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석곡 이규준(李圭晙,1855~ 1923)

야촌(1) 2017. 10. 28. 09:41

↑36世 석곡 이규준 선생 영정

  경주이씨 익재공 후 판윤공파

 

 

 

↑이규준선생 간찰/크기 : 40 × 24cm

 

■ 석곡 이규준(石谷 李圭晙),

    [생졸년] : 1855년(철종 6)~1923년 /향년 68세

 

자는 숙현(叔玄), 호는 석곡(石谷). 본관은 경주(慶州)로 고려 말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선생의 후손으로 고조(高祖)는 이름이 규손(圭遜)이고 수직(壽職) 으로 가선(嘉善)의 품계를 받았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복원(福元)이니 또한 가선(嘉善)의 품계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이름이 진욱(進旭)이시고, 아버지는 억영(億榮),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공(公)은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동해면 임곡리(林谷里)에서 출생하여 이웃의 석리(石里)에 옮겨 살았다. 묘소는 포항시 장기면 죽정리 화주산에 있다. 또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공부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능통하였다유학의 원의를 천명한 대유학자(大儒學者)이고의학의 원의를 밝힌 대유의(大儒醫)이며 교육가였다.

 

삼십대에 송유(宋儒)들의 경서 소주(疏注)를 그대로 지키려 하지 않고, 주로 한당고유(漢唐古儒)들의 주석을 존중하여《모시(毛詩)》,《상서(尙書)》,《주역(周易)》,《춘추(春秋)》,《주례(周禮)》,《의례(儀禮)》를 산정(刪正)하여 《육경소주(六經疏注)》(26책)를 편술하였다.

 

《논어(論語)》(3책),《대학(大學)》(1편),《중용(中庸)》(1편),《예운(禮運)》(1책),《곡례(曲禮)》(1책), 《효경(孝經)》(1책),《당송고시(唐宋古詩)》(1편),《소학계선(小學稽善)》(1편),《명심보감(明心寶鑑)》(1편)을 산정하고,《도덕경제(道德經題)》(1책),《전례(典禮)》(1책),《후천자(後千字)》(1책), 《경수(經髓)》(3편 1책)를 지었다.

 

특히 《석곡심서(石谷心書)》는 송유들의 이기론(理氣論)적인 철학체계를 탈피한 그의 기일원론(氣一元論), 심성정동일론(心性情同一論) 철학을 보여주며, 그의 심양기론(心陽氣論-補扶陽論) 의학을 뒷받침한다.

 

전국에서 석동서당(石谷書堂)에 찾아온 천여 명의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대구의 근세서화가로, 대한제국시기에 군수 관직을 지내기도 한 팔능거사(八能居士: 시,글씨,그림,문장,거문고,바둑,장기,의학),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5)는 7세연상의 석곡에게 치료받고 석곡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석곡에게 경학과 의학을 지도받았으며, 석곡의 저서를 펴내는 데 힘썼다.

 

석곡은 후년에 의학연구에 전념하였다. 송의(宋醫)들의 전통을 이어온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원대의 유의(儒醫)인 주단계(朱丹溪, 1281~1358)가 주창한 “양(陽)은 항상 남음이 있으나, 음(陰)은 항상 부족하다(陽常有餘 陰常不足).”는 설에 반하여 “양은 항상 부족한 것을 걱정하고, 음은 항상 남음을 걱정한다(陽常患不足 陰常患有餘).”라고 하여 주단계가 주장하는 ‘자음강화(滋陰降火)’의 법을 배척하고, 양을 도와야 된다는 ‘부양론(扶陽論)’을 제창하여 영남 보부양파(補扶陽派)의 대맥을 이루었다.

 

유아로부터 노년에게까지 양을 돕는 온열재(溫熱材)에 속한 인삼(人蔘)·부자(附子) 등을 애용하여 왔으므로 ‘이부자(李附子)’라는 별명까지 얻기도 하였다.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원의를 천명한 《황제소문절요(黃帝素問節要)》(2책),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자신의 의학이론으로 재정리한 근세의학의 명저인 《의감중마(醫鑑重磨)》(3책), 약학인 《본초(本草)》(상·하 2책)를 발표하였다.

