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영의정 성안 상공(尙公) 신도비명.

야촌(1) 2011. 12. 2. 01:21

忍齋集卷之二

 

유명조선국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증시(贈諡) 성안(成安) 상공(尙公) 신도비명 병서(幷書 : 아울러 서문을 쓰다).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홍문관 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강녕군(江寧君) 홍섬(洪暹)이 글을 짓다.

 

봉헌대부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다.

선무랑 행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이제신(李濟臣-둘째사위)이 전서를 쓰다.

 

국조(國朝)에 재상으로 세상을 뜰때까지 공명을 누린자가 세상에 적지않지만, 많은 일을 겪으며, 여러 조정을 섬기면서 신상에 재앙을 입지않고, 덕을 갖추고 장수하며 죽어서도 베푼 은혜가 두루 미친 분은 서안공(成安公) 한 분 뿐이다.

 

공은 이름이 진(震)이요. 자는 기(起)이다. 선조는 목천인(木川人)으로 고려 초에 상(象)이란 성(姓)을 하사 받았는데, 뒤에 상(尙)으로 고쳤다. 국진(國珍)이 아들 득유(得儒)를 낳았는데, 최문헌공(崔文憲公)을 따라 배워 비로소 향유(鄕儒)를 면하고 뒤에 급사중(給事中)인 원(愿)을 낳았다.

 

그 후 영부(英孚)가 있는데 이분이 공의 증조부로 수군우후(水軍虞候)인 효충(孝忠)을 낳고, 우후(虞候)가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인 보(甫)를 낳았다. 이분이 연안(延安)의 망족(望族)인 김도(金濤)의 후예인 박사(博士) 휘(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성주산(聖住山)에서 기도를 드려 홍치(弘治)계축년(1493, 성종 24) 6월 5일에 공을 낳았다.

 

증조공은 임천(林川)에 살고 있었으니 가산이 풍족하였는데, 일찍이 채권을 불태우며 말하기를 "내 후손이 반드시 번성하여 덕이 모이고, 경사가 쌓일것이다." 하였는데 공에 이르렀다. 공은 태어나면서 부터 장대하고 기이하였다. 5세에 모 부인을 잃고, 8세에 찰방공(察訪公)을 잃어 큰 누나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 부인의 손에서 자랐다.

 

부인은 온후하고 장중하여 어른 같아서 질고(疾苦)를 겪으면서도 말이나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았다. 찰방공은 공이 어릴때 일찍이 늙은 하인인 경기(經紀)의 집에 맡겼는데 그 하인이 죽자 공은 곡식 백 곡(斛)을 주어 장사 지내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공의 국량이 큰 것을 이미 알았다.

 

나이가 15세가 지났으나 유업(儒業)을 닦지 않다가 동년배들에게 모욕을 당하자 마침내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다. 하산(夏山)이 공의 뜻을 시험해보려고 과거 공부를 권하니 공이 말하기를 "글을 읽는 것은 대업(大業)을 세우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하니 하산(夏山)이 그 뜻을 기특하게 여겼다.

 

이용재(李容齋), 김모재(金慕齋), 제공(諸公)이 공의 저술(著述)을 보고 모두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공은 성수침(成守琛), 성수종(成守琮), 형제와 함께 종유하며, 강학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였다. 병자년(1516, 중종 11)에 생원시에 입격해 상사(上舍)에 들어갔다.

 

대사성 유공(柳公) 운(雲)이 사기(士氣)를 진작하는 것을 좋아하여 공의 집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공의 이론을 보니 경륜(經淪)의 재주가 있음을 알겠다." 하였다. 기묘는(1519, 중종 14)에 별시(別試)에 입격해 비로소 승문원에 들어가 부정자(副正字-從九品)가 되었는데, 문서를 다루는 제주가 있다고, 천거를 받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正九品)에 제수되어 경악(經幄)에 입시하였다.

 

마침 당시 재상의 언론이 자못 바르고 정성스러워 좌중에 감히 그 말을 잇는 자가 없었는데 공이 유독 당의(讜議)라고 지적하매 논자들의 꺼리는 바가 되어 체직되어 서직(西職)에 제수되었다. 기묘년(1519 중종 14)간에 시의(時議)에 영합하는 자가 있어 사류(士類)를 중죄에 빠뜨리고자 하였다.

 

공이 이를 듣고 그 사람을 미워하여 그가 직접 말한 바를 여러번 말하니 그의 말이 자못 누설되었다. 이 때문에 화를 입어 오랫동안 낭서(郎署)에 머물렀다. 계미년(1523, 중종 18)에 예조좌랑(禮曺佐郞-正六品)으로서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나갔는데 공이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여 외적을 물리칠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병술년(1526, 중종 21)에 예조정랑(禮曹正郞-正五品)으로 성절사(聖節使)로 차출되어 서장관(書狀官)으로 경사(京師)에 조회하였다. 인종(仁宗)이 동궁으로 있을때, 뜻이 분명하고 학문이 있고, 국방의 일을 맏길 만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공은 필선(弼善)이 되어 오랫동안 권강(勸講)하여 학문을 열어 주고 넓혀 준 것이 많았다.

