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 1536년(중종 31)
[졸년] 1623년(인조 1)
[본관] 서산(瑞山)
[저작] 내암집
[관직]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옥사] 계축옥사(癸丑獄事)
정인홍(鄭仁弘, 1535년 9월 26일 ~ 1623년 4월 3일)은 조선중기, 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선조·광해군 대에 북인과 남명 조식학파(曺植學派)를 이끌며 정국을 주도했으며, 조식의 수제자이자 남명 학파의 지도자였다.
당색으로는 동인이었다가, 정철의 처벌을 놓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뉠 때는 강경파로 북인이었다.
자(字)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1573년(선조 6년) 학문과 덕행을 인정받아 황간현감으로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제용감정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합천에서 의병을 모아 합천, 성주, 대구 등지에서 활동하며 왜병을 격퇴하여 영남 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조식의 수제자로서 최영경, 오건, 김우옹, 곽재우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왜란이 끝난 후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으며 북인이 분열한 후에는 이산해와 함께 대북의 영수가 되었다.
전란 종결 후 대사헌, 중추부동지사, 공조참판 등을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군되었다. 북인이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뉠 때는 적극 간여하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인 이이첨 등이 대북이었으므로 광해군 정권의 원로로 예우받았다.
그러나 이언적, 이황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다가 유생들에게 탄핵받아 청금록(靑衿錄, 儒籍)에서 삭제되는 등의 시비에 휘말리기도 한다. 1623년 능양군 등은 80세 이상의 재상은 처형하지 않는 관례를 어기고 그를 참형에 처했다.
그 뒤 서인과 노론으로부터 광해군 실정의 책임자의 한사람으로 비판을 받아오다가 1908년 순종때 가서야 복권되었다. 임훈, 조식의 문인이다. <위키백과>
▲내암 정인홍(鄭仁弘,1535~1623)선생의 묘는 성주 야천삼거리에서 성주 쪽으로 가는 길 바로 옆에 있다.,
가야산국립공원 백운동 탐방지원센터로 가기 전에 합천과 성주의 군 경계 겸 경상남북도의 도계가 되는 부
근으로 행정구역으론 합천 쪽이다.
▲내암 정인홍 묘 / 사진ⓒ백달풍수연구소
▲소재지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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