 

대구의 석재 서병오 집에 머물며 석곡의 의학을 전수 받은 무위당(無爲堂) 이원세(李元世, 1905~ 2001)의 제자들이 오늘날 소문학회(素問學會)를 구성하여 석곡의 의학을 계승연구하고 있다.

 

명, 청대 중국에 와있던 예수회소속 신부들이 편술한 서양천문학역법의 한역서(漢譯書)를 읽고 서양의 천문학역법(曆法)을 정밀히 논한 《포상기문(浦上奇聞)》(1책), 전통수학(數學)을 논한《구장요결(九章要訣)》(1책)을 발표하였다. 그밖에도《신교술세문(新敎術世文)》(1책),《석곡산고(石谷散稿)》(2책) 등을 세상에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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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곡 서당기

 

석곡 이규준 (石谷 李圭晙) 지음/ 김희준 옮김

 

기해년(1899, 광무3, 석곡선생 45세) 여름 음력 4월에 석동서당이 이루어졌다. 가을이 무르익자 고을의 벗들이 점점 모여들어 술자리가 벌어졌다.

 

손님이 있어서 주인에게 읍을 하고 말해 가로되, 지금 그대가 바다와 산의 천석(泉石: 자연) 속에 집을 지은 것은 또한 산수의 즐거움을 취한 것인가? 주인이 말했다. 아니다. 구태여 그렇다면 그런 것일 뿐이다.

 

손님이 말했다. 아깝다! 산수는 괜찮으나 집은 누추하다. 무엇인가 하면, 금오산(金鰲山)이 바다를 업고 있고, 서쪽으로 돌아보면 무령(霧嶺)이 높이 뻗어와 주산을 이룬다. 나는 수리가 하늘을 찌른다. 북쪽 너머는 운제산(雲梯山)이 높이 솟아 있으니 어찌 조산(朝山: 안산案山 너머의 주작(朱雀)이 되겠는가?

 

멀리는 눈썹처럼 가까이는 쪽진 머리처럼 둥글게 수 백리를 산이 얽혀 공읍(拱揖: 손을 맞잡고 허리와 머리를 숙이며 서서 하는 인사)을 한다. 무 령 서남쪽에 두 산기슭이 있어서 비탈지게 뻗어 나와 좌우 날개처럼 둘러싼다.

 

계곡물이 금오산 서쪽에서 출발하여 왼쪽 산기슭 밖으로 빠져 나가 서당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바다굽이로 모여 든다. 금오산에서 북서쪽으로 8-10리를 흘러 산 오른쪽 기슭의 밖에서 합쳐져 하천을 이룬다. 콸콸 솟는 샘물이 있어서 섬돌을 돌아 졸졸 소리를 내며 집을 지나 백여 보를 흘러서 비로소 계곡물과 합하고 바다굽이를 돌아 하천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또 긴 강과 가는 냇물이 있어서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삼키고 들이마시어 수구(水口)를 이루며 한 공간을 맺는 즉, 이곳은 산과 물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이에 한 무(畝, 대체로 30평)의 공간에 띠 집이 있어서 그 사이에 잘 보이지도 않게 깃들어 있다. 마치 쇠뿔을 지고 메추리 머리를 향하고 있는 듯하다. 창은 매흙질하고 문은 대나무로 엮었다.

 

섬돌은 회칠을 하고 방바닥은 돛 자리를 깔았다. 마루는 다리를 펴기에도 부족하고 뜰은 말 돌리기에도 좁다. 이러니 집이 누추한 것이 아닌가?   주인이 대답해 말했다. 누추하면 누추한 것이다. 하지만 또한 옛 사람의 법도에 합당한 것도 있다. 마루를 앞에 두고 방이 뒤에 있어서 어린이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할 수가 있다.

 

동쪽에 방이 있고 서쪽에 창이 있으니 손님과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있다. 학동들이 스승을 모실 수 있으니 시서(詩書)를 배울 수 있고, 손님과 술잔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예악(禮樂)을 익힐 수 있다. 시서를 배우고 예악을 익히니 이것이 내가 집을 지은 까닭이다.

 

예부터 명문우족(名門右族: 이름난 가문 족벌)치고 검소함에서 이루어고, 사치함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은 일이 없다. 검소함은 오직 복의 뿌리가 되고, 사치함은 오직 화를 부르는 촉매제이다. 나는 알맞게 행하고 허물이 없도록 할 수 없으므로 차라리 지나치게 검소함으로써 궁색해지는 처지를 그치게 한다.