 

기축년(1529, 중종 24)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正四品)이 되어 다시 시강원(侍講院)에 들어가 문학(文學)으로 있다가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正五品),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正五品),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從三品),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正四品)와 전한(典翰-從三品)을 지냈다.

 

계사년(1533, 중종 28)에 특별히 통정대부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正三品)에 제수되었다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正三品)으로 옮겼으며, 외직으로 나가 강원도관찰사(江原道 觀察使-從二品)가 되었다.

 

당시 한 노파가 자식이 자신을 쪄 죽이려 한다고 하소연 아였는데, 공이 그 말이 속임수임을 눈치 채고 꼬치 꼬치 힐문하니 노파가 자복하며 말하기를 "자식이 불순하여 제가 무함하여 중죄를 받게 하려 했습니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이 억울함을 분명하게 밝힌 것에 감복 하였다.

 

을미년(1535, 중종 30)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동부승지(同副承旨-正三品)가 되고, 좌부승지(左副承旨-正三品)로 전보되었다. 정유년(1537,중종 32)에 다시 대사간(大司諫-正三品)에 제수되었다. 하료(下僚) 가운데 집정(執政) 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어, 희릉(禧陵-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 수석(水石)의 설(說)로 인해 고상 정공(鄭公) 광필(光弼)을 사지에 빠뜨리고자 하였는데 공이 상소를 올려 힘껏 구원하니 시론이 장하게 여겼다/

 

겨울에 특별히 형조참판(刑曹參判-從二品)에 제수 되었는데, 평소 남의 처지를 헤아리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 억울해 하는 옥사가 없었다. 무술년(1538, 중종 33)에 경기도관찰사(京畿觀察使-從二品)가 되었고, 기해년(1539, 중종 34)에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판서(刑曹判書-正二品)가 되었는데, 급히 승진했다고 논하는 자가 있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從二品)로 교체되어 제수되었다.

 

이해 가을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從二品)에 제수되고 겨울에 특별히 공을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從二品)에 제수하였다. 신축년(1541, 중종 36)에 상이 공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正二品)으로 불러 올리려 하였으나 간관의 말을 듣고는 실행하지 않았다.

 

겨울에 조정으로 돌아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從二品)가 되었다. 임인년(1542,중종 37) 봄에 재차 전에 명한 한성부판윤 겸 도총관(都摠管-正二品)에 제수하였다. 여름에 공조참판(工曹參判-從二品)에 제수되고, 얼마 안있어 특명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正二品)에 제수되었다.

 

갑진녕(1544, 중종 39)에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從一品)에 등급을 뛰어넘어 제수되니 또 말하는 자가 있었다. 상이 그를 타일러 따르게 하며, 말하기를 "종당에 대임(大任)은 이 사람이 맡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 충성스럽고 믿음직 스러움이 바깥으로 드러나서 임금이 기특하게 여겨 중시한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지돈녕 겸 지의금부사(知敦寧兼知義禁府事-正二品)로 개차(改差)되었다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옮겨졌다. 을사년(1545, 인종 1)에 유인숙(柳仁淑)이 꺼려하여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從二品)로 나아가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했다. 병오년(1546, 명종 1)에 우참찬(右參贊-正二品)으로 체차(遞差)되고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정헌대부(正憲大夫-正二品 品階)로 품계가 올랐다.

 

지춘추관(知春秋館)으로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가하였다. 무신년(1548, 명종 3) 가을에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르고 우찬성(右贊成-從一品)에 제수되었다.

 

기유년(1549, 명종 4) 봄에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가 되고, 가을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 崇錄大夫)에 오르고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正一品)에 제수되었으며 세 조정에 봉직한 은혜를 미루어 부친에게는 의정부영의정을 추증(追贈)하고 조부에게는 의정부좌찬성을 증조부에게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문정왕후(文定王后-中宗의 계비, 명종의 어머니)가 수렴청정을 할 당시 결단코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흥하고자 하여 공에게 말하기를 "승도(僧徒)에게는 지휘체계가 없으니 양종을 설치하여 통섭(統攝)을 두게 하고자 한다." 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오랫동안 폐지된 채로 있다가 회복시키려면 어찌 어려움이 크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니, 공의 생각은 은미한 말로 완곡하게 풍자하여 윗 사람의 뜻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공이 영합한다고 의심 하였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유교와 불교의 옳고 그름은 흑백처럼 분명하니 내가 어찌 임금의 잘못을 조장하는 짓을 하겠는가. 아마도 평소의 행실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해 이런 의심을 받게 되었나 보다. 마땅히 스스로 반성해야 할 뿐이다." 하였다.

 

신해년(1551, 명종 6)에 좌의정(左議政-正一品)으로 승진하였다. 정사년(1557, 명종 12)에 동궁을 책봉할 때, 공을 세자부(世子傅)로 삼았다. 무오년(1558, 명종 13) 여름 영의정 겸 세자사(領議政 兼 世子傅)로 승진하였다.

