)이며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시집갔는데 동본(同本)의 이씨(李氏)가 아니다. 차녀는 경선궁주(慶善宮主)이며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두 번째 왕비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며 처음에는 현비(顯妃)에 봉하여졌다가 왕보다 먼저 죽었으며 시호는 신덕왕후(神德王后)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첫째 방번(芳蕃)은 공순군(恭順君)에 추증되었다. 둘째 방석(芳碩)은 소도군(昭悼君)에 추증되었다. 딸 경순궁주(慶順宮主)는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동본의 이씨가 아니며, 다 태조보다 먼저 죽었다.
상왕의 배위 김씨(金氏)는 지금 왕대비(王大妃)에 봉해졌는데 증 문하시중(贈 門下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로서 후사가 없다. 우리 중궁(中宮)은 정비(靜妃) 민씨(閔氏)로서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문도공(文度公) 휘 제(霽)의 딸이다. 4남4녀를 두었다. 장남은 세자[世子 : 제(褆)]이다.
둘째 우(祐)는 효령군(孝寧君)이다. 셋째 도(裪)는 충령군(忠寧君)이다. 넷째는 어리다. 장녀 정순궁주(貞順宮主)는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동본의 이씨가 아니다. 둘째 경정궁주(慶貞宮主)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셋째 경안궁주(慶安宮主)는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다. 넷째는 어리다.
진안군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다. 장남 복근(福根)은 봉녕군(奉寧君)이다. 둘째 덕근(德根)은 원윤(元尹)이다. 익안군은 증 문하찬성사(贈 門下贊成事) 최인규(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석근(石根)을 낳았으니 익평군(益平君)이며, 회안군은 증 문하찬성사(贈 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맹종(孟宗)을 낳았는데 의령군(義寧君)이다.
신(권근)이 역대의 천명을 받아 창업한 임금들을 살펴보건대, 덕업(德業)의 성대함과 하늘이 주는 부명(符命)의 신이함이 간책에 찬란하게 빛나 후세에 밝게 전함이 끝이 없다. 이제 우리 조선이 일어남에 성대한 덕과 하늘이 주는 큰 부명이 예보다 더욱 빛나니, 이에 참으로 그 왕위를 얻고 또 그 장수함을 얻은 것이다. 넓은 터전을 높이 쌓고, 큰 복록을 흘려보내니 천지와 더불어 장구하리라.
신(臣) 근(近)이 외람되게 비명(碑銘)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대한 덕을 기술하여 밝은 빛을 후세에 드리우게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필력이 비졸하여 성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밝은 뜻을 만족하게 칭송하기에 부족하므로, 삼가 사람의 이목에 남아 있는 훈덕만을 찬하고, 감히 머리 조아려 절하며 명(銘)을 올린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이 백성을 낳으시고
임금을 세워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게 할 때에는
곧 덕 있는 이를 돌보았도다.
하늘이 순순히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명령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니,
우(禹) 임금에게는 현규(玄圭)를 주었고,
주 무왕(周武王)의 꿈은 점[卜]과 맞았도다.
우리 조선이 처음에 왕업을 창건할 적에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도다.
하늘의 부록(符籙)이 미리 정하여졌으니
하늘의 마음도 분명하도다.
고려의 운수가 이미 끝나
임금이 우매하고 재상이 혹독하며,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켜
대국에 싸움을 걸었도다.
우리 태조께서 바른 의리로 깃발을 되돌려
죄인을 잡으니,
그 충성 위로 중국에 들려
황제가 기뻐하였도다.
하늘의 움직임이 제대로 돌아가고
민정이 절박하여
위대한 왕업을 이미 이루었으나,
저자의 상인들도 동요되지 않았도다.
고 황제(高皇帝)가 찬탄하여 이르기를,
"그대가 나라를 이룩하였으되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이
하늘이 주는 기쁨을 즐기네."하고,
이어 국호를 내려주어
조선(朝鮮)이라는 옛 나라가 다시 이루어졌다.
지리를 살펴 도읍을 정하니
한양의 북쪽이라.
범이 웅크리고 용이 도사린 듯
왕기가 쌓였도다.
