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윤동주 묘역을 양떼가 밟고 지나가는 이유

야촌(1) 2016. 5. 11. 12:04

[취재후] 윤동주 묘역을 양떼가 밟고 지나가는 이유

 

KBS | 오세균 | 입력 2016.05.11. 10:51 | 수정 2016.05.11. 11:02

 

윤동주의 고향 북간도 용정의 동쪽 외곽에는 ‘영국더기’란 자그마한 언덕이 있다. 용정 사람이라면 모두 알만한 곳이다.‘영국더기’란 영국 사람이 살던 언덕이란 뜻이다. 일제 강점기에 영국 국적을 가진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이 살던 동네를 일컫는 말이다.

 

1907년 캐나다 장로회는 용정에 선교사를 잇달아 파송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선교를 시작했다. 성도가 늘어나자 캐나다 장로회는 용정 동쪽 산비탈 언덕 10만 제곱미터를 사들여 사택과 제창병원, 명신여학교, 은진 중학교, 동산교회 등의 건물을 지었다. 보잘것없던 시골 동네가 근대 서양문화를 접하는 통로가 됐고 항일 민족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도 이 영국더기에 있는 은진중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1941년 일제는 강제 퇴거령을 내리고 캐나다 선교사를 영국더기에서 몰아냈다. 이후 영국더기는 조락의 길을 걷는다.

 

일본 관동군 부대가 진주하면서 ‘군부더기’로 불리다가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로 바뀌었다. 이마저도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 영국더기에 있던 제창병원, 동산교회, 명신여학교, 은진중학교는 흔적도 없이 파괴돼 사라졌다.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영국더기는 지금 허름한 가옥들이 판자촌을 이루듯 가득 들어서 있다. 좁은 소로를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면 윤동주의 묘소가 나온다. 양지바른 언덕엔 비탈을 따라 봉분이 꺼진 수많은 무명의 묘가 가득하다. 간혹 십자가가 새겨진 비석을 통해 이곳이 옛 동산교회 묘지 터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윤동주 묘가 있다. 용정시 정부는 지난 1997년 6월 3일 윤동주 묘소를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정하고 2014년 7월 15일에는 표지석까지 세웠다. 표지석에는 보호범위를 돌비석을 중심으로 앞으로 5m, 뒤로 10m, 좌우 5m라고 명시해 놓았다.

 

하지만 민족 시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묘소는 초라했다. 묘소는 그 흔한 뗏장도 하나 입히지 않았고 봉분에는 개미굴이 만들어져 수많은 개미가 우글거렸다.

 

 

 

더욱 놀라운 일은 수많은 양떼들의 출현이다. 양떼 주인은 윤동주의 묘가 들어선 공동묘지를 양떼 방목 초지로 쓰고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양떼들을 몰고 와 공동묘지에 풀어 놓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저녁에 다시 몰고 축사로 돌아간다고 한다.

 

실제로 3백여 마리의 양떼는 공동묘지 이곳저곳을 돌며 풀을 뜯기 시작했다. 이들 양에게 묘소는 풀을 뜯는 장소일 뿐 묘지라고 피하는 법이 없다. 봉분 위에 올라가 풀을 뜯는 모습에 자지러지듯 경악할 노릇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날마다 해오던 일상이다.

 

수많은 양이 움직이며 풀을 뜯다 보니 공동묘지는 어느새 뿌연 먼지가 피어올라 왔다. 이런 모습에 윤동주의 묘를 다시 바라보았다. 잔디도 없이 흙뿐인 봉분은 여기저기 양들의 발자국이 선명히 나 있었다. 그리고 묘소 주변으로는 양들의 배설물이 가득했다.

 

이처럼 배설물이 많다 보니 파리가 들끓고 각종 날벌레가 쉴 새 없이 취재진을 괴롭혔다. 가만히 한 곳에 머물러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벌레를 쫓아내기 위해 쉴 새 없이 손사래를 쳐야 했지만 물러날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윤동주 묘소와 불과 10여 미터 떨어져 있는 송몽규 선생의 묘지도 마찬가지다. 관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봉분에 남겨진 양들의 발자국과 배설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송몽규 선생은 영화 ‘동주’에서 많이 조명돼 일반인도 많이 알게 됐지만, 뼛속까지 독립운동가로 일본 유학 중에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친구인 김석관 선생이 쓴 ‘청년문사 송몽규 묘’라고 새겨진 비석만이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윤동주 묘역에는 또 하나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할머니 남신필, 아버지 윤영석, 어머니 김용, 동생 윤광주 이 다섯 분은 이 동산 어딘가에 잠들어 계시지만 오늘날 묘소를 찾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라고 쓰여 있다.

 

윤동주가 아끼던 막내 동생 윤광주는 1962년 11월 30일 폐결핵으로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폐결핵 환자라 급히 시신을 수습하는 바람에 아직도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간도로 이주한 윤동주 일가족은 이렇게 사라지고 윤동주는 관리할 사람도 없는 공동묘지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아는 시인이다. 1942년 윤동주와 송몽규는 일본의 탄압과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개명 후 윤동주는 무척 괴로워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조국에서 마지막으로 쓴 ‘참회록’은 ‘서시’ 만큼이나 유명하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우리는 윤동주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온몸을 던진 독립운동가의 가세는 몰락하고 이제는 시신도 찾을 수 없는 상황. 있는 묘소마저도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공동묘지에 방치된 상황. 양떼들이 매일 봉분을 짓밟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참회해야 하지 않을까.

 

더욱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윤동주 묘소도 우리가 찾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윤동주의 시를 흠모하던 일본인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에 의해서다. 1985년 당시 와세다 대학에서 소위 잘나가는 교수였지만 연변대학으로 와 윤동주 찾기에 나섰다.

 

오오무라는 윤동주의 ‘서시’,‘자화상’,‘별헤이는 밤’ 같은 작품은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세계적인 명시’라고 극찬했다. 오오무라 교수의 각고의 노력 끝에 윤동주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윤동주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진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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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균기자 (sko@kbs.co.kr)