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영의정 김전(金詮) 신도비명 - 연안김씨

야촌(1) 2011. 11. 28. 02:58

[상촌선생집 제28권]

 

영의정 김공 신도비명(領議政金公神道碑銘)

 

지은이 : 신흠(申 欽)

 

고 영의정 김 충정공(金忠貞公)은 우리 중종공희대왕(中宗恭僖大王)을 도와 청백으로 이름이 났다. 향년 66세로 재직 중에 별세하였는데, 이때는 가정 계미년(1523 중종 18)이었으며 고양(高陽) 목희리(木稀里) 자좌(子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만력 임인년(1602 선조 35)에 이르러 선조소경대왕(宣祖昭敬大王)께서 공의 증손인 이조 좌랑 제남(悌男)의 따님을 맞아들여 비(妃)로 삼았고, 좌랑공은 국구(國舅)로서 영돈령부사(領敦寧府使)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올려 제수되었다.

 

부원군은 존귀해지자 조상에게 효성을 바치는 도리를 생각하고 공의 선대 보첩과 자손 관계를 정리하여 흠(欽)에게 부탁하기를 “충정공의 묘소가 이제 89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비문을 새겨 유택(幽宅)을 빛나게 하지 못했으니, 어찌 나의 자손을 훈계하겠는가.

 

이름을 선양하되 사실적으로 하여 우리 선조의 업적을 길이 전하게 할 일을 그대에게 부탁하네. 비록 그 벼슬살이 이력과 행적은 오래된 일이라서 상조할 수 없더라도 영의정의 벼슬이며 당대에 뛰어난 풍도는 기록할 만하네.” 하였다.

 

흠은 삼가 그 명을 받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아, 이 일은 이때를 기다렸던 것이 아닌가. 김씨는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연안(延安)에서 문벌이 갈라졌다. 원조(遠祖) 섬한(暹漢)은 사문박사(四門博士)이고 그 뒤로 휘 준린(俊麟)대장군(大將軍), 경성(景成) 판도판서(版圖判書), 우(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광후(光厚) 밀직제학(密直提學)이 있었다.

 

도(濤)에 이르러서는 고려 공민왕을 섬겨 동지밀직제학을 지냈다. 중국에서 황제가 대궐에 임석하여 보이는 제거(制擧)에 급제하고 호를 나복산인(蘿葍山人)이라 하였는데, 공민왕이 손수 성명과 자호(字號)를 써주어 총애를 표시하였다.

 

본조에 들어와 휘 자지(自知)는 개성유후(開城留侯)로 호는 일계(逸溪), 시호는 문정(文靖)이었는데 공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조부 해(侅)는 내자시 윤(內資寺尹) 증 우찬성이고, 선고 우신(友臣)은 지중추부사 증 영의정이며 시호는 호간(胡簡)인데, 공으로 인하여 존귀해졌다.

 

선비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청풍군수(淸風郡守) 계층의 따님으로 증 정경부인인데 천순(天順) 무인년(1458 세조 4)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전(詮), 자는 중륜(仲倫)이고 나헌(懶軒)은 호이다. 홍치(弘治) 기유년(1489 성종 20)에 명경과(明經科)에 장원급제하여 즉시 홍문관 수찬에 제수된 뒤에 지방에 나가 예안현감(禮安縣監)이 되고, 다시 들어와 교리가 되었으며 또 황간 현감(黃澗 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이 모두 특지로 제수된 것이었으니, 예안ㆍ황간 두 고을은 매우 피폐하였으므로 공의 힘으로 인해 소생시켜 보자는 뜻에서였다.

 

예안 백성들은 생사당(生祀堂)을 세워 폐하지 않고 받들었다. 응교ㆍ사간ㆍ집의ㆍ전한ㆍ작제학을 거쳐 승정원 승지에 오르고 얼마 후에 육경의 반열로 발탁되었다. 가선(嘉善)의 품계로는 이조ㆍ호조 참판, 대사헌을 지내고 자헌(資憲)의 품계로는 이조ㆍ형조ㆍ공조 판서, 한성 판윤, 경기 관찰사를 지냈으며, 여러 차례 대사헌을 지낸 뒤에 숭정(崇政)으로 올라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기묘년 옥사가 일어났을 때 공은 임금께 아뢰어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을 부르게 하자 광필이 들어가 극진하게 간하여 옥사가 조금 부드럽게 되었는데, 공은 무게가 있고 침착하여 과격한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공을 잘 모르는 자는 간혹 공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없다고 꼬집지만 공의 본심은 이와 같았다.

 

얼마 후 복상(卜相)하여 우의정이 되고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이상은 공의 일생 동안의 벼슬살이 이력이다.