 

기미년(1559,명종 14)봄 공은 왜적과 오랑케가 준동하고 백성은 조정을 믿지 않고 관리들은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니, 이 모두는 재상을 잘못 임명한 때문이라고 인구(引咎)하며 파직해 줄 것을 힘껏 요청하였으나 상(上-임금)은 위무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에 상(上)이 취로정(翠露亭)에 납시어 재신(宰臣)들을 인견하고 친히 잔을 잡고 권하니 공이 은혜에 감격하여 취해 임금의 수레가 지나가는 길옆에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에 상(上)이 야외용 장막으로 가리게 하고 지나가고서는 그길로 내시를 시켜 공을 부축하여 나가게 하였으니 상으로 부터 공경히 예우 받음이 이와 같았다. 경신년(1560,명종 15) 동궁의 관례(冠禮) 때에 공에게 안마(鞍馬)를 상으로 내렸다.

 

신유년(1561, 명종 16) 가을에 공이 임천(林川)의 선영(先瑩)에 소분(掃墳=오랫동안 외지에서 벼슬하던 사람이 친부모의 산소에 가서 성묘하던 일.)하기 위해 배사(拜謝)하자 상이 공의 손자인 시손(蓍孫)에게 말을 타고 공을 따라가 그행차를 보호하도록 명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표피(豹皮)를 하사 하였다.

 

또 소분(掃墳)을 마치고 어전에 나아가니 사의(蓑衣)를 하사하니 대개 근세의 훈구대신들에게도 행하지 않던 대접이었다. 공이 전(箋)을 올려 은혜에 감사하자, 상(上)이 답하기를 "이는 내가 대신(大臣)을 공경하고 노덕(老德)을 예우하는 뜻이다." 하였다.

 

임술년(1562,명종 17) 공이 70세가 되자 예(禮)에 의거하여 치사(致仕)하자 상이 온화하게 타이르며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 하였다. 연회하는 날에 사전(四殿)에서 모두 술과 고기를 보내주어 공이 또 전(箋)을 올려 사례하니 상이 답하기를 "칠십 살은 옛부터 드무니 내가 기덕(耆德)을 귀하게 여긴다.

 

재상(宰相)을 맡은지 12년이나 세월이 많지 않았으니 어찌 노성한 이를 물러나게 하겠는가.' 하였다. 계해년(1563,명종 18) 1월에 더욱 간절하게 물러나기를 청하니 상이 거듭 공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비로소 그 청을 들어주었으며, 영중추부사 겸 영경영(領中樞府事兼領經筵)에 제수하니 나라에 큰일이 있을 경우 필히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후 동궁이 불행히 승하하자 공은 달려가 곡읍(哭泣)하고 연일 식음을 전폐하다가 마침내 심통(心痛)을 얻어 병이 위태로워졌다. 그런데도 교외에 까지 따라가 영구(靈柩)를 조송(祖送)하려 하매 혹자가 병든 몸으로 따라가는 것은 편치 않다고 하며 말리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동궁의 옛 스승으로 동궁을 떠나보내는 마당에 예를 폐할수 없다." 하였다.

 

이 때 부터 심통과 위장병이 더욱 심해졌다. 몇달 후 상(上)이 공이 병든 것을 알고 내의(內醫)를 보내 문병하고 어주(御廚)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주었으니, 무릇 공을 위안하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하늘은 빠뜨리는 법이 없어 마침내 갑자년(1564, 명종 19) 윤 2월 23일 수(壽) 72세로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상(上-임금)이 부음을 듣고 조회를 멈추었고 고기 반찬을 들지 않으며 애도 하였다.

 

고사(故事)에 대신(大臣)이 병들었거나 세상을 떠났을 때, 승지를 보내, 당사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묻게하는 예가 있었는데, 당시 정원(政院)에서 공의 병이 위태로운 것을 알지 못해 상이 승지를 보내 묻게 하지 못하였다.

 

상은 이를 통한으로 여겨 더욱 부의(賻儀)를 넉넉히 내리고 장례 물품을 지급 하였다. 5월 19일 과천(果川) 동쪽 상초리(霜草里) 곤좌간향(坤坐艮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과는 같은 좌향에 묘역은 달리 하였다.

 

공(公)은 타고난 성품이 충후(忠厚)하며, 풍채가 아름답고 장중하며 얼굴 빛이 맑고 기운은 화평하며, 도량은 넓고 생각은 깊었다. 대인관계는 모나거나 특이하지 않았다. 무례하게 구는 사람과는 더불어 계교(計較)하지 않았다.

 

행동거지가 느긋하고 여유가 있어 비록 창황한 경우를 만나더라도 일찍이 빨리 말하거나 급하게 안색을 바꾸지 않았다. 또 알려지지 않은 덕성과 국량이 많은 편이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과 정성공(靖成公) 윤은보(尹殷輔)및 내선군인 문희공(文僖)公)은 모두 공을 보상(輔相)의 그릇감으로 기대 하였다.

