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고려시대 재산 상속이야기

야촌(1) 2016. 3. 15. 22:01

[역옹패설] 고려시대 재산상속 판결문 이야기

 

☆《역옹패설(櫟翁稗說)》은 1342년(충혜왕 복위 3년)에 역옹 이제현(櫟翁 李齊賢) 저술한 시화집(詩話集)입

     니다.

☆고려시대의 재산상속관행은 균분상속이었음을 증명하는 판결문.

고려 말 학자 문충공(文忠公) 익재 이제현(益齊 李齊賢)이 쓴《역옹패설 》은 남매간의 재산소송 이야기를 흥

미롭게 전한다.

 

고려 23대 고종 때 경상도 안찰부사(按察副使) 손변(孫抃)에게 남매간의 재산상속에 관한 소송이 들어왔다.

내용인즉 ,남매의 아버지가 운명직전 유서를 남겨 전 재산을 결혼한 딸에게 물려주고 ,어린 아들에게는 검은색 옷 한 벌 ,갓 하나 ,미투리 한 컬 레 ,종이 한권만 물려준다고 쓰였는데 ,성장한 남동생이 아버지의 유서 내용이 매우 부당하다고 소송을 낸 것이다.

 

남동생이 재판관 손변(孫抃)에게

"딸과 아들이 한 태생인데 어째서 누나만 부모재산을 독차지하고 아들에게는 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

하고 부당함을 호소하자, 누나가 반박하길

"아버지가 운명하실 때, 집안의 전 재산을 딸에게 준다고 쓴 증서가 있지 않느냐 ?"

문서를 내밀어 정당함을 주장했다.

 

양쪽 주장이 팽팽하여 소송은 지지부진 시간을 끌었다.

남매간의 우애를 깨지 않는 판결을 위해 고심을 하던 손변이 하루는 남매에게 물었다.

 

"너희 부친이 죽을 때, 어머니는 어디 있었느냐 ?"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너희 나이는 몇 살이었느냐 ?"

"누님은 결혼했고 ,저는 일곱 살 이었습니다."

손 변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부모의 마음은 아들과 딸에게 모두 똑 같다.

어찌 결혼한 딸에게는 후하고 부모도 없는 아들에게는 박하게 했겠느냐 ?

 

내가 판단하기에는 너희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의지할 곳이 오직 누나뿐이라, 만일 유산을 똑같이 나눠준다면 혹 누나가 동생 양육을 소홀이 할까 염려한 것 같다.

 

그래서 아들이 장성한 후 이 종이에 소장을 써서 검은색 옷을 입고 ,갓을 쓰고 미투리를 신고 관에다 호소하면 이 일을 판단해 줄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아들에게 네 가지 물건을 남겨준 것이다.

 

나는 이 소송을 다음과 같이 판결하노라.

 

"너희 남매는 재산을 똑같이 나눠 우애를 지키고 부모의 깊은 뜻에 감사하라."

판결을 들은 남매는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고려시대 재산을 상속할 때는 기혼과 미혼, 아들과 딸, 장남과 차남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나눠주는

이른바 균등상속이었다. 이 이야기에서도 보면 남녀가 평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음을 알 수 있다.

 

옛 글에 명판관이 많은 나라보다 소송이 없는 나라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했다.

소송은 희비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손 변이 남매의 아버지가 굳이 유서를 남긴 숨은 뜻을 꿰뚫어보고 내린 판결은 가히 명 판결로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이제현(李濟賢, 1287~1367)은 ‘자주성을 잃은 고려’라는 미증유(未曾有)의 민족수난기에 일곱 왕(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왕) 시대를 거치며 네 번이나 시중을 지낸 경륜의 정치인이요, 대학자요, 시인이요, 역사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아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실재(實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益齋集)』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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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경상도 안찰부사(按察副使) 손변(孫抃)의 원래 이름은 손습경(孫襲卿)이었다.

습경(襲卿)의 이름을 풀이하면 ‘벼슬을 계승하다, 경(卿)을 잇다’는 뜻이다.

즉 관료로서의 출세를 바라는 의미이다.

 

반면 변(抃)이라는 이름은 ‘손뼉 치다’라는 뜻이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바라는 습경(襲卿)의 좋은 이름을 버리고, ‘손뼉치다’라는 변(抃)으로 바꾼 까닭은 아내의 계보가 왕실의 서족(庶族)에 연계되었으므로 대성(臺省)·정조(政曹)·학사(學士)·전고(典誥)에 임명될 수 없었다.

 

아내가 손변에게

“당신은 나의 계보가 천한 것으로 인해 유림(儒林)의 청요직(淸要職)에 오르지 못하니 나를 버리고 세족(世族)에게 장가드십시오.”

라고 하였다. 손변이 웃으면서

“나의 벼슬길을 위하여 30년 조강지처를 버린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요. 하물며 자식까지 있지 않는가?”

라고 하고, 듣지 않았다.

 

손변의 아내는 왕실의 핏줄을 타고는 났지만 신분제 사회의 관행상 떳떳한 정실 자식이 아닌 서녀였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손 변은 대성·정조 등 중요 청요 직에는 올라 갈 수 없었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아내는 이를 두고 볼 수 없었고, 다. 손 변 또한 출세 보다는 아내에 대한 사랑,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사랑했던 것이다. 하여 습경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이름으로 여기고 변(抃)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세사람들이 한번쯤 되새겨 봐야 할 귀감이 되는 이야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