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조선의 주축활자 갑인자(甲寅字)

야촌(1) 2016. 6. 6. 14:46

■ 조선의 주축활자 갑인자

 

[번역문]

 

선덕 9년(1434) 7월에 전하께서 지중추원사 이천(李蕆)에게 말씀하셨다.

“경이 예전에 감독하여 만든 활자로 인쇄한 책들은 참으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다만 글자 모양이 너무 작아 읽기 불편한 점이 있으니 큰 글자로 된 책으로 자본(字本)을 삼아 다시 주조하는 것이 더 좋겠다.”

 

라고 하시며 그에게 활자 주조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고 집현전 직제학 김돈(金墩), 집현전 직전 김빈(金鑌), 호군 장영실(蔣英實), 첨지 사역원사 이세형(李世衡), 의정부 사인정척(鄭陟), 봉상시주부 이순지(李純之), 훈련관참군 이의장(李義長) 등에게 실무를 주관하게 하셨다.

 

그리고 경연(經筵)을 위해 보관된 『효순사실(孝順事實)』· 위선음즐(爲善陰騭)』· 『논어』 등을 꺼내어 자본으로 삼게 하고, 부족한 글자는 진양대군 유(瑈)에게 직접 쓰게 하셨다.

 

공역은 그달 12일에 시작하여 2개월 만에 20여만 자를 주조하고 9월 9일에 처음으로 인쇄에 들어가니, 하루에 인쇄한 양이 40여 장이나 되었다. 또한, 활자 모양이나 인쇄 방식이 이전의 활자에 비해 훨씬 더 반듯하고 갑절이나 더 수월해졌다.

 

[원문]

宣德九年秋七月, 殿下謂知中樞院事臣李蕆曰: “卿所嘗監造鑄字印本, 固謂精好矣. 第恨字體纖密, 難於閱覽, 更用大字本重鑄之, 尤佳也.” 仍命監其事, 集賢殿直提學臣金墩、直集賢殿臣金鑌、護軍臣蔣英實、僉知司譯院事臣李世衡、議政府舍人臣鄭陟、奉常主簿臣李純之、訓鍊觀參軍臣李義長等掌之. 出經筵所藏『孝順事實』、『爲善陰騭』、『論語』等書爲字本, 其所不足, 命晉陽大君臣瑈書之. 自其月十有二日始事, 再閱月而所鑄至二十有餘萬字. 越九月初九日, 始用以印書, 一日所印, 可至四十餘紙. 字體之明正, 功課之易就, 比舊爲倍矣.

 

김빈(金鑌, ?~1455), 「갑인자주자발(甲寅字鑄字跋)」

-------------------------------------------------------------------------------------------------------------------------------------------------------

[해설]

 

1434년(세종 16) 9월 9일에 갑인자의 주조를 마치고 그 내력을 기록한 김 빈의 글이다.

이러한 내용의 글을 주자발(鑄字跋) 또는 주자사실(鑄字事實)이라고 한다.

 

조선조 활자본 가운데에는 책의 말미에 본문과는 별개로 인쇄에 사용된 해당 활자를 설명한 주자발이 수록된 사례가 종종 보인다. 이 주자 발은 활자의 주조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 작성하는 것으로 해당 활자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다.

 

또한 조선의 금속활자가 대부분 왕명에 의해 주조되는 것인 만큼 조선왕조실록에 활자주조에 대한 전후의 사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자료를 근거로 조선의 대표적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경위를 알아보자.

 

갑인자의 주조는 세종의 나빠진 시력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세종은 젊은 시절 고기 없이는 식사를 못할 정도로 육식을 즐긴 까닭에 몸이 매우 비만했다. 게다가 30세 이후로는 소갈병(당뇨병)에 걸려 하루에 물을 한 동이 넘게 마실 정도로 심했다. 결국, 당뇨 합병증으로 세종은 심한 안질(眼疾)을 앓게 된다.

 

왕자들이 먼저 나서 세종에게 기존의 활자인 경자자(庚子字)보다 모양이 큰 활자를 새로 만들자고 건의했다. 인쇄된 책의 첫 번째 독자는 다름 아닌 세종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당시 원로대신인 판중추원사 허조(許稠)까지 합세하여 자신과 같은 늙은 신하들이 노안에 보기 편하도록 큰 활자로 책을 인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세종은 여진족에 대한 북벌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병기보충을 위해 구리의 수요가 많았고 그 일을 맡을 기술자들도 부족한 형편이었으므로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서적의 간행 역시 꼭 필요한 일이어서 경자자 주조 때 감독을 맡은 경험이 있는 이천에게 다시 책임을 맡기고,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이의장 등에게 실무를 주관하게 하였다.

