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고전산문] 딸아이 제문

야촌(1) 2017. 1. 9. 07:52

[번역문]

 

그렇지만 내가 험한 곳을 넘고 건너서 멀리 도는 길을 마다하지 않은 건 너 때문이 아니었더냐. 돌아보고 연연하면서 머뭇거리고 맴돌다가 하룻밤 묵은 건 또 너 때문이 아니었더냐. 나는 너를 만나보고 위로받을 수 있으리라 마음속에 여겼는데, 도착하자 보이는 것이라곤 황량한 개암나무와 고목뿐이고, 너의 예쁘고 단아하던 용모는 볼 수 없구나.

 

들리는 것이라곤 골짜기에 부는 애달픈 바람소리뿐이고, 너의 맑고 낭랑하며 유순하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구나. 불러도 알지 못하고, 말을 해봐도 응답이 없구나. 한 언덕 두 무덤에 모녀가 서로 의지하고 있어 손으로 어루만지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내 애통함을 배가시키지 않음이 없으니, 어떻게 내 심정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단 말이냐?…중략

 

무덤 주위를 세 번 돌며 곡하고, 한 소반의 제수를 차려놓고 땅을 치며 하늘에 울부짖건만 만사가 그만이로구나. 구천에 사무치는 한갓 눈물로 묵은 풀에 뿌리고 돌아가니, 네 무덤의 흙이 이제부터 다시는 마르지 않으리라. 아직 다 끊어지지 않았던 내 슬픈 애간장이 지금 마디마디 남김없이 찢어지누나.

 

[원문]

 

然余之崎嶇跋涉,不憚迂路者,非爲汝耶?顧戀遲回,留過一宿者,亦非爲汝耶?余之心,若將以見汝而相慰矣。及其至也,則所見者荒榛古木,而不見汝娟秀端好之容矣;所聞者悲風哀壑,而不聞汝淸琅和柔之音矣。呼之而無覺也,語之而無應也。一丘雙塚,母子相依,手撫目擊 無非增余之慟,則其何以少慰余懷耶?…중략…三匝之號,一盤之奠,擊地呼天,萬事已矣。徒將徹泉之淚,留著宿草而歸,汝之墳土 自此不復乾矣。抑吾哀腸之未盡絶者,今而寸裂無餘矣。

-김수항(金壽恒, 1629~1689), 『문곡집(文谷集)』 권23 「제망녀묘문(祭亡女墓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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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신안동 김씨 집안을 일군 문곡(文谷) 김수항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라는 시조로 유명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다.

 

그는 할아버지의 명성과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세력을 등에 업고 한 시대 정치판을 풍미했던 노론(老論)의 영수(領袖)였다. 또한 그는 일찍이 34살에 대제학이 되었으니, 31세로 최연소 대제학이 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에 버금가는 기록이다.

 

게다가 여섯 아들까지 문명(文名)을 떨쳐 숫제 ‘육창(六昌)’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복을 누렸다.

일견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는 그에게도 커다란 아픔은 있었다. 그는 20대 후반부터 아홉 아들 가운데 네 아들을 앞세웠고,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딸의 요절까지 겪어야 했다.

 

문곡의 외동딸은 1665년(현종 6)에 태어났다. 1678년(숙종 4)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의 증손인 이섭(李涉)에게 시집가 1680년 12월 1일 딸아이를 낳고 3일 만에 세상을 떴다.

그런데 6일 뒤에 그 아이도 죽고 말았다. 딸의 장례는 이듬해 2월 4일에 치러졌다.

 

“아, 하늘이시여, 나는 살게 하고 내 딸은 죽게 한단 말입니까?

내 딸을 내게 떠나게 해서 내게 끝없는 슬픔을 끌어안게 한단 말입니까?

하늘이시여, 애통합니다.

 

어찌 내 딸이 갑자기 죽을 걸 생각이나 했단 말입니까?

어찌 내 딸이 갑자기 나를 떠날 줄 생각이나 했단 말입니까?

