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먼저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을 초빙했던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맹자주소(孟子注疏)' 만장(萬章)에 따르면 탕왕은 유신(有莘)이란 곳의 농부였는데, 노예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탕왕이 세 차례나 사신과 후한 폐백을 보내 초빙하자 출사한 이윤은 하(夏)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는 "이윤이 다섯 번이나 거절한 뒤에야 탕의 신하가 되었다"라고 전한다. 오고초려(五顧草廬)인 셈이다.
강태공(姜太公)은 낚시꾼의 이칭(異稱)이지만 단순한 낚시꾼이 아니었다. '사기(史記)' 제태공 세가(齊太公世家)는 주(周) 문왕(文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던 강태공 여상(呂尙)을 만나 크게 기뻐하며 중용했다고 전한다.
문왕은 강태공을 "스승(師)으로 모시고, 받들어(尙) 모시고, 아버지(父)로 모셔서 사상부(師尙父)라고 불렀다"라고 할 정도였는데, 그는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했다. '사기(史記)'는 "후세에 용병술과 주나라의 권모를 말하는 자들은 모두 그를 주모자로 존숭했다"라고 평하고 있다.
국정의 성공과 실패의 요체는 인재 등용에 있다. '후한서(後漢書)' 두밀(杜密) 열전에 따르면 고향 태수(太守) 왕욱(王昱)이 유승(劉勝)을 칭찬하자 두밀은 "유승은 대부(大夫)가 되었을 때 빈객(賓客)을 맞으면서, 빈객이 선(善)한 것을 알면서도 천거하지 않고, 악(惡)한 사실을 듣고서도 말하지 않았으니 실정을 숨기고 자신만을 아낀 것(隱情惜己)으로 마치 겨울 매미(寒蟬)와 같은 자였다"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인재를 천거하지 않는 자를 겨울 매미, 즉 한선(寒蟬)으로 부른다. 경제정책 실정의 책임자는 유임시키고, 새로 장관이 된 인물은 표절문제로 시끄러운 이번 인사에 대한 세간의 비판이 거세다.
인재를 보는 인사권자의 눈이 부족한 것인지 주위에 겨울 매미들만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 정국의 중대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사 정책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글쓴이 : 외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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