 

선조를 받드는 데, 삼가서 몸에 질병이 있어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비록 집에 있더라도 제사 지낼 때와 마찬가지로 반듯이 관복(冠服)을 입고 정좌(靜座) 하였으며, 제사 지내는 시간이 지나서야 관복을 벗고 자세를 편히 하였다.

 

부모님을 섬기지 못한것을 매번 통한(痛恨)으로 여겨 본인의 생일에 자손들이 축수(祝壽)를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태어나서 부모님의 얼굴도 알지 못하고 또 부모님을 불러 보지도 못했으니 실로 하늘과 땅 사이의 일개 죄인이다." 하였다.

 

행동함에 있어서는 법도나 규칙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으며, 항상 타고난 기질을 바로잡고 부드럽게 하여 덕성을 함양하고자 하였다. 서재(書齋)의 벽에다 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박함은 당연히 중후함으로 바로 잡아야 하고, 엉성함은 당연히 꼼꼼함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자경편(自警編)을 즐겨 읽었으며 도량(度量), 도회(韜晦), 등의 편(篇)에 더욱 유의하였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증점(曾點)이 거문고를 타다가 공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목을 외우며 일상생활에서 기질을 바로잡고 말과 행동을 검속하였으니 한갓 글을 외우기만 일삼는 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사람을 대함에 평탄하고 정감이 있어 사람을 사귀는 데, 어떤 한계를 두지 않았다. 남의 잘못을 듣게 되면, 반듯이 타산지석으로 삼을 방법으로 생각했고, 비록 천한 노비나 노복이라 하더라도 한마디 좋은 말을 하면 반듯이말과 안색을 바로잡고 말하기를 "네가 나를 가르쳤다." 하였으며, 도둑을 잡았을 때에는 반듯이 "어찌하여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하며 그가 훔친 물건을 도로 내주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듣게 되면 반듯이 말하기를, "내가 과연 그런 잘못이 있었다." 하였다. 어떤 일 때문에 화를 내는 자가 있으면, 공은 웃으며 그와 다투지 않고 말하기를 "자네가 과연 옳다." 하였으니 화를 낸 사람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함께 웃고 헤어졌다.

 

일찍이 시골의 창고에 저장한 곡식을 혼수(婚需)에 쓰기 위해 배로 운반하는 일이 있었는데,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혔다. 사람들이 뱃사공에게 책임을 묻고 벌을 주라고 권하자 공은 말하기를, "배가 뒤집힌 것은 운수가 사나워서였는데 죽을 뻔하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람을 어찌 차마 벌한단 말인가." 하고 끝내 그 일을 묻지 않았다.

 

임천(林川)의 옛집에 조상이 남겨 놓은 재산이 매우 많았는데, 공이 귀하게 되면서 부터 그 저축된 것이 점점 줄어 들었다. 자손 중에 이미 시집간 자는 모두 공에게 신세를 졌다. 혹 군핍(窘乏) 해진 때도 있었으나 공은 재산의 유무를 묻지 않았다.

 

평소 길을 다닐 때, 감히 연로(輦路)로 다니지 않았다. 비록 깊숙한 방에 들어앉아 있더라도 일월을 향해 선뜻 몸을 돌리지 않았다. 만약 친척이 빈궁한 것을 보게 되면 반듯이 저축해 둔 것에서 덜어내 도와 주었다. 혼사(婚事)나 상사(喪事)에 반듯이 그 주관자가 되었으며, 군색한 사람을 도와 주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로 있을 때, 인물을 심사하여 적재 적소에 배치하는 것을 신중히 하여, 단망(單望),으로 의망(擬望) 하는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이로써 후임자가 독단적으로 인물을 전형하는 폐단을 막았다.

 

공이 어떤사람의 장점을 듣고 천거하였는데, 그 사람이 공이 천거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찾아와 사례하면 반듯이 말하기를, "작록(爵祿)은 마땅히 군주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사사로운 개인의 집에서 베풀어 지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재상이 되어서는 편안하고 느긋하게 업무를 보았으며, 대신(大臣)의 체모(體貌)를 보존하는 데, 힘을 썼다. 깐깐한 것을 현명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공적(功積)과 능력을 자랑하는 것을 현명하다고 여기는 풍조를 기뻐하지 않았다.

 

공이 임금께 건의를 올린 적이 없다고 공을기롱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은 마치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 하였으며, 또 그 까닭을 밝히려고도 하지 않았다. 옛 사람은 다만 공(功)이 있는 것이 공(功)이 되는 것만 알고, 공(功)이 없는 것이 공(功)이 되는 것은 알지 못했다는 말을 깊이 음미 하였으니, 아마도 공(公)이 자처한 것이 여기에 있을듯하다.

 

의론(議論)을 임금에게 올려 만약 채용 되기라도 하면, 공은 위축된 듯이 하며, 오랫동안 편안히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들어면 반듯이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아첨하려 하는가?" 하였다.