궁궐은 높고 높으며
종묘는 우뚝한데,
어진 마음 매우 깊어 살리기를 좋아하며,
정치는 빛나고 생각은 화순하였다.
온갖 제도는 갖추어 닦아지고
만 가지 변화가 이에 흡족하도다.
삼가 정치하시기에 지쳐서
성스런 맏아들에게 전하시고,
맏아들은 이어 공로가 있는 이에게 사양하여
오직 부자ㆍ형제간에 계승하였도다.
밝고 밝은 우리 임금
조그마한 기미도 반드시 살펴서,
두 번이나 화란을 평정하니
그 경사 더욱 독실하도다.
나라를 열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은
다 우리 전하의 공적이니,
천명은 사양하기 어렵고
신기(神器)는 제대로 의탁되었도다.
두 임금을 받들어 모심에
공손하고 더욱 정성스러웠도다.
이와 같은 효제(孝弟)와 신명에 통하여
상제의 돌보심이 더욱 두터웠도다.
상사를 당하자 근심에 잠겨
슬피 사모하며 몸부림쳐 울부짖었도다.
황제께서 부음을 듣고
매우 애도하며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도다.
또 태뢰(太牢)를 써 제사하며
부의(賻儀)를 후하게 하라는 칙명을 내리는가 하면,
아름다운 시호까지 내려 칭찬하니,
조상하는 예법이 완전히 갖춰졌도다.
하늘의 도움이 시종일관 변함없어
큰 복록이 길이 이어지고
자손은 천억(千億)으로 번창하며,
종묘와 사직은 유구하여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으리라.
영락(永樂) 7년(태종 9, 1409년) 4월 일.
돌을 세우다.
(뒷면)
비음기(碑陰記)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지극한 덕과 위대한 공으로 대업(大業)을 창건하여 날마다 정사를 보다가 병이 나 오래 끌자 왕위(王位)를 이양하고 오랫동안 영예로운 봉양을 누리셨다.
그러다가 영락(永樂) 무자년(태종 8, 1408년) 봄 정월에 또 병이 났는데, 우리 전하께서 지극한 정성과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에 대신 죽게 해 달라고 축원하자 병이 조금 나았다가, 그 뒤 5개월이 지나 병이 또다시 도져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셨다.
이에 예를 갖추어 양주(楊州)의 검암산(儉巖山)에 장사를 지냈는데, 한양(漢陽) 도성(都城)과의 거리는 20여 리이다. 검암 산의 줄기는 장백산(長白山)에서 시작하여 2천여 리를 꿈틀거리며 내려오다가, 철령(鐵嶺)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이어 수백 리를 내려오다가 멈추어 우뚝 솟아 백운산(白雲山)이 되었다.
또 남쪽으로 비스듬히 백여 리를 가다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우뚝 솟았는데, 그것이 바로 검암산이다. 건원릉은 계좌 정향(癸坐丁向)인데 직선으로 능의 동남쪽 병방(丙方) 421척(尺)의 자리에 비석을 세워 우리 태조의 공덕(功德)이 처음부터 끝까지 성대하였음을 이미 자세히 기록하였다.
전하(태종)께서 또 말씀하기를,『개국공신(開國功臣)의 성명은 마땅히 비석의 뒷면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사공신(定社功臣)이나 좌명공신(佐命功臣)들도 또한 모두 일의 기미에 따라 책략을 정하여 우리 태조께서 창건하여 물려주신 왕업(王業)을 널리 확대시켰으니만큼, 그들의 성명도 아울러 새겨 그 공이 없어지지 않도록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하고, 신 계량(季良)에게 사실을 기록하라고 명하셨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커다란 덕을 지닌 사람을 탄생시킨 것은 백성의 주인으로 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손발이 되어 보필하는 신하가 앞과 뒤에서 부지런히 움직여서 앞에서는 열고 뒤에서는 지킨 연후에야 커다란 공훈이 이루어지고 대업(大業)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 태조께서 창업할 적에는, 문무 대신(文武大臣)들이 천명(天命)의 귀추(歸趨)를 분명히 알고 실지로 좌우에서 이끌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인년(태조 7, 1398년)의 정사공신이나 경진년(정종 2 , 1400년)의 좌명공신에서 보듯이 모두 왕실의 훈신과 친족들이 잘 보필하지 않음이 없었다.
