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이 돈 걷고 문체부 초고속허가…‘미르’ ‘K스포츠’ 판박이
[한겨레] 등록 :2016-09-20 05:00수정 :2016-09-20 16:21
미르· K스포츠 재단 커지는 의혹
두 법인 총회 회의록 베낀 듯 유사
그나마 회의 없이 기록한 가짜 판명
기업들은 재단 성격 모른채 출연금
“정권 차원서 이뤄진 일…취재 말라”
신청~허가 최소 일주일 걸리는데
문체부는 하루 만에 허가증 내줘
↑19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미르재단이 입주해 있는
건물 전경.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비선 실세’ 의혹을 받아온 최순실씨의 인사 개입정황이 포착된 케이(K)스포츠는 민간재단법인이다. 올 1월 13일 설립된 케이스포츠는 “창조문화와 창조경제에 기여”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내세우고 있다. 순수 민간재단의 목적치곤 임기를 1년 반 남짓 남겨둔 박근혜정부를 먼저 떠오르게 한다.
‘창조’는 박근혜정부가 국정과제로 내세울 때 쓰는 핵심 열쇠 말이다. 이 재단의 정관에 나와 있는 또 다른 목표인 ‘국민행복’도 마찬가지다. 재단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 ‘체육’을 통해 이러한 설립목적을 이루겠다고 한다. 하지만 ‘국위선양’, ‘인재양성’, ‘남북 체육교류’ 등 공익사업을 하겠다는 재단의 설립 과정과 배경, 주체, 인적구성 그리고 운영에 이르기까지 숱한 의혹을 낳고 있다.
설립절차부터가 수상하다. 재단이 문화체육관광부에 1월 12일 설립신청을 한 뒤, 불과 하루 만에 허가증이 나왔다. 신청에서 허가까지 적어도 1주일, 길게는 수 십일씩 걸리는 관행에 비춰보면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신청서류는 불과 두 달 반 앞서 출범한 재단법인 미르의 복사판이다. 미르는 글로벌 문화교류 행사와 문화 창조기업 육성 등의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공익 법인이다. <한겨레>가 더불어민주당의 조승래, 오영훈 의원실을 통해 받은 두 재단의 정관을 살펴봤더니 총칙에서부터 조항 순서 및 문구 등, 정관의 내용이 미르의 것과 거의 똑같다.
재단의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가장 중요한 정관의 목적 또한 유사하다. 설립목적에 미르가 “문화라는 매개”라고 기재한 것을 케이스포츠는 “체육이라는 매개”라는 표현으로 바꾼 정도가 다를 뿐이다.
두 재단의 ‘창립총회회의록’은 회의장소와 안건을 비롯해 회의 순서, 문구, 분량 심지어 회의에 등장하는 상당수 인물까지 판박이다. 회의록은 정관과 함께 설립을 신청할 때 제출해야 하는 중요한 서류 중 하나다. 그런데 두 재단의 회의록은 일부 인물과 출연금 액수 등에서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베끼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다. 심지어 한 기업 임원은 직책이 부사장인데 상무라고 잘못 기재돼 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두 재단의 총회회의록이 아예 가짜로 판명 났다는 점이다. 실제회의는 열리지 않았고, 회의록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참석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어느 기업부사장은 “케이스포츠 재단이 뭐죠? 전혀 모르겠는데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용했다고 하는 날짜에 회의장은 대여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케이스포츠 뿐만 아니라 미르 또한 초고속으로 설립절차를 밟았다. 2015년 10월 26일 허가신청서를 낸 다음날 허가증이 나왔다. 더욱 놀라운 건 허가증이 나온 바로 당일에 현판식까지 열렸다는 것이다.
문체부소관인 인허가날짜가 재단관계자들의 예상대로 착착 진행될 것이란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들이다. 각각 체육과 문화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두 재단의 몸통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설립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과 목적 등은 한 기획자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수두룩하다. 머리는 하나인데 몸은 두개인 쌍둥이를 연상시킨다.
두 재단의 돈줄 역시 같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앞세운 표면적 모금과정도 똑같다. 두 재단엔 각각 19개 기업이 참여했다. 양쪽에 돈을 댄 곳은 모두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다. 공기업을 뺀 자산 기준 상위 10대그룹인 삼성, 현대차, 에스케이, 엘지, 롯데, 포스코, 지에스, 한화가 두 재단에 모두 출연(약관 및 창립총회 회의록 기준)을 약속했다.
이후 출연금과 참여기업들은 다소 달라지지만, 설립 당시 케이스포츠엔 269억 원을, 미르엔 469억원을 내겠다고 밝혔다. 두 재단이 실제로 거둬들인 돈은 이보다 많다. 미르가 국세청을 통해 공시한 자료를 보면 출연금은 486억원(2015년 12월 말 기준)에 이른다.
케이스포츠 또한 “지난 8월 말 현재 기업들로부터 288억 원을 모았다”고 정동춘 이사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밝혔다. 출연금은 기업규모별로 거의 비례한다. 예를 들어서 케이스포츠의 경우엔 그룹별로 삼성에서 79억원, 현대차에서 43억원, 에스케이에서 43억원, 엘지에서 30억원, 롯데에서 17억원을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재계 순위가 높을수록 출연금도 컸다.
재벌들의 출연이 전경련을 통해 갹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뒤에서 청와대가 움직였다는 의혹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기업들이 몇 개월 만에 약 80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돈을, 어떻게 꾸려지고 운영될지도 모를 불투명한 재단에 모아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작 기업들은 돈을 내놓고도 이후 재단 운영에 관심을 보이지도, 참여도 하지 않았다. 최근 재단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자, 전경련은 뒤늦게 이사 한명을 앉히는 모양새를 갖췄다. 재단 모금 과정에 안종범 청와대정책조정수석(당시 경제수석)이 깊이 개입한 정황이 있다는 의혹이 일고 있지만 안 수석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거액을 출연한 기업체의 재무담당 관계자는 “우리에게 모금과정을 취재하려고 하지마라. 정권차원에서 이뤄진 일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입이 없다”고 말했다. 거액을 모아놓고도 두 재단 모두 최근 ‘개점휴업’ 상태다. 케이스포츠는 현재 이사장을 뺀 이사4명 가운데 2명, 감사 1명이 사임했다. 이사장 자리도 지난 5월 새로 취임하기까지 대략 석 달 동안 공석이었다.
미르재단도 이사장을 뺀 6명의 이사 가운데 2명이 그만둔 상태다. 몇 달 사이에 재벌들로부터 수백억 원을 거둬들이고, 뻣뻣하던 문체부가 알아서 기도록 하는 ‘권력’이 미르와 케이스포츠 뒤에 존재하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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