 

스스로 입고 먹는 것에는 몹시 검소하여 아침 저녁으로 먹는 반찬이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것 보다 그릇 수가 많으면 문득 반찬 그릇을 밥상 아래에 내려 놓으며, 말하기를, " 옛 사람은 밥을 먹음에 맛을 중시하지 않았다. 하물며 나같은 사람의 경우이겠는가?" 하였다.

 

조복(朝服) 말고는 비단을 쓰지 않았으며, "남보다 옷이 좋은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하였다. 조정에서 강북(江北)에 경흥보(慶興堡)를 설치하였는데, 공은 불가하다는 의견을 고수하였다. 뒤에 그것 때문에 굴욕을 받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공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집안 사람이 일찍이 10년 전에 남종을 산 적이 있었다. 그 후에 이 남종이 팔려오기 1년 전에 낳은 딸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공이 그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하니 그 주인이 감복하여 싼값에 그 딸을 팔려고 하니 공이 두배 되는 값의 말(馬)로 돌려주었다. 남의 마음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은 류였다.

 

만년에 송현(松峴)에 복거(卜居)하여 자호(自號)를 송현옹(松峴翁)이라 하였다.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나가면서 현로(峴路)를 경유해 지나갔는데, 공은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중문(中門) 바깥에서 엎드려 있다가 수레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집안 사람이 왜 외문(外門) 밖에서 엎드리지 않았느냐고 묻자 공은 말하기를,"외문을 나가면 다른 사람이 반듯이 보게 된다. 나는 이름을 팔고자 하지 않는다." 하였다.

 

공이 일찍이 조정에 있을 때, 주렴 밖에서 일을 아뢰었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공에게 말하기를, " 선왕께서는 일찍이 경(卿)을 크게 쓰일 만한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심지어 경의 이름을 병풍에 써 두기 까지 하였다." 하니 공이 응대하여 말하기를, " 선왕께서는 특히 신에게 재상직을 10여년 동안 맡기셨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혹 신이 다른 방법으로 그리된 것인가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니 왕후가 이르기를 , "이는 선왕께서 특히 공을 깊이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공은 마음가짐이 겸허하여 재상 직에 오랫동안 있으려 하지 않았다. 신해년(1551, 명종 6) 부터 갑자년(1564, 명종 19)까지 전후 14년간 질병을 이유로 사직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궐에 나아가 체직시켜 줄 것을 청원하기도 하고, 김시습(金時習)이 정창손(鄭昌孫)을 조롱한 말을 인용하기도 하며, 한 해도 사직(辭職)하려 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

 

항상 혼자 웃음을 웃으며 자제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 늙은 재상의 업무가 진실로 가소롭다. 의정(議政) 10년 동안 오직 물러나기를 구한 일뿐이었다.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내가 칭찬받을 만한 것은 없으나 다만 해를 끼치지 않고 능력 있는 자를 꺼리지 않은것, 이 두 가지가 약간 나은 점이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시호(諡號)가 내릴 것이니 너희들은 내 행적을 기술할 때, ‘공은 만년에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였으며, 술이 약간 취하면 선뜻 감군은(感君恩)한곡을 연주하여 스스로 즐겼다.’ 라고 쓰면 족하다 하였다.

 

병이 들자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정해진 힘이 없으니 젊고 장성하여서는 혹 볼 만한 것이 있다가 늙고 죽기 마련이다." 하였다.처자(妻子)를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부녀자들이 시신 옆에서 호곡(號哭)하는 것은 군자(君子)가 죽음을 제대로 맞는 도리가 아니니 그런 일이 없도록 유언을 남겼다.

 

임종에 이르러 너거러운 말로 일가(一家)를 진정시킨 까닭에 병시중을 들던 자가 실로 공이 위독한 것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공(公)의 배위(配位)는 종실(宗室) 개산수(介山守) 효지(孝智)의 따님으로 매우 현명하였으며, 자제를 의방(義方)으로 가르쳐 의롭지 않은 것으로 공의 명절(名節)을 손상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정의 가르침이 숙연하였으며, 문족(文族)이 그것을 취하여 법도로 삼았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둘은 요절하고 하나가 있는데 붕남(鵬南)으로 선교량(宣敎郞-從六品)이다. 절도사 이순형(李順亨)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붕남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아들은 시손(蓍孫)인데, 사지(司紙-從六品)이다. 장녀(長女)는 현감 정인수(鄭麟壽)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正九品) 이제신(李濟臣)에게 시집갔다.

 

시손(蓍孫)은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자의(子儀)이고 딸은 어리다. 현감은 4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사만(思敏), 사경(思敬), 사신(思愼)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장녀는 주부(主簿) 심신겸(沈信謙)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어리다.

 

검열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기준(耆俊), 수준(壽俊), 이며, 딸은 어리다. 사민은 응교 최옹(崔顒)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주부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부인은 공보다 20년 먼저 세상을 떴다. 훈련도정(訓鍊都正) 김윤종(金胤宗)의 따님을 측실로 맞아 가사를 주관하게 했다.

 

측실에게서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이 존성(存省)이며, 관상감 직장(觀象監直長)이다.