서로가 더불어 재상을 도와 공적을 이룩함으로써 왕업이 유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마땅히 비석에 새기어 후세에 이르기까지 광채를 드리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전하께서 선왕의 공렬(功烈)을 현양하고 왕실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을 포상한 미덕 또한 마땅히 아울러 전하여 영원히 남겨야 할 것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좌참의 수문전직제학 지제교 지문서 응봉사사 세자좌보덕(禮曹左叅議修文殿直提學知製敎知文書應奉司事世子左輔德) 신(臣) 변계량(卞季良)은 삼가 머리 조아려 절하고 씁니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裴克廉)ㆍ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李舒)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ㆍ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ㆍ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ㆍ한천군(漢川君) 조온(趙溫)ㆍ의정부찬성사(議政府賛成事) 남재(南在)ㆍ영성군(寧城君) 오사충(吳思忠)ㆍ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희계(鄭熈啓)ㆍ호조판서(戶曹判書) 조박(趙璞)ㆍ흥령군(興寧君) 안경공(安景恭)ㆍ참찬의정부사(叅賛議政府事) 장사길(張思吉)ㆍ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ㆍ예문관대학사(藝文舘大學士) 정총(鄭摠)ㆍ지의부사(知議府事) 김로(金輅)ㆍ이성군(伊城君) 손흥종(孫興宗)ㆍ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ㆍ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ㆍ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ㆍ서천군(西川君) 한상경(韓尙敬)ㆍ예문관대학사(藝文舘大學士) 침효생(沈孝生)ㆍ계림군(雞林君) 김곤(金稇)ㆍ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근(李懃)ㆍ복흥군(復興君) 조반(趙胖)ㆍ한산군(漢山君) 조인원(趙仁湲)ㆍ평해군(平海君) 황희고(黃希頋)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기(趙琦)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인찬(金仁賛)ㆍ장성군(長城君) 정룡수(鄭龍壽)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장담(張湛)ㆍ보성군(寳城君) 오몽을(吳蒙乙)ㆍ남양군(南陽君) 홍길민(洪吉旼)ㆍ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ㆍ참지의정부사(叅知議政府事) 황거정(黃居正)ㆍ흥성군(興城君) 장지화(張至和)ㆍ흥원군(興原君) 이부(李敷)ㆍ참지의정부사(叅知議政府事) 민여익(閔汝翼)ㆍ화성군(花城君) 장사정(張思靖)ㆍ서성군(瑞城君) 유원정(柳爰廷)ㆍ완성군(完城君) 이백유(李伯由)ㆍ고성군(高城君) 고려(高呂)ㆍ상산군(商山君) 이민도(李敏道)ㆍ호조전서(戶曹典書) 조영규(趙英珪)ㆍ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임언충(任彦忠)ㆍ상장군(上將軍) 한충(韓忠)」
