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성삼문 선생 묘(成三問先生 墓)

야촌(1) 2016. 5. 28. 11:48

매죽헌 성삼문선생 묘

(한쪽 다리만 묻은 성삼문 묘역)

충남 문화재 자료 제81호

 

 

▲사진ⓒ풍류천하

 

▲매죽헌 성삼문선생 묘역 전경(梅竹軒成三問先生墓域全景)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아버지는 도총관 성승(成勝), 어머니는 현감 박첨의 딸이며, 조선 전기의 문신 ·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이다.

 

홍주(洪州 : 오늘날 충남 홍성의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날 때 공중에서 “났느냐?”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삼문(三問)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서울에서 그가 거주한 곳은 장원서(掌苑署) 앞의 현재 종로구 화동(花洞) 23번지 정독도서관 부근이었다(1986년 서울시에서는 그가 거주하던 곳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표석을 설치하여 놓았다).

 

 

▲성삼문의 신도비와 사당 성인각(成仁閣) / 사진ⓒ풍류천하

 

▲매죽헌 성삼문 사당과 신도비

 

▲사당 입구의 삼문

 

세종 20년(1438)에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세종 24년(1442)에 삼각산 진관사에서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세종 29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이후 집현전 학사로 뽑혀 수찬(修撰) · 직 집현전(直集賢殿)으로 올라갔다.

 

이때 세종의 명에 따라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였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항상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두터운 사랑을 받았다.

 

또한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에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 등과 이에 참여하였는데, 특히 당시 요동(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전후 13번이나 왕래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 오는 등 정확을 기함으로써 세종 28년(1446) 훈민정음을 반포하는데 공로가 많았다.

 

 

▲사당 성인각(成仁閣) / 사진ⓒ풍류천하

 

세종이 말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도 으례 그와 신숙주 · 박팽년 등을 따르게 하여 고문으로 삼으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고, 세종과 그 뒤를 이은 문종으로부터 나이 어린 단종의 보필을 늘 당부받아 왔다.

 

단종 1년(1453) 좌사간(左司諫)으로 있을 때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으면서 그 추종자들과 함께 집현전 신하들에게도 정난공신의 호를 내리자, 여러 학사들이 돌아가며 잔치를 베풀고 자축하였으나, 그는 혼자 그 호를 받음을 수치로 알고 잔치를 열지 않았으며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듬해 집현전 부제학이 되고 이어 예조 참의를 거쳐, 단종 3년(1455) 예방 승지가 되었다. 이해 윤6월에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하여 선위를 강요할 때에 그가 국새를 끌어안고 만좌 중에 통곡하였다. 이듬해 그는 좌부승지로서 아버지 성승과 함께 박중림· 박팽년· 유응부· 허조· 이개· 유성원 등을 포섭해서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면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성삼문선생 묘역의 원경                  ↑성삼문선생 묘역의 앞에서 입구방향을 바라본 모습

 

세종이 말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도 으례 그와 신숙주 · 박팽년 등을 따르게 하여 고문으로 삼으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고, 세종과 그 뒤를 이은 문종으로부터 나이 어린 단종의 보필을 늘 당부받아 왔다.

 

단종 1년(1453) 좌사간(左司諫)으로 있을 때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으면서 그 추종자들과 함께 집현전 신하들에게도 정난공신의 호를 내리자, 여러 학사들이 돌아가며 잔치를 베풀고 자축하였으나, 그는 혼자 그 호를 받음을 수치로 알고 잔치를 열지 않았으며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듬해 집현전 부제학이 되고 이어 예조 참의를 거쳐, 단종 3년(1455) 예방 승지가 되었다. 이해 윤6월에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하여 선위를 강요할 때에 그가 국새를 끌어안고 만좌 중에 통곡하였다. 이듬해 그는 좌부승지로서 아버지 성승과 함께 박중림· 박팽년· 유응부· 허조· 이개· 유성원 등을 포섭해서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면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묘역 후경 / 소재지>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8번지

 

이에 세조가 “그대가 나를 보고 임금이라 하지 않고 나리라 하니 나의 녹(祿)을 먹고 나에게 배반하였으니 어찌 반역이 아니라 하는가”고 하매 그는 “상왕께서 계신데 나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 하시오. 또 나는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소이다.  내 집을 뒤져 보시오”하였다. 이에 세조가 더욱 노하여 모진 고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달 8일에 아버지 승과 이개 · 하위지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고, 성삼빙(成三聘)·성삼고(成三顧)·성삼성(成三省) 등 동생과 성맹첨(成孟瞻)·성맹년(成孟年) 등 아들 4명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는 거적자리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처형된 후 세조는 그들을 가리켜 “금세(今世)의 난신(亂臣)이요, 만세(萬世)의 충신(忠臣)이로다”고 탄복하였다. 

 

그의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도 있는데,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한쪽 다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사육신 묘역은 1978년에 사육신 공원으로 단장되어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그는 동작구 노량진에 있던 민절서원(愍節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2009. 11. 17>나홀로테마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