군수 김빈(金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장사(葬事)를 마친 후에 사지(司紙)가 공의 행적을 서술하여 묘도(墓道)에 새길 글을 부탁해 왔다.

 

아! 섬(暹)이 글재주가 없으니 어찌 성대한 덕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다만 공이 옥당에 계실 때, 내가 일찍이 아랫 사람으로 모셨고, 태부(台府)에 들어가셨을 때는 또 부사(副使)의 직에 있었으므로 공의 허여(許與)를 받았으며, 풍도를 우러른지 오래이다.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넓고 후하게 북돋워서

공이 품부받은 것이 풍성하도다.

 

바라보매 아득히 넓으니

공의 국량이 넓도다.

 

거스르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니

장자의 풍도가 있도다.

 

온화하여 파당을 좋게 보지 아니하고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속은 강했도다.

 

갖춘 것은 이 여석 가지

재상의 자리에 올라

 

어둑하게 문채를 드러내지 않았으나

날로 그 충심이 뚜렸하도다.

 

권세는 자기를 더럽히는 듯이 여기고

허물은 자신에게 돌려

 

약을 다스림에 성과가 있었고

사람들은 포용되었도다.

 

다스리지 않고도 다스리고

공이 없으면서도 공을 세웠도다.

 

정성스레 사직을 청했으니

위태롭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도다.

 

공은 말하길 근원을 체득하면

어찌 어리석고 어수선함이 있겠습니까?

 

왕은 말하길 아니로다.

짐을 안정시킨 건 신의 공이로다.

 

관직에서 놓여나지 못하자

자못 하사함이 많았도다.

 

만년에 이르러서

임금이 승하하시매

나라 걱정으로 근심하자

온갖 병이 침범하여

별이 떨어지고 말았도다.

 

조정은 조회를 거두어 텅 빈듯 하였으니

미덥도다 덕인이여

좋은 명성에 좋은 임종이로다.

 

관악의 남쪽에

집처럼 모셨도다.

 

반듯한 돌에다가

훈공을 기록하니

여기 와서 비석을 어루만지는 사람이여

이 맑은 충심을 본받으시게나.

 

가정(嘉靖) 45년 병인년(1566, 명종 21) 2월 일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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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忍齋集卷之二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贈諡成安尙公神道碑銘。 幷序

 