 

활자의 바탕이 되는 자본(字本)은 중국 서법의 최고 1인자인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로 간행한 『효순사실』과 『위선음즐』 그리고 『논어』에서 뽑는 것으로 정했다. 여기에서 빠진 글자는 진양대군, 즉 수양대군이 직접 써서 보충하게 했다. 활자 주조의 공역은 1434년 7월 12일에 시작하여 2개월도 지나지 않아 20여만 개의 활자가 만들어졌다.

 

세종은 이렇게 완성된 갑인자를 가지고 먼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인쇄하도록 정척에게 명하였는데, 하루에 40여 장을 찍어낼 수 있었다. 이는 하루에 20여 장을 찍은 경자자의 두 배나 되는 인쇄량이다. 활자 모양도 이전보다 규격화되어 조판과 인쇄를 하기에 훨씬 수월해졌다.

 

 

 

 

↑왼쪽 : 1434년에 갑인자로 인쇄한『대학연의(大學衍義)』

 

 

↑오른쪽: 1436년에 갑인자로 인쇄한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보물 제1077-2호)

 

당시 인력과 물자가 부족한 악조건 속에서 20여만 자의 활자를 주조하는 데에 걸린 기간이 2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고 모양도 한층 정교해진 것은 그만큼 활자의 주조기술이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감독을 맡은 이천을 비롯하여 장영실, 이순지 등 실무를 주관한 이들이 모두 세종대 과학기술을 주도한 조선 최고의 과학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갑인자에 글꼴을 제공한 『효순사실(孝順事實)』과 『위선음즐(爲善陰騭』은 어떤 책일까?

『효순사실(孝順事實)』은 책 이름 그대로 효성이 지극한 중국의 역대 인물 207명에 대한 사적을 모아 10권으로 편집하여 1420년에 완성한 책이며, 『위선음즐』은 역대의 자선가 165명에 대한 전기자료를 모아 역시 10권으로 편집한 책으로 1418년에 완성되었다.

 

두 문헌은 세종당시 명나라황제였던 영락제(永樂帝)가 책의서문을 썼을 뿐 아니라 각 인물의 행적을 직접 시(詩)로 지어 수록할 만큼 편찬에 깊이 관여했다. 따라서 간행이 되자마자 중국내의 친왕(親王)들과 고위관료 및 국자감을 비롯한 각 급 학교에 배포되었고 조선에도 대량 유입되었다.

 

그중에서도 『위선음즐』은 특히 많이 들어왔다. 1419년 6월에 영락제는 성절사 이지숭(李之崇)을 통해 600권을 보내주었고, 2개월 뒤인 8월에는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을 통해 1,000권을 보내왔다.

 

또 그해 12월에는 사은사 이비(李裶)를 통해 22상자를 보내주기도 하는 등 1종의 서적을 실로 엄청나게 보내주었다. 갑인자의 주조가 시작되기 직전인 1434년 5월 25일에는 명나라 황제가 보낸 『위선음즐』 441질을 각 관청과 신하들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효순사실』은 1434년 세종이 설순(偰循)에게 명하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할 때 많은 영향을 준책으로, 『효순사실』에 수록된 영락제의 시가 『삼강행실도』에서 그대로 인용되기도 하였다.

 

이들 두 문헌은 중국의 황제가 직접 편찬하여 간행한 것인 만큼 외형상으로도 이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고 있었으며 당시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유통된 서적이었다. 따라서 갑인자가 이를 자본으로 삼았다는 것은 당대 최신의 품격 있는 글꼴을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80년 후 중종(中宗)은 이 갑인자로 인쇄한 책을 보고 종이 품질뿐만 아니라 인쇄 상태도 매우 정교하여 근고(近古)의 서책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하면서 그 뒤로는 점점 수준이 떨어졌다고 한탄한 바 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갑인자는 선조, 광해군, 현종, 정조 등 후대 왕들에 의해 여러 차례 개주(改鑄)되면서 조선말까지 서적의 인쇄 출판에 가장 크게 기여하게 된다.

 

글쓴이 : 최채기/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