정사공신(定社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ㆍ영안승(寧安丞) 량우(良祐)ㆍ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ㆍ봉녕군(奉寧君) 복근(福根)ㆍ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륜(河崙)ㆍ의승부우정승(議丞府右政丞) 이무(李茂)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병조판서(兵曹判書) 천우(天祐)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한천군(漢川君) 조온(趙溫)ㆍ호조판서(戶曹判書) 조박(趙璞)ㆍ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ㆍ참찬의정부사(叅賛議政府事) 장사길(張思吉)ㆍ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ㆍ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김로(金輅)ㆍ청성군(清城君) 정탁(鄭擢)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장담(張湛)ㆍ화성군(花城君) 장사정(張思靖)ㆍ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장철(張哲)
좌명공신(佐命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완천(完川) 정숙(鄭淑)ㆍ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륜(河崙)ㆍ의정부좌정승(議政府左政丞) 성석린(成石璘)ㆍ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이무(李茂)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병조판서(兵曹判書) 천우(天祐)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ㆍ한천군(漢川君) 조온(趙溫)ㆍ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ㆍ칠원군(漆原君) 윤저(尹柢)ㆍ호조판서(戶曹判書) 조박(趙璞)ㆍ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ㆍ이조판서(吏曹判書) 유량(柳亮)ㆍ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ㆍ오성군(汚城君) 한규(韓珪)ㆍ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ㆍ계성군(雞城君) 이래(李來)ㆍ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ㆍ의성군(義城君) 김영렬(金英烈)ㆍ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석명(朴錫命)ㆍ여산군(麗山君) 김승주(金承霔)ㆍ철성군(鐵城君) 이원(李原)ㆍ곡성군(谷城君) 연사종(延嗣宗)ㆍ반성군(潘城君) 박은(朴訔)ㆍ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ㆍ파평군(坡平君) 윤곤(尹坤)ㆍ남성군(南城君) 홍서(洪恕)ㆍ풍천군(豐川君) 심구령(沈龜齡)ㆍ참지의정부사(叅知議政府事) 황거정(黃居正)ㆍ마성군(麻城君) 서익(徐益)ㆍ회령군(會寧君) 마천목(馬天牧)ㆍ칠원군(漆原君) 윤자당(尹子當)ㆍ이성군(利城君) 서유(徐愈)ㆍ서령군(瑞寧君) 유기(柳沂)ㆍ평강군(平江君) 조희민(趙希閔)ㆍ계림군(鷄林君) 이승상(李升商)ㆍ조천군(照川君) 김우(金宇)ㆍ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ㆍ원평군(原平君) 윤목(尹穆)ㆍ월천군(越川君) 문빈(文彬)ㆍ여량군(礪良君) 송거신(宋居信)