國朝宰相以功名終其身者。世不乏人。而歷事累朝。身無災眚。秉德壽耇。歿世紆恩眷者。惟成安公一人而已。公諱震。字起夫。其先木川人。有諱國珍。當高麗初。受姓以象。後改爲尙。其子得 儒從 崔文憲公學。始免鄕役。生給事中愿。其後有諱英孚。以護軍終。護軍生虞候孝忠。虞候生察訪諱甫。寔娶延安望族金濤之後博土徽之女。禱於聖住山。弘治癸丑六月五日。生公。護軍公居林川。家饒於財。嘗焚債卷曰。吾之後必昌。種德積慶。以至于公。公生而狀貌奇異。五歲而喪母夫人。八歲而喪察訪公。鞠于伯姊夏山君成夢井夫人。渾厚重遲。已若成人。雖遭疾苦。不形辭色。察訪公以公尙幼。囑老奴經紀公家事。其奴死。與之粟百斛使葬之。人已知其偉量也。年踰志學。不事儒業。見辱儕輩。遂憤勵學問。夏山公欲試公意。勸之仕。公曰。所以讀書。欲樹大業耳。夏山奇其志。李容齋,金慕齋諸公。見公所著述。無不嘉賞。公與成守琛,守琮兄弟。遊從講磨。所學日進。中丙子生員。入上舍。大司成柳公雲。尙氣槩好士。訪公于家曰。見公議論。知有經諭之才。捷己卯別試。始入承文院爲副正字。以史才見薦。授藝文館撿편01閱。入侍經幄。適有時宰言頗切直。在坐不敢有繼之者。公獨指爲讜議。爲論者所忌。遞授西職。己卯年間。有迎合時議者。欲置士類于重典。公聞而疾其人。屢語所親。語頗泄。仍被彈擊。久滯郞署。癸未。以禮曹佐郞。出爲北道評事。以公有文武才。籍此擠之於外也。以禮曹正郞。從吾先君文僖公如京師。賀聖節。仁廟在東宮。銳意學問。中廟爲置僚屬。妙簡一時。擧公爲弼善。久於勸講。開益弘多。己丑。爲司憲府掌令。復入講院爲文學。司諫院獻納,弘文館校理,司憲府執義,弘文應敎,典翰。癸巳。特授通政。拜司諫院大司諫。遷弘文館副提學。出爲江原道觀察使。有一老嫗訴以義子欲蒸己。公疑其詐。問詰備至。嫗服曰。彼果不順。吾欲搆以重罪。人服公辨誣之明。乙未。被召爲同副承旨。轉至左副。丁酉。復拜大司諫。下僚有希執政旨者。因禧陵水石之說。欲陷故相鄭公光弼于死地。公草疏力救。時論韙之。冬。特授刑曹參判。平恕爲心。獄無冤枉。戊戌。觀察京畿。己亥。擢公爲刑曹判書。言者論其驟陞。遞拜樞府。是年秋。拜司憲府大司憲。冬。特除公爲平安道觀察使。辛丑。上欲召公爲判漢城尹。從諫官言。不果。冬。還朝同知樞府。壬寅春。申前命。拜漢城判尹兼都摠管。夏。判工曹。未幾。特命判兵曹。甲辰。超授崇政議政府右贊成。言者沮之。上不得已從之曰。終當以大任付此人。其忠信外著。爲人主所倚重。於此可見。還知敦寧。兼知義禁府事。移判刑曹。乙巳。出按慶尙道。丙午。遞爲右參贊。錄衛社原從功。陞正憲階。兼知春秋館。參修二聖實錄。秋。復判兵曹。戊申秋。特陞崇政。拜右贊成。己酉春。判吏曹。兼判義禁府。秋。進階大匡。拜議政府右議政。追贈皇考議政府領議政。祖考議政府左贊成。曾祖考吏曹判書。蓋以公貴推恩也。時文定王后垂簾同聽斷。欲復禪敎兩宗。語公曰。僧徒無統。欲設兩宗。令有統攝。啓曰。復於久廢之餘。豈不重難。公意以爲微辭婉諷。庶幾回上意。其實不知終至滋蔓也。其不知公者。疑公迎合。公聞之曰。儒釋是非。皎如黑白。吾豈至於逢君者。蓋由平生所爲不能見信於人。致有此疑。但當自反而已。辛亥。陞左議政。丁巳。冊封東宮。以公爲世子傅。戊午夏。陞領議政。兼世子師。己未春。公以夷虜反側。百姓不親。庶官不職。皆由置相非人。引咎自當。請避相位。上慰諭不許。秋。上御翠露亭。引見宰樞。親執杯侑酒。公感恩。至醉伏輦路傍不能起。上命遮以行帳而過之。使內侍扶公而出。其見敬禮如此。庚申。加東宮元服。賞以公鞍馬。辛酉秋。將拜掃林川先壟。上命公之孫副率蓍孫。隨公護其行。遣中使齎豹皮以賜。又輟進御蓑衣以贈。蓋近世勳舊所未曾有。上因公上謝箋。批答之曰。此予所以敬大臣優老德之意也。壬戌。公年七十。據禮致仕。溫諭不許。仍賜几杖。宴日。四殿皆致酒肉。公上箋謝。御筆批答曰。人生七十古來稀。予貴老德居相一紀世不多。豈退老成。癸亥正月。求退益懇。上重違公意。始允其請。授領中樞府事。猶兼領經筵。國有大事。必以咨之。未幾。東宮不幸。公奔赴哭位。連日廢食。卒患心痛。病幾危。又欲祖送靈輀于郊外。或以疾未平止之。公曰。吾是東宮舊僚。送終之際。禮不可廢。自是。心痛胃疾。彌留數月。上聞公病。醫問交道。至分御廚珍味。凡所以慰安公者。無不備至。而天竟不憖。易簀于甲子閏二月二十三日。享年七十有二。上聞訃。輟朝市却肉膳以哀之。故事。大臣臨終。例遣承旨。問所欲言。時政院不以病急上聞。不及遣承旨。上用是悼恨尤甚。賻贈之典。於數爲優。卜得五月十九日。葬于果川東霜草里坤坐艮向之原。與夫人同兆異域。公資稟忠厚。風采疑重。色愉而氣和。量弘而慮遠。處衆而不肯崖異。物犯而不與之校。擧止舒緩。雖當倉卒。未嘗疾言遽色。觀其貌似遲鈍。而內實剛勇。不露圭角。又多爲德量所掩。鄭文翼公光弼,尹靖成公殷輔及我先君文僖公。皆以公輔期之。謹於奉先。身有疾病。不得與祭。則雖在其家。當祀之時。必冠服而坐。時過乃罷。每以不及事爺孃爲痛。如遇生日。不許子孫上壽曰。