 

 나는 덕으로써 자손에게 물려줄 것이 없으므로 차라리 누추함으로써 뿌리를 튼튼하게 한다. 이러한 이치를 써서 스스로 즐거운 것이 또한 가능하지 않겠는가? 산수의 즐거움 같은 것을 말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

 

어진사람이 지나가는 곳은 풀과 나무도 빛을 띠지만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뛰어난 명승지도 언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역경》(天澤履 九二)에 말했다.

 

“걷는 길이 탄탄하니 유인(幽人: 은사隱士)은 길하리라."

유인이 곧지 않으면 어찌 길함을 얻겠는가.

 

손님이 이에 할 말을 잃고 자신의 말을 거두었다. 이에 서로 읍양(揖讓)하고 차례대로 승당(升堂: 마루에 오름)하여 술잔을 주고받으며 사귀니 예의가 법도에 맞았다. 시령(詩令: 여러 사람이 시를 짓기 전에 먼저 조건을 정하고 어기면 벌을 받는 약속)을 내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다하고 사율(四律: 7언8구) 시를 모두 이루었다.

 

주인이 이에 글을 써서 이런 일을 적는다. 중양절 다음 날

출처 : 《석곡산고(石谷散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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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서재 원운 / 石洞書齋原韻

 

금서를 공부한 지 사십년에 이름을 이루지 못하여, / 琴書四十未成名

늦은 나이에 산기슭을 깎아 몇 무의 평지를 얻었다. / 晩山崖數畝平

 

솔 아래 바위에 지은 띠 집의 들보가 차고, / 松下架巖茅棟冷

샘이 솟고 창문을 낸 집의 토담이 맑다. / 泉源鑿土床淸

 

청춘의 굽은 계산은 천고의 학문을 연마하였고, / 靑春枉算摩千古

공실의 빈 걱정은 뭇 생명을 돕는다. / 恭室空憂庇衆生

 

내가 안은 나머지 책들은 이제 곳을 얻었으니, / 抱我殘編爰得所

팔 베게하고 누워 휘파람 길게 불며 그윽한 뜻을 써낸다./ 曲肱長嘯寫幽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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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谷書堂記(先生四十五歲)

 

己亥之夏四月 石洞書堂成 秋熟 鄕黨士友 稍會飮落 有客 揖主人而言曰 今子築室于海山泉石之間 亦有取於山水之樂乎 主人曰 否 苟合而已矣 客曰 惜哉 山水可矣 而屋已陋矣 何者 金鰲負海 西顧爲霧嶺 引爲主山 飛戾天 北越爲雲梯 嵯峨焉爲朝對 環數百里 遠黛近 綢繆而拱揖 霧嶺西南 有兩麓陂 陀引出爲左右翼衛 磵水發金鰲西 瀉出于左麓之外 過堂而右集海灣 自金鰲 北西八十里 成匯于右麓之外 有泉 循除鳴過屋百餘武 始與磵合 灣環而入于匯 又有長江細流 不擇遠近 呑吸爲水口 結局則山水 可謂得矣 乃有一畝茅屋 然寄于其間 負牛角 向首 竹扉 堊階草席 堂不足以伸脚 庭不足以回馬 屋不已陋乎 主人曰 陋則陋矣 亦有合于古者 面堂後室 童子可以衣 東房西 賓客可以受酬 童子衣 則詩書可學 賓客受酬 則禮樂可習 學詩書習禮樂 此吾堂之所以作耳 且自古 名門右族 莫不由儉而成 由奢而敗 儉惟福根 奢惟禍媒 吾不能中行而無 寧過儉以止嗇 吾無德以遺子孫 寧已陋以固根 用是自樂 不亦可乎 至若山水之樂 必待其人 賢人所過 草木精彩 其人不存 名區丘墟 易曰 履道坦坦 幽人貞吉 非幽人貞 焉得而吉乎 客乃憮然而謝之 於是 揖讓序升 盃酌交行 禮儀卒度 詩令申明 一座盡歡 四律俱成 主人乃書以記之 維重陽節越翌日

   

출전 : 《石谷散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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