의정부좌정승창녕부원군(議政府左政丞昌寧府院君) 신(臣) 성석린(成石璘) 나이 72세에 쓰다.
(비석의 높이는 10척 5촌, 폭은 3척 6촌, 두께는 7푼이며 해서로 썼다. 제목의 글씨는 3촌 5푼의 크기의 전서(篆書)로 썼다. 高十尺五寸幅三尺六寸字徑七分楷書題額字徑三寸五分篆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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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原文)
楊州 朝鮮太祖健元陵神道
太祖健元陵碑(題額)
有明諡康獻朝鮮國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健元陵神道碑銘 幷序
推忠翊戴佐命功臣崇政大夫吉昌君集賢殿大提學兼判內贍寺事知經筵春秋館事世子貳師臣權近奉 敎撰.
輸忠同德翊戴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修文殿大提學領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傅昌寧府院君臣成石璘奉 敎書.
資憲大夫知議政府事集賢殿提學知經筵春秋館事臣鄭矩奉敎篆.
天眷有德以開治運必先現異彰其符命夏有玄圭之錫周有協卜之夢由漢以降代各有之皆由天授非出人謀惟我」太祖大王之在龍淵也勳德旣隆符命亦著夢有神人執金尺自天降而授之曰公宜持此正國夏圭周夢可同符矣又有異人來門獻書云得之智異山巖石之中有木子更正三韓之語使人出迎則已去矣書雲觀舊藏秘記有九變震」檀之圖建木得子朝鮮卽震檀之說出自數千載之前由今乃驗天之眷佑有德信有徵哉臣謹按璿源李氏全州望族司空諱翰仕新羅娶宗姓之女六世而至競休始仕高麗十三世而至皇高祖穆王入仕元朝而長千夫四」世襲爵咸能濟美元政衰皇考桓王還事高麗恭愍王至正辛丑紅寇陷王京恭愍南遷遣師克復我 太祖先登獻捷明年壬寅擊走胡人納哈出又明年癸卯却逐僞王塔帖木恭愍恃倚益重累官至將相出入中外樂觀經」史亹亹無倦濟時之量好生之德出於至性恭愍薨異姓竊位權姦擅國濁亂朝政海寇深入焚掠郡縣洪武庚申我太祖戰捷雲峯東南以安戊辰侍中崔瑩誅戮權奸過於慘酷賴我」太祖全活頗多乃以太祖爲右侍中仍授右軍都統節鉞逼遣攻遼師次威化島倡率諸將仗義旋旆師旣登岸大水沒島人皆神之執退瑩代以名儒李穡爲左侍中方是時也權奸濁亂狂悖搆隙危亡岌岌禍亂莫測非我」太祖轉移之力一國殆矣穡曰今公擧義以尊中國然非執政親朝則不可尅日如京 太祖爲擇諸子以今我 主上殿下與穡偕朝」高皇帝嘉賞而遣己巳秋帝責異姓爲王太祖與將相選立王氏宗親定昌君瑤盡心輔政革私田汰冗官羣情胥悅功高見忌讒慝交搆定昌頗惑焉太祖以盛滿請老而不得謝會因西行遘疾而還謀者益急我」殿下應機制變群謀瓦解洪武壬申秋七月十六日殿下與大臣裴克廉趙浚等五十二人倡義推戴臣僚父老不謀僉同 太祖聞變驚起牢讓再三勉登王位不下堂階而化邦國非天啓佑有德疇克如玆卽遣知中樞院事」臣趙胖奏聞 帝詔曰三韓之民旣尊李氏民無兵禍人各樂天之樂乃帝命也繼又有勑國更何號卽遣藝文館學士臣韓尙質奏請又詔曰維朝鮮之稱美可以本其名而祖之體天牧民永昌後嗣繇我」太祖威聲義烈升聞于上簡在帝心故當請命輒蒙兪音豈偶然哉越三年甲戌夏有搆國家者帝命遣親男入朝 太祖以我殿下通經達理賢於諸子卽遣應命旣至敷奏稱旨優禮賜還其冬十」一月定都于漢陽營宮室建宗廟嘗已追尊四代皇高祖爲穆王配李氏爲孝妃皇曾祖爲翼王配崔氏爲貞妃皇祖爲度王配朴氏爲敬妃皇考爲桓王妃崔氏爲懿妃修禮樂而毖祀事定章服而辨等威興學以育才」重祿以勸士辨柝詞訟愼簡守令獘政悉革庶績維熙海寇來服四境按堵我太祖巍蕩盛德眞所謂天錫勇智聰明神武雄偉之主也姦臣鄭道傳以表辭獲譴帝庭陰謀拒命戊寅秋八月乘我太祖不豫之隙欲」挾幼孽以肆已志我殿下炳幾殲除以嫡以長請建上王爲世子九月丁丑太祖以疾未瘳禪于上王上王未有繼嗣且謂開國定社咸我殿下之績乃冊爲世子庚申秋七七月己巳獻太祖以啓運神武太上」王之號冬十有一月癸酉上王亦以疾禪位于我殿下遣使請命永樂元年夏四月帝遣都指揮使高得等奉詔印來封我 