吾生而不知父母之面。又不知呼父母。實天地間一罪人也。其行 已不 屑屑於規矩繩墨。而常欲矯揉氣質。涵養德性。書窓壁自警曰。輕當矯之以重。急當矯之以緩。褊當矯之以寬。躁當矯之以靜。暴當矯之以和。麤當矯之以細。好讀自警編。尤致意於度量韜晦等篇。誦曾點舍瑟之對。檃括於燕居之中。有非徒事記問者所能及也。坦懷待人。不置町畦。聞人過失。必先思可恕之道。雖婢僕之賤。有一善言。必假以辭色曰。汝敎我矣。如得偸盜者。必還給其贓曰。何不告我。如聞己過。必曰。吾果有此。有因事慍見者。公笑不與校曰。汝果是也。慍者不覺俱笑而去。嘗舟運鄕莊儲穀。以資婚需。遭風舟覆。俄聞拯出。或勸公責徵篙師。公曰。船敗有數。何忍重困幾死僅生之人。竟不問。林川舊居。先業甚厚。自公之貴。其儲漸縮。子孫已嫁者。皆仰食於公。或至窘乏。而公不問其有無。平生行途。不敢當輦路。雖居奧室。不向日月便旋。如見親戚貧窮。必傾儲以賑之。婚喪必爲之主。以周其窘。其判吏曹。愼於銓注。不肯單擬。以防後來專擅之弊。人有被公吹噓者。聞而來謝。則必曰。爵祿當出於人主。非私門所宜市。及其爲相。休休然務存大臣之體。不察察爲明。不肯衒功能。其論人才。必以持重。不喜施爲變舊章者爲賢。或譏公不建白。公若爲不知者。又不肯明其然。深味古人徒知有功之爲功。不知無功之爲功之語。蓋公之所以自期者在此也。有時獻議于上。如見採用。則公蹙然不寧者久之。聞人譽己。必曰。汝欲諛我耶。自奉甚儉。朝夕所供。不過數器。過此則輒下一器于案下曰。古人食不重味。況如我者乎。朝服之外。不用綾段曰。服美于人。可恥之甚。朝廷設慶興堡于江北。公執以爲不可。後見挫辱。人皆服公先見。家人嘗於十年前。買人男口。其後携被買前一歲所生女子以來。公命還其主。其主感之。欲輕價以賣。公竟倍價償馬。其推心不忍欺。皆此類也。晩年。卜居松峴。自號松峴翁。或値鑾輿西出。由峴路以過。則公整衣冠。伏於中門外。候輦過而入。家人問何不伏於外門之外。公曰。出外門則必爲人見。吾不欲沽名也。公嘗奏事簾前。文定王后語公曰。先王嘗稱卿可大用。至以卿名識諸屛障。公對曰。先王特除臣官職凡十餘。 人或 疑臣緣他道以進。后曰。此特卿知遇於先王者深耳。公秉心謙虛。不欲久於相職。自辛亥至甲子。首尾十四年。或引疾封章。或詣闕乞免。至引金時習嘲鄭昌孫之語。無歲不辭。常自笑而語子弟曰。此老相業眞可笑。議政十年。唯求退一事而已。居位吾無可稱者。但於不忮害。不忌克二者。差有所長。吾死必有諡。汝等述 吾行 迹。當曰。公晩好鼓琴。酒微醺。輒彈感君恩一曲以自娛足矣。旣病。語家人曰。人之無定力者。少壯或有可觀。老且死。鮮不錯謬。對妻子。屬以後事。 使無 知婦人。誦遺言號哭屍傍。非君子一死生之道也。至於屬纊。作寬辭鎭一家。故侍疾者實未覺其危篤。公娶宗室介山守孝智之女。賢明過人。訓子弟以義方。不欲以非義浼公名節。故家政肅然。爲門族所取則。生三男。其二夭。一曰鵬南。宣敎郞。娶節度使李順享之女。生一男二女。鵬南先公而歿。男曰蓍孫。司紙。女長適 縣監 鄭麟壽。次適藝文檢閱李濟臣。蓍孫娶左議政沈通源之女。生一男一女。男曰子儀。女幼。縣監生四男二女。男思敏,思敬,思愼。餘幼。女長適主簿沈信謙。次幼。檢閱生二男一女。男曰耆俊,壽俊。女幼。思敏娶應敎崔顒之女。主簿生一男一女。皆幼。夫人先公二十年而逝。以訓鍊都正金胤宗女爲側室。主家事。又有側室生一男。曰存省。觀象監直長。娶郡守金鑌之女。生二女。皆幼。葬旣完。司紙述公行迹。囑以墓道之刻曰。孤方易石而俟之。嗚呼。暹之不文。何足以形容盛德。但以公之在玉署。嘗備下僚。其入台府。又忝貳公。蒙許與而仰風裁者久。敢辭銘。銘曰。

 

培之廣厚。公稟之豐。望之茫洋。公量之洪。不忮不克。有長者風。和不肯黨。柔外剛中。具是六者。矧伊遭逢。闇然尙褧。日彰厥衷。權如浼己。過歸諸躬。事惡有迹。物被包容。不爲而爲。無功而功。款款乞骸。莫非危悰。公曰體元。何有愚惷。王曰咈哉。鎭我臣工。旣不見釋。殊錫疊重。適丁遲暮。震宮告凶。憂以國憂。百疾之攻。星墮台躔。朝著若空。信矣德人。令聞令終。冠岳之陽。若堂有封。用豎貞珉。載烈勳庸。有來摩挲。式此淸忠。

[편-01]撿 : 檢

 

 

↑성안상진공신도비(成安尙震公神道碑)

 

[문화재 종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0호

[지정연월일] 1984년 11월 3일

[시 대] 조선 명종 21년(1566)

[크기] 전체 높이 362㎝, 비신 높이 220㎝, 너비 106㎝, 두께 36㎝

[재료] 비신 대리석, 대좌·개석 화강암
[소유자] 학교법인 상문고등학교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산1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