공은 효성과 우애를 천성적으로 타고났으며 이를 일가 친족에게 미루어 정의가 두텁고 화목하였다.

 

큰 풍도를 지녀 생업을 일삼지 않고 조정에 벼슬한 30여 년 동안, 사양하고 받는 것을 신중히 하여 안으로는 변변한 집 한 채가 없고 밖으로는 전답이 없이 오직 거문고와 술로써 스스로 즐겼으며, 문장에 능하여 한 시대의 추앙을 받았다.

 

초취(初娶)는 풍천 노씨(豐川盧氏)로 판관 균(昀)의 따님인데 장지는 공 묘소의 바른편 기슭에 있고 계실(繼室) 진천 송씨(鎭川宋氏)는 감역(監役) 환주(環周)의 따님으로 장지는 공 묘소의 아래에 있다.

 

4남 1녀를 낳아 안도(安道)는 함종 현령(咸從縣令)이고, 그 다음은 안우(安遇), 그 다음 안수(安遂)는 연산현감(連山縣監)이며, 딸은 판관 정충려(鄭忠礪)에게 시집갔는데, 이상은 노씨의 소생이고 안달(安達)은 송씨의 소생이다.

 

안도는 3남 1녀를 낳아 아들은 진(縝)ㆍ인(䄄)ㆍ오()이고 딸은 한숭건(韓崇健)에게 시집갔다.

안우는 2녀를 낳아 현감심우명(沈友明)과 김광국(金光國)에게 시집갔으며 측실의 아들은 희생(喜生)이다.

 

안달은 1남 1녀를 낳아 아들은 불(祓)이고 딸은 홍적(洪籍)에게 시집갔다.

진은 1녀를 두어 현감정선복(鄭善復)에게 시집갔다. 인은 2녀를 두어 평시령(平市令)장형(張逈)과 이욱(李勗)에게 시집갔다.

 

오는 4남 2녀를 두어 효남(孝男)은 안협 현감(安峽縣監)이고 그 다음은 연흥공(延興公 김제남(金悌男))이며, 그 다음은 충남(忠男)과 신남(信男)인데 다 요절하였다. 딸은 첨지남정화(南挺華)와 이홍(李鴻)에게 시집갔다.

 

연흥공은 종조부 안수(安遂)에게 출계하였다. 불은 1남을 두어 이름은 준남(俊男)인데 현감이다.

한숭건은 2남을 두어 백후(伯厚)는 선공정(繕工正)이고 중후(仲厚)는 진사이다. 정선복은 1녀를 두어 현감조수륜(趙守倫)에게 시집갔다.

 

효남은 1남을 두어 이름은 근(瑾)인데 위솔(衛率)이다. 연흥공은 3남 2녀를 두어 장자 내(琜)는 청주 목사(淸州牧使)인데 공의 신도(神道)에 비석을 세우는 일을 실제로 주선하고 감독하여 마침내 성사시켰으니, 그 또한 가정의 교훈이 몸에 익고 조상의 법도를 이어받아 효도를 소홀히 하지 않는 자가 아니겠는가.

 

그 다음 규(珪)는 14세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그 다음 선(瑄)은 아직 어리다. 장녀는 현감 심정세(沈挺世)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곧 왕대비로 정명공주(貞明公主)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탄생하였다. 근(瑾)과 내(琜)는 다 자녀를 두었으나 아직 어리다.

 

공의 선대는 그 유래가 깊은데 보첩에 기록이 된 자로서 세상에 이름이 있는 이는 나복선생(蘿葍先生)이고 여러 대를 내려와 공이 비로소 크게 일어났으며 또 3대를 내려와 연흥공이 더욱 크게 일어나 능히 사록(沙麓)의 상서를 모았으니, 이 어찌 선을 쌓은 경사가 족히 그 복을 자손에게 전하여 끝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상공 벼슬 올라가고 / 上公之秩

오랜 나이 살으시어 / 耆年之壽

이미행복 누리고서 / 旣享其嘏

다시 그걸 남기시니 / 于阜于後

어진 왕비 탄생하여 / 篤生任姒

한 나라의 국모로세 / 母臨一國

 

선은 보답 있는 거라 / 惟善有報

공은 그걸 받았다네 / 公之食之

거북 좌대 용머리에 / 龜趺螭首

묘도 한결 빛나는데 / 墓道增華

서술하고 명을 지어 / 文追作銘

거짓없이 보이노라 / 刻示無訛

 

[각주]

 

[주1] 공의 본심은 이와 같았다. : 김전이 기묘사화 때 억울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중종에게 정광필을 불러 들이게

          한 것을 가리킴.