殿下爲國王繼遣翰林待詔王延齡等來賜殿下袞冕九章秩視親王我」殿下奉養兩宮誠敬備至永樂戊子五月二十四日壬申太祖晏駕春秋七十四歲在王位七年老不聽政十有一年弓劔忽遺嗚呼痛哉我殿下哀慕罔極諒闇盡禮奉冊寳上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之號以是年」九月初九日甲寅葬于城東楊州治之儉巖山陵曰健元及訃聞」皇帝震悼罷朝卽遣禮部郎中林觀等賜」祭以大牢其文略曰惟王明達好善出於天性敬順天道效義攄忠恭謹事大保恤一方之民我皇考深嘉忠誠賜復國號曰朝鮮王功之著雖古朝鮮之賢王無以過也又賜」誥命諡曰康又勑殿下賜賻特厚寵異之典備極無憾盖我太祖畏天之誠殿下繼志之孝前後相承克享天心故於始終之際大獲天人上下之助如此其至嗚呼盛哉」首妃韓氏安邊世家贈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諱卿之女先薨初諡節妃加後諡承仁順聖神懿王后誕六男二女上王居二我殿下居五長曰芳雨鎭安君先卒次三芳毅益安大君亦先卒次四芳幹懷安大君次六芳衍登科不祿贈元尹女長慶愼宮主下稼上黨君李佇非一李也次慶善宮主下嫁靑原君沈淙次妃康氏判三司事允成之女初封顯妃先薨諡神德王后誕二男一女男長芳蕃贈恭順君次芳碩贈昭悼君女慶順宮主下嫁興安君李」濟亦非一李皆先卒上王配金氏今封王大妃贈門下侍中天瑞之女無嗣我中官靜妃閔氏驪興府院君諡文度公諱霽之女誕四男四女男長世子次祜孝寧君次祹忠寧次幼女長貞順宮主下嫁淸平君李伯剛亦非」一李次慶貞宮主下嫁平壤君趙大臨次慶安宮主下嫁吉川君權跬次幼鎭安娶賛成事池奫之女生二男長曰福根奉寧君次曰德根元尹益安娶贈門下賛成事崔仁㺶之女生男曰石根益平君懷安娶贈門下賛成事閔璿之」女生男曰孟衆義寧君臣觀歷代受命之君德業之盛符命之神輝暎簡冊流光罔極今我朝鮮之誕興也盛德貞符于古有光是宜旣得其位又得其壽峙洪基而流景祚與天地而久長矣臣近濫承勒碑之命敢不竭精鋪張」盛德以垂耿光然臣筆力鄙拙不足以發揚盛美稱塞明旨謹撰勳德之在人耳目者敢拜手稽首而獻銘其辭曰」
天生斯民 立以司牧 迺長迺治 迺長有德 非天諄諄 有命赫赫 禹錫玄圭 周夢協卜 惟我朝鮮 肇基 王迹 夢有神人 授以金尺 符籙前定 天心昭晰 麗運旣終 君昏相酷 農月興師 大邦搆」隙 我旆義旋 罪人斯得 忠誠上聞 帝心載懌 歷數有歸 輿情斯迫 大業旣成 市肆不易 高皇曰咨 惟爾有國 民無兵禍 樂天之榮 繼賜國號 朝鮮是復 相地定都 于漢之北 虎踞龍蟠 王氣攸積 宮室崇崇 宗廟翼翼 仁深好生 治蔚思輯 百度具修 萬化斯洽 乃倦于勤 傳付 聖嫡 乃讓于功 惟世惟及 明明我 后 有幾必燭 禍亂再平 其慶克篤 開國定社 咸我之」績 大命難辭 神器有托 秪奉兩宮 虔恭愈恪 孝弟通神 帝眷尤渥 遭喪惸惸 哀慕踊躃 帝聞震悼 遣使弔哭 大牢有祀 厚賻有 勑 美諡褒嘉 恤典備飭 自天佑之 終始不忒景」祚緜緜 子孫千億 宗祀悠長 與天罔極」
永樂七年四月 日立石
(裏面)
碑陰記恭惟我」
太祖以至德豐功草創鴻業日勤于治迺以失豫彌留禪位貽謀久享榮養於永樂戊子春正月又不豫我」殿下至誠克敬祈」天請命乃得小瘳五閱月面又作薨子正寢以禮葬于楊之儉巖山距京城二十許里山之來根於長白蜿蜒二千餘里至鐵嶺折而西數百里停而峙焉曰白雲又南迤百餘里北搆而」面南卽儉巖也陵則癸坐而丁向直陵之丙方四百二十一尺立石以紀我」太祖功德始終之盛旣詳矣 殿下又」以爲開國功臣名氏當列于碑之陰其定社佐命功臣亦皆應機定策以弘大我」太祖創垂之業者其幷刻之用示不泯命臣季良識之臣竊惟天之生大德以主斯民也必有股肱輔弼之臣奔走先後開之於前守之於後然後大勳以集大業以久我」太祖之興也則有文武大臣灼知天命實能左右啓迪之至若定社於戊寅佐命於庚辰亦莫非勳親良弼相與克咸厥功以永洪祚是宜刻名于石垂耀將來以我」殿下顯揚祖烈褒奬勳臣之美亦當幷傳而不朽矣通政大夫禮曹左叅議修文殿直提學知製 敎知文書應奉司事世子左輔德臣卞季良謹拜手稽首而爲之記」
開國功臣