[嗚呼天乎!使吾生而吾女死也?使吾女去我而吾抱無涯之戚也?天乎痛哉!豈以吾女而遽死也?豈以吾女而遽去我也?]”

 

이때 문곡은 어찌나 슬퍼했던지, “내가 너를 잃은 뒤 숙환이 다시 심해졌고, 성복(成服)을 하자마자 곧장 병석에 쓰러져 오랫동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吾自喪汝,宿患復劇,纔成服而卽仆席,久在人鬼關]”

고 술회하였다. 1685년 11월 15일이다.

 

귀성(歸省) 휴가를 얻은 문곡은 내친김에 다시 소장(疏章)을 올려 숙종의 허락을 얻어낸 다음, 마침내 벼르고 벼르던 딸의 묘소를 찾았다. 그리고 제수를 차려 놓은 다음, 인용한 대목이 담긴 장문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깊고도 짙은 부성애가 눈물로 뚝뚝 떨어지는 제문이었다.

 

예로부터 자식을 앞세우는 흉사를 악상(惡喪)이라 일컬었고,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 아픔은 동서고금에 다름이 없는지라, 팝송 가수 에릭 클랩턴(Eric Clapton) 역시 ‘Tears in heaven’이란 곡을 서럽게 노래한 바 있다.

 

알코올 중독으로 별거 중인 자신을 기다리던 아들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그는 사고 직전 아들이 보낸 마지막 편지를 받았다. 그는 아들에게 답장을 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답장이 바로 1992년에 직접 작곡한 ‘Tears in heaven’이다.

 

2004년 에릭 클랩턴은 더 이상 이 명곡을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때의 간절했던 그 느낌이 사라졌다는 이유였다. 문곡의 사위 이섭 또한 아내의 죽음을 아주 가슴 아파했으리라. 왜냐하면 그는 그 뒤로 끝내 재혼하지 않고 홀로 살다가 1692년에 일찍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연말에 팽목 항을 다녀왔다. 묵은해를 보내며 마음의 빚 하나를 갚기 위해서였다.

기실 나는 매주 한국고전번역원 전주분원으로 강의하러 갈 적마다 풍남문 앞쪽의 공원에서 장기농성을 하고 있는 유가족들을 마주치곤 하였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 깊숙이 인지하지 못한 채 그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유추해 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7시간의 행적’이 언론에 본격적으로 거론되면서, 나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아울러 그들의 아픔이 더욱 뭉클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팽목 항에 꼭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진도 앞바다의 맹골수로는 말이 없었다. 서러운 눈물만이 푸른 바닷물로 괴었고, 어른들의 잘못으로 억울하게 삶을 마친 어린 넋들은 속절없이 해무로 피어올랐다.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실종자 9명-단원 고등학교 학생 조은화ㆍ허다윤ㆍ남현철ㆍ박영인, 단원고 교사 고창석ㆍ양승진 선생님, 일반인 승객 권재근ㆍ권혁규ㆍ이영숙 씨는 과연 어디로 갔는가?

 

세상 참 공교롭게도 이 글이 공개되는 날이 바로 세월호 참사 발생1,000일째 되는 날이다.

그런데 늙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람은 결코 느끼지 못하는가?

 

코너링을 잘해서 ‘꽃보직’에 아들을 심은 사람은 숫제 알지 못하는가?

산고(産苦)를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자식을 잃은 그 큰 아픔을 아예 모르는가?

 

시종일관 모르쇠로 내닫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하고 상관없는 일인 양 시치미를 똑 떼고 있는 사람들은 정녕 냉혈한들인가? 그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이렇게 목 놓아 외치는가 보다.

“이게 나라냐?”

◇글쓴이 : 유영봉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주요 저서

   『고려문학의 탐색』, 이회문화사, 2001
   『하늘이 내신 땅』, 문자향, 2001
   『당나라 시인을 만나다』, 범한서적주식회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