 

[주2] 사록(沙麓)의 상서를 모았으니, : 김제남이 왕비를 낳은 것을 말함. 사록은 춘추 시대 진(晉) 나라 사록산인데

          노 희공(魯僖公) 14년에 사록이 무너지자 진 나라 사관(史官)이 점을 치기를 “토(土)와 화(火)가 서로 어울려

          음이 성함으로써 사록이 무너진 것이다. 645년 뒤에 성녀(聖女)가 나올 것이다.” 하였음.《春秋 僖公 十四

          年》《漢書 卷九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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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領議政金公神道碑銘

 

故領議政金忠貞公。相我中宗恭僖大王。以淸白著聞。年六十六。考終于位。寔嘉靖癸未也。葬于高陽木稀里子坐之原。至萬曆壬寅。宣祖昭敬大王迎公之曾孫吏曹佐郞悌男女爲妃。佐郞公以國舅。陟拜領敦寧府事封延興府院君。旣貴矣。思所以推孝祖先者。次公之系牒子姓屬欽曰。忠貞公之墓。今八十九年矣。而無顯刻以賁諸幽。其何以詔吾子若孫。揚名歸實而壽吾先烈者。吾於子謀。雖其官歷履行。遠莫能稽。而秩膺九命。標揭當世者。爲可記也。欽謹受而序之曰。噫。其有待歟。金氏新羅宗姓。別族於延安。遠祖暹漢。四門博士。其後有諱俊麟大將軍。景成版圖判書。祐門下贊成事。光厚密直提學。傳至濤。事高麗恭愍王同知密直提學。登中朝制科。號蘿葍山人。恭愍王手書姓名字號以寵之。入本朝。有諱自知。開城留後。號逸溪。諡文靖。於公爲曾大父。祖曰侅。內資寺尹。贈右贊成。考曰友臣。知中樞府事。贈領議政諡胡簡。用公貴也。妣曰仁川李氏。知淸風郡事繼忠之女。贈貞敬夫人。天順戊寅生公。公諱詮。字仲倫。懶軒其號也。弘治己酉。明經壯元。卽拜弘文館修撰。出監禮安縣。入爲校理。又除黃澗縣。皆特授也。蓋二縣瘵甚。藉公爲重也。禮安民立生祀俎豆不廢。歷應敎,司諫,執義,典翰,直提學。陞承政院承旨。未久擢置卿班。其嘉善也爲吏曹戶曹參判。大司憲。其資憲也爲吏曹刑曹工曹判書。漢城判尹。京畿觀察使。屢爲大司憲。授崇政。右贊成兼判義禁府事。己卯獄起。公白召領議政鄭光弼。光弼入而極諫。獄事得以稍緩。公重默惡過激。故不識公者。或咎公無所辨白。而公之本心如此。未幾叶卜爲右議政。序躋首揆。公之始卒然也。公孝友得於天性。推諸族黨。克敦以睦。有大度。不事生業。立朝三十餘年。辭受不苟。內無室屋。外無田陌。唯以琴酒自娛。能文章。爲一時所推。初娶豐川盧氏判官昀女。葬在公墓之右麓。繼室鎭川宋氏監役環周之女。葬在公墓之下。凡四男一女。曰安道。咸從縣令。曰安遇。曰安遂。連山縣監。女曰鄭忠礪判官。盧氏出也。曰安達。宋氏出也。安道生三男一女。男曰禛,䄄,祦。女曰韓崇健。安遇生二女。曰沈友明縣監。曰金光國。側室子喜生。安達生一男一女。男曰祓。女曰洪籍。禛有一女曰鄭善復縣監。䄄有二女。曰張迥平市令。曰李勖祦。有四男二女。曰孝男安峽縣監。其次延興公。其次忠男,信男俱夭。女曰南挺華僉知。曰李鴻。延興公出後於從祖安遂。祓有一男曰俊男縣監。韓崇健有二男。曰伯厚繕工正。曰仲厚進士。鄭善復有一女曰趙守倫縣監。孝男有一男曰瑾衛率。延興公有三男二女。長琜淸州牧使。於公之神道豎石。實經紀而董理之。卒乎有成。其亦襲聞承宗。不遺於孝者耶。次珪。十四登進士。次瑄。幼。女長沈挺世縣監。次卽王大妃。誕生貞明公主,永昌大君。瑾,琜俱有子女而幼。公之世逖矣。得譜而名世者。蘿葍先生。累傳而公始大。又三傳而延興公益大。克鍾沙麓之祥。豈非積善之慶。足以委祉垂裕。繩繩不窮也耶。

 

銘曰。上公之秩。耆年之壽。旣享其嘏。又阜于後。篤生任姒。母臨一國。惟善有報。公之食之。龜趺螭首。墓道增華。文追作銘。刻示無訛

 

 

↑영의정 김전 신도비(領議政 金詮 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