義安大君和 門下左侍中裴克廉 領議政府事趙浚 上洛府院君金士衡 安平府院君李舒 漢山府院君趙英茂 奉化伯鄭道傳」判三司事尹虎 興安君李濟 靑海君李之蘭 星山君李稷 漢川君趙溫 議政府賛成事南在 寧城君吳思忠」判漢城府事鄭熈啓 戶曹判書趙璞 興寧君安景恭 叅賛議政府事張思吉 宜城君南誾 藝文舘大學士鄭摠 知議府事金輅」伊城君孫興宗 玉川君劉敞平城君趙狷 淸城君鄭擢 西川君韓尙敬 藝文舘大學士沈孝生 雞林君金稇」判中樞院事李懃 復興君趙胖 漢山君趙仁湲 平海君黃希頋 知中樞院事趙琦 知中樞院事金仁賛 長城君鄭龍壽」知中樞院事張湛 寳城君吳蒙乙 南陽君洪吉旼 東原君咸傅霖 叅知議政府事黃居正 興城君張至和 興原君李敷」叅知議政府事閔汝翼 花城君張思靖 瑞城君柳爰廷 完城君李伯由 高城君高呂 商山君李敏道 戶曹典書趙英珪 判繕工監事任彦忠 上將軍韓忠」
定社功臣
義安大君和 益安大君芳毅 寧安丞良祐 靑原君沈淙 奉寧君福根 領議政府事趙浚 上洛府院君金士衡」領議政府事河崙 議丞府右政丞李茂 漢山府院君趙英茂 兵曹判書天祐 靑海君李之蘭 漢川君趙溫 戶曹判書趙璞」安城君李叔蕃 叅賛議政府事張思吉 鷲山君辛克禮 知 議政府事金輅 清城君鄭擢 知中樞院事張湛 花城君張思靖」中樞院副使張哲」
佐命功臣
義安大君和 完川鄭淑 領議政府事河崙 議政府左政丞成石璘 議政府右政丞李茂 漢山府院君 趙英茂 兵曹判書天祐」靑海君李之蘭 星山君李稷 漢川君趙溫 吉昌君權近 漆原君尹柢 戶曹判書趙璞 安城君李叔蕃」吏曹判書柳亮 鷲山君辛克禮 汚城君韓珪 蓮城君金定卿 雞城君 李來 漢平君趙涓 義城君金英烈」知議政府事朴錫命 麗山君金承䨟 鐵城君李原 谷城君延嗣宗 潘城君朴訔 長川君李從茂 坡平君尹坤」南城君洪恕豐川君沈龜齡 叅知議政府事黃居正 麻城君徐益 會寧君馬天牧 漆原君尹子當 利城君徐愈」瑞寧君柳沂 平江君趙希閔 鷄林君李 升商 照川君金宇 永陽君李膺 原平君尹穆 越川君文彬」礪良君宋居信」
議政府左政丞昌寧府院君臣成石璘年七十二歲書
(高十尺五寸幅三尺六寸字徑七分楷書題額字徑三寸五分篆書)
↑태조 이성계 영정
[보물지정번호] 보물 제931호
[지정날자] 1987년 12월 1일
[해지일자] 2012년 6월 29일 해지
[국보지정번호] 국보 제317호
[지정날짜] 2012년 6월 29일
[소유자] 국유
[시대] 조선시대
[규모] 폭(幅)
[소재지]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경기전)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총 26점이 제작되었지만 현재 전주시 경기전 경내의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어진이 현존하는 유일본이다.
경기전에 봉인된 어용(御容)은 경주 집경전본(集慶殿本)을 모사한 것이었는데, 세종 24년(1442) 7월에 집경전의 어용과 함께 개화(改畵)하여 동년 10월에 봉안했다.
현재 경기전 어진(御眞)은 고종 9년(1872) 9월에 개화(改畵)한 것이다.
인진왜란이 일어나자 재빨리 내장산에 피난하였다가 정읍, 태인, 익산, 용안, 임천, 은산, 정산, 온양, 아산을 거친 다음 강화도 안주를 경유하여 묘향산 별전(別殿)에 봉안되었다.
그 후 어용은 여러 번의 수난을 겪었는데 즉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성에 피난했다가 돌아온 일이 있었으며, 영조 43년(1767) 이른바 정해대재(丁亥大災)때는 전주향교 명륜당에 긴급 피난한 일이 있으며 고종 31년(1894)에는 동학군의 전주입성으로 한때 위봉 산성에 피난하기도 했다.
↑조선국 태조 건원릉 신도비각
조선국 태조 건원릉 신도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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