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은 때로 모순처럼 보인다. 그 중 하나가 천명(天命)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오제(五帝) 본기에는 요(堯) 임금이 나이가 들자 순(舜)에게 정치를 대신하게 하고, 이것이 '천명(天命)'에 부합하는지를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임금은 선왕(先王)의 총애가 아니라 천명(天命)이 있어야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군주는 하늘이 낸다는 천명(天命) 사상이 생겼다.
그러나 최충헌의 사노(私奴) 만적(萬積)은 노비들에게 "장수와 재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느냐(將相 寧有種乎)?"라고 선동했다. '고려사' 최충헌 열전에 나오지만 원래 출처는 사마천의 '사기'이다. '사기' 진섭 세가(陳涉世家)에는 고용 머슴에 불과했던 진승(陳勝:진섭)이 농민들에게 봉기를 부추기며,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느냐(王侯將相寧有種乎)"라고 한 말이 나온다.
천명(天命)과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느냐'는 말 사이의 간격은 크다. 사마천이 이런 말을 한 진승(陳勝)의 사적을 국왕·제후들의 사적인 세가(世家)에 기록해 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서 공자는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꾀하지 말라(不在其位 不謀其政)"고 했다. 그러나 공자의 도통(道統)을 이은 맹자는 왕조를 갈아치우는 역성혁명을 정당화했다. 이 거대한 간극을 메우는 열쇠가 바로 민심이다. '순자(荀子)' 왕제(王制)편에는 "임금은 배이고, 백성(庶人)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어버리기도 한다(水則載舟 水則覆舟)"라는 말이 나온다.
순자는 애공(哀公)편에서 "임금이 이로써 위태로움을 미리 생각한다면 앞으로는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정조의 어록인 '일득록(日得錄)'에는 "임금이 백성이 아니면 누구와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그래서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라는 정조의 말이 나온다.
전통시대에도 이랬는데 지금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총선 민의를 하늘로 삼지 못하는 정파(政派)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기타 > 칼 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근혜 말의 힘. (0) | 2009.04.16 |
---|---|
경제가 어렵다는데... (0) | 2008.10.16 |
[스크랩] [이덕일 사랑] 겨울 매미 (0) | 2008.09.21 |
왕 과 공(王 과 公) (0) | 2008.07.01 |
박재목 시인의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진에께 고하는 